안성의 독립운동가(19) - 이오겸, 이오영, 이완규, 이완호, 이원선, 이유길, 이유만, 이유복, 이유석, 이유원, 이유직
안성의 독립운동가(19) - 이오겸, 이오영, 이완규, 이완호, 이원선, 이유길, 이유만, 이유복, 이유석, 이유원, 이유직
  • 봉원학 기자
  • 승인 2019.03.20 06: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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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3.1운동 100주년 특집, “안성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 기획연재-20

편집자 주 : 안성 3.1운동 100주년 특집, “안성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기획연재는 먼저 지난 20178월에 안성시가 출판한 안성의 독립운동가에 소개된 316명의 독립운동가를 소개하고자 한다. 한번에 10명 이상씩 나누어 소개할 계획이다.(소개순서는 책자에 있는 대로 성명 가나다순이다) 31일 이야기 했듯이 여기 소개하는 독립운동가와 관련된 자료는 일부 오류가 있을 수 있으며 안성시에서 현재 개정판을 준비중이다. 독자와 안성시민중에서도 관련 제보할 내용이 있으면 언제든지 제보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모쪼록 이 연재가 안성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관심과 연구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오겸 李五兼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칠곡리 139

이 명 : 李裕福

형량 : 순국

생몰년도 : 1896. 1. 27~1919. 7. 4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국장(1998)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전신주를 도끼로 찍어 넘어 뜨리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197월경 서대문감옥에서 심한 고문을 받아 순국했다.

정부는 199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 이유복(1-113;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칠곡리)과 동일 인물인 것으로 추정되어 추후 조사가 필요함.

 

관련자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396, 97, 166, 235, 236/ 243, 4

 

이오영 李五榮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칠곡리 620

이 명 : 李重五

형량 : 징역 2

생몰년도 : 1898. 9. 4~1966. 1. 19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족장(1990)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 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 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 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2년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 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東亞日報(1920. 7. 23)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175~177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422~482

 

이완규 李琓圭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서운면 신촌리 32 / 만주 유하현 삼원보

이 명 : 李元芳, 李源芳

형량

생몰년도 : 1895. 9. 4.~1950. 2. 6

계열 : 독립군

포상훈격 : 애족장(1990)

 

경기도 안성군 서운면 사람이다. 한일은행에 근무하다 191910월경 상해로 건너갔다. 1923년 만주의 군정서 재무사장대리( 財務司長代理) 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정의부 오상( 五常) 지방 총관으로 재만 한인의 자치활동에 전념했다. 1930년 홍진( 洪震) ·신숙( 申肅) 등이 북만주에서 조직한 한국독립당 소속의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 池靑天) 의 의용군 소대장으로 임명되어 일제와 무력투쟁 활동을 했다. 19329월 하얼빈일본영사관 파견원에게 체포되어 본국으로 압송 되었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 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國外容疑朝鮮人名簿(朝鮮總督府警務局) 284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45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6112

 

이완호 李完鎬

 

이완호
이완호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외가천리 23

이 명 : 李先鳳

형량 : 징역 3

생몰년도 : 1896. 6. 25~1963. 9. 21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족장(1990)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 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 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 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3년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 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東亞日報(1920. 7. 23)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175~177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422~482

 

이원선 李元先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 장능리

형량 : 징역 10

생몰년도 : 1879~1948. 9. 21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족장(2006)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 사람이다. 191942일 이죽면 죽산리에서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42일 밤 조문삼( 曺文三) 등과 함께 이죽면주재소·우편소·보통학교 등지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196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0월형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동년 7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경성지방법원 1919. 6. 9 / 경성복심법원 1919. 7. 31)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5419

 

이유길 李裕吉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칠곡리 120

이 명 : 李仁洙

형량 : 징역 26

생몰년도 : 1865. 12. 30~1924. 9. 27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족장(1990)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 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 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26월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 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東亞日報(1920. 7. 23)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175~177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422~482

 

이유만 李裕萬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칠곡리 / 수원군 인계 208

이 명 : 李性萬

형량 : 징역 3

생몰년도 : 1876. 10. 15~1964. 5. 17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족장(1990)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의 기물을 불태워버렸다. 이어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했다. 이어서 일본 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 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3년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 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東亞日報(1920. 7. 23)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175~177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422~482

 

이유복 李裕福

 

이유복
이유복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칠곡리 231

형량 : 징역 3, 옥중 순국

생몰년도 : 1896. 1. 27~1919. 7. 4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국장(1991)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양성면으로 넘어가 만세시위를 이어갔다. 양성면에서 일제 통치기구인 주재소, 우편소, 면사무소 등을 파괴한 후, 독립만세를 고창한 후해산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 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징역 3년형을 받고 옥중에서 다시 동지들과 함께 만세를 고창하다가 일본 경찰의 발포로 중상을 입고 7일간 신음 중 191974일 옥중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 을 추서했다.

 

* 이오겸(1-106;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칠곡리)과 동일 인물인 것으로 추정되어 추후 조사가 필요함.

 

관련자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175~177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422~482

한국독립사(김승학, 1965) 하권 242

3·1운동 피살자명부

 

이유석 李裕奭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칠곡리 / 평택군 현덕면 방축리 125

이 명 : 李裕魯

형량 :

생몰년도 : 1886. 4. 25~1950. 1. 14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국장(1990)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2일에 걸친 안성군 원곡면·양성 면의 독립만세시위 주동자로서 홍창섭·이근수·이덕순·최은식·이희룡 등과 함께 전개했다. 41일 오후 8시경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 앞에서 1천여 명의 만세시위 군중들과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만세시위를 양성면으로 전파하던 중 성은고개에서 시위 군중들에게 오늘 저녁에 아무런 약속도 없이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은 하늘의 도움이니 양성 경찰주재소로 가서 일본인 순사도 끌어내어 함께 독립만세를 불러야 한다.”고 역설했다. 양성면에서 양성면민 시위대와 합세하여 일제 통치기구 파괴를 주도하고, 다음날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 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일본 경찰의 검거 대상이 되었으나 이유로(李裕魯)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계속 피신 생활을 하여 체포되지 않고 해방을 맞았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 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每日申報(1919. 8. 10)

東亞日報(1920. 7. 23)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175~177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422~482

 

이유원 李裕元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칠곡리 333 / 평택군 평택면

이 명 : 李元七

형량 : 징역 2

생몰년도 : 1890. 11. 3~1945. 1. 4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족장(1990)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 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 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 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2년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 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東亞日報(1920. 7. 23)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175~177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422~482

 

이유직 李裕稷

 

이유직
이유직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칠곡리 520 / 칠곡리 533

형량 : 징역 2

생몰년도 : 1896. 3. 27~1969. 3. 20

계열 : 3·1운동

포상훈격 : 애족장(1990)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4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 위에 참여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 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 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 었다.

1921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2년형(미결구류일수 500일 본형 산입) 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 을 추서했다.

 

관련자료

判決文(고등법원 1920. 3. 22 / 경성지방법원 1920. 8. 10 / 경성복심법원 1921. 1. 22)

東亞日報(1920. 7. 23)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175~177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422~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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