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릴 뿐 꺾이지 않는 대만(TAIWAN) (2)
흔들릴 뿐 꺾이지 않는 대만(TAIWAN) (2)
  • 시사안성
  • 승인 2019.02.2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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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권의 사진에 담긴 이야기 - 29
中國時報 인터뷰 기사/ 1979년 4월 12일자 대만의 유력 일간지 중국시보에 게재된 안성JC 대만 방문단의 인터뷰 기사가 실린 신문기사이다(사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필자)
中國時報 인터뷰 기사/ 1979년 4월 12일자 대만의 유력 일간지 중국시보에 게재된 안성JC 대만 방문단의 인터뷰 기사가 실린 신문기사이다(사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필자)

대만 永和 靑商(청년회의소, JC) 초청으로 197947일부터 45일간의 일정은 계속되고 있었다. 70년대에는 외국 나가기 위해 여권을 내기가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구나 비자를 발급 받는다는 데에는 한두 가지 어려움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필자는 학교수업을 비우고 떠나야 하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고 신원식(루가) 교장신부님의 배려가 아니었다면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일정은 대만JC 뿐만 아니라, 홍콩을 거쳐서 일본 愛知安城(ANJO) JC까지 방문하는 1011일간의 여정이었기 때문에 신부님께서 외국에 나가 견문을 넓혀서 학생들에게 넓은 시야를 갖게 하라는 격려가 없었다면 불가능 했던 일이기 때문에 지금도 결코 잊혀 지지 않고 있다.

 

1. 中國時報의 인터뷰 기사

411일 아침 공식 방문한 永和市는 대만의 수도 臺北(TAIPEI)시에서 남쪽으로 강(淡水河) 하나 건너 인접해 있는 인구 166천명의 전원도시였다. 시청에 들어서자 마치 탈렌트같이 잘 생기고 젊은 孫勝治시장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과장들은 거의 노인 분들인데 어떻게 젊은 시장이 취임 하였는가 궁금하였다. 임명제인 줄 알았는데 선거제이고 JC출신으로서 민선에 의해 선출되었다는 것이다. 永和市에서는 지방자치제의 실현으로 시의회가 구성되어 있었고 시장은 시의회의 의결에 따라 집행한다는 것이었다.

영화시는 농. . 상업의 혼합도시로서 교육기관은 고교 3, 중학교 2, 소학교 7개로 비교적 많으며 종교시설인 불교당은 시내 곳곳에 많았으나 천주교는 단 두 곳뿐이었다.

孫勝治 永和시장과의 인사교류/ 동년 4월 11일 아침 안성JC 방문단일행이 대만 영화시청을 방문했던 당시 손 시장과 명함 교류를 하고 있는 필자사진이다
孫勝治 永和시장과의 인사교류/ 동년 4월 11일 아침 안성JC 방문단일행이 대만 영화시청을 방문했던 당시 손 시장과 명함 교류를 하고 있는 필자사진이다

시청을 방문하였을 때 시장은 우리를 공식적인 민간외교관으로 대우하여 기자단까지 대기 시켜 놓는 성의를 보였다. 이튿날인 412일 아침엔 일간지 中國時報에 우리 방문단 소식이 박스기사인 3단으로 사진까지 보도된 것을 보고 대단한 긍지를 느꼈다.

中華民國(자유중국)은 미국과의 외교단절로 인하여 세계 각국들과 줄줄이 국교가 끊어지는 바람에 민간외교로서 헤쳐 나가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는 듯이 보였다. 신문에는 우리들의 방문단 일정과 방문 목적, 방문 소감 등 인터뷰기사가 비교적 상세하게 보도되었다(사진).

이어서 中華民國JC 중앙회를 방문하였다. 우리 방문단을 맞이하기 위해 劉炳森 중앙회장이 미리 나와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갑자기 대만을 방문 중인 국제청년회의소(JCI) 부회장 JOE MURPHY의 방문 일정과 겹쳐서 중앙회장은 蔣經國 총통을 방문할 약속으로 자리를 떠나, 우리 일행은 그만 깜짝 대화로 대신하고 말았다. 역시 대만에서는 정치적 외교단절로 인하여 민간 사절단을 상당히 대우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2. 仙島 아리산 꾸냥

대만 소수민족인 阿美족의 춤/ 대만 仙島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 민속공연장을 방문한 안성JC 대만방문단이 공연을 펼치는 阿美족 소녀들과 함께 춤을 추며 원을 돌고 있는 모습이다
대만 소수민족인 阿美족의 춤/ 대만 仙島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 민속공연장을 방문한 안성JC 대만방문단이 공연을 펼치는 阿美족 소녀들과 함께 춤을 추며 원을 돌고 있는 모습이다

시원한 고속도로를 따라 臺北 서남쪽 50km 밖에 있는 다목적 댐 石門水庫31600만 평방미터의 저수량을 가진 호수로서 대만 수도 근처의 농업용수, 상수도를 해결하고 있는데, 만약 이 물을 풀어 놓으면 대북시는 완전히 잠겨 버릴 정도의 규모라고 말한다.

전망대 와 레스토랑을 갖춘 관광지로서 호수 한 가운데에 있는 仙島에는 대만 특유의 산포족인 阿美족이 살고 있었다. 섬 가운데 마련된 관광객을 위한 공연장소에는 전통적인 고유의 민속 의상을 입은 아미족 소녀들이 애조 띤 노래와 함께 춤을 추고 있었다.

곡조가 귀에 익은 아리산 꾸냥의 노래를 부를 때 춤추는 무희들 손에 이끌려 얼떨결에 그들과 어울려 춤을 추게 되었다. 추장처럼 분장한 노인의 얼굴엔 아직도 원주민의 흉한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대만은 섬 자체가 관광자원인데 그중에서도 陽明山의 절경과 北投온천 속에 파묻힌 華南大飯店(Insula Hotel)에서의 야경은 내 자신을 잊게 했으며, 中山路의 거리 풍경과 대만 최대의 관광호텔 圓山大飯店(Grand Hotel)의 궁전식 위용은 입을 다물고는 쳐다볼 수 없는 것 그 자체였다.

 

3. 중국본토 수복 위한 집념

蔣介石 총통 묘소인 陵寢 참배/ 4월 11일 오후 대만 挑園현 慈湖에 있는 장총통의 묘소인 능침을 참배하고 나와서 찍은 필자의 모습이다
蔣介石 총통 묘소인 陵寢 참배/ 4월 11일 오후 대만 挑園현 慈湖에 있는 장총통의 묘소인 능침을 참배하고 나와서 찍은 필자의 모습이다

 

국부로 추앙 받던 中正 蔣介石 총통이 서거하던 날 온 국민은 땅에 엎디어 대성통곡을 하며 우리는 당신을 믿고 여기까지 따라 왔는데 먼저 가시니 웬 말이냐고 울부짖으며 며칠간 전국의 모든 상점이 철시를 했다고 한다.

11일 오후엔 桃園慈湖에 있는 장총통의 묘소인 陵寢을 참배하였는데 총통은 매장되어 있지 않고 지상에 가매장된 상태로 모셔 놓았다고 한다. 중국 본토를 수복하게 되면 운구할 목적으로 시신은 임시로 묘역을 정해 놓고 철저한 경비를 하고 있었다.

경내는 아담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으며, 의장대가 보초를 서고 있었다. 안내 직원은 참배객을 인도할 때 무엇인가 엄숙한 선언을 하며 허리 굽혀 삼배를 시킨 후 잠깐 머물게 한 다음 바로 퇴장시키는 것이었다.

총통을 기리기 위한 동상은 孫文선생과 함께 거리 요소마다 세워져 있었다. 당시의 총통은 아들 蔣經國이 후계자로 국민대회(국민의회)에서 선출되었고 작은 아들 蔣偉國3군 대학 총장으로 있는데 두 형제가 아버지의 유업을 달성시키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다고 들었다.

 

4. 국립 古宮博物園

대만 국립 古宮博物園 관람/ 4월 12일 대북시 양명산 기슭에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는 국립 박물관을 관람하였을 때 안성JC방문단과 영화JC 회장단이 함께 촬영한 단체사진이다
대만 국립 古宮博物園 관람/ 4월 12일 대북시 양명산 기슭에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는 국립 박물관을 관람하였을 때 안성JC방문단과 영화JC 회장단이 함께 촬영한 단체사진이다

1211臺北陽明山 기슭에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는 국립 고궁박물원을 방문하였다.

자유중국(대만)이 세계에서 자랑하는 이 박물관은 전통을 살린 현대식 양식으로 1965년 증축된 건물인데 5천 년 대의 중국 역대 왕조로부터 전해오는 각종 진기한 국보급 예술품 24만점이 보관되어 있었다.

8개 전시장으로 구분된 이 건물은 웅장하였으며, 상설 전시품은 약 3천점 씩 3개월 마다 내용을 바꾸어서 전시하기 때문에 전부 관람 하려면 20년이나 걸린다고 한다.

중국 본토에 있던 전시품은 1949년 고 총통이 1개 사단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대만으로 옮겨온 귀중품인데 옥기(玉器), 자기(瓷器), 칠기(漆器) 등이 대종을 이루고 있었다.

나라 때의 상아로 만든 꽃배(雕象牙透花樓船)는 왼손 크기의 실로 정교한 상아 조각품인데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면 육안으로 볼 수 없었던 사람의 형상이 들어 있는데, 어떻게 그러한 조각을 섬세하게 해 넣었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만 국립 영화촬영소 관람/ 4월 12일 오후 1시에 대북시 중심가에 자리 잡고 있는 국립 영화촬영소인 中國電影文化城을 방문하여 실제의 무술 영화 촬영을 관람하기위하여 구입한 입장권 사진이다
대만 국립 영화촬영소 관람/ 4월 12일 오후 1시에 대북시 중심가에 자리 잡고 있는 국립 영화촬영소인 中國電影文化城을 방문하여 실제의 무술 영화 촬영을 관람하기위하여 구입한 입장권 사진이다

오후 1시에 방문한 中國文化城은 양명산 근처 대북 중심지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역시 중국 전통의 궁전 식으로 지은 호화로운 민속 박물관이다. 이곳은 국립 영화촬영소인 중국전영문화성(中國電影文化城)을 겸하고 있는데 마침, 중국의 무술영화를 촬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한국에서 보던 중국 영화의 궁금증을 촬영 현장을 통하여 풀 수 있게 되었다.

다음 방문지인 대북시 원산 기슭에 있는 충열사(忠烈祀)는 중국을 지키다 가신 영령들을 모신 현충사였다. 입구에 부동자세로 서 있는 두 명의 보초는 혹시 마네킹인가 의심하여 바짝 다가가서 얼굴을 들여다보니 눈은 깜박이지 않았으나 눈동자엔 촉촉하게 젖어 있어서, 그제서야 사람인 줄 알 정도로 요지부동 그 자체였다.

눈을 똑바로 뜨고 서 있는, 항상 깨어 있는보초들의 자세는 바로, 대만 국민의 정신자세이며 중국 본토 수복을 향한 의지의 표시로 볼 수 있었다.

대만의 가로수는 바닷바람에 그저 흔들릴 뿐 꺾이지 않듯이, 대만은 중국 대륙에서 불어오는 정치적 바닷바람, 그보다 더한 군사적 폭풍우에도 그저 흔들릴 뿐 꺾이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5. 밤에만 화려한 홍콩(香港)

(1) 지워진 화장

대만 永和JC 기념패/ 1979년(中華民國 六十八年) 4월 8일 대만JC와의 자매결연 당시 영화 靑年商會 謝財福 회장으로부터 받은 필자의 기념패 사진이다
대만 永和JC 기념패/ 1979년(中華民國 六十八年) 4월 8일 대만JC와의 자매결연 당시 영화 靑年商會 謝財福 회장으로부터 받은 필자의 기념패 사진이다

12일 밤 7시 비행기가 홍콩에 들어섰을 때는 약간 설레는 마음이었다. 세계 굴지의 관광지 홍콩의 화려한 정경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온통 불꽃으로 뒤덮인 섬, 호수에 떠 있는 반딧불, 불빛으로 칭칭 감긴 九龍반도를 보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기체가 꽃밭으로 빠지는 듯 해변 활주로에 안착한 일행은 호텔 皇宰 17층에 예약된 침실에 여장을 풀 사이 없이 궁금하던 밤거리를 관광하러 나섰다. 불빛 건물인지 네온의 숲인지 구별할 수 없는 네온사인은 움직이지 않은 채 켜져 있는 상태로 찬란함 그 자체였다. 정치적인 이유로 껐다 켰다하는 사인(sign)을 일체 금지시켰다는 설명이다.

우선 한국식당 梨花苑에서 김치를 실컷 먹고 대만 방문 시 목에 끼어있던 중국요리의 기름기를 말끔히 씻을 수 있었다. 건물 숲속을 거닐며 눈을 황홀케 하는 것은 유흥장과 각종 보석 상점이었다. 자유분방한 홍콩은 밤이 숨 가쁘게 돌아간다.

이튿날 아침에 본 홍콩 시가지는 파도가 밀고나간 자리처럼 무질서하고 지저분한 채로 아주 한가해 보였다. 화려했던 불빛도 사라지고 들끓던 인종시장(?)도 한산해 보였다. 바나나 껍질, 영어 한문이 뒤섞인 휴지조각들이 널려있는 거리는 마치 쓰레기차가 흘리고 지나간 자리 같았다.

밤에 화려했던 홍콩의 얼굴 화장은 곧 지워져 버리고 민낯 모습 바로 그것만이 남아있었다.

 

(2) 九龍은 중공에 반환 되려나

홍콩 공항 출국카드/ 1979년 4월 15일 홍콩 공항에서 일본 安城(Anjo)JC를 방문하기 위해 출국 전 필자가 작성한 香港旅客離港申報表이다
홍콩 공항 출국카드/ 1979년 4월 15일 홍콩 공항에서 일본 安城(Anjo)JC를 방문하기 위해 출국 전 필자가 작성한 香港旅客離港申報表이다

홍콩의 구룡반도는 중공(당시 호칭) 대륙에 붙어있기 때문에 개방된 중국 붐과 더불어 관광지로서 더욱 각광을 받고 있는 곳이다. 영국령 九龍은 중공의 입김에 크게 작용하는 듯 보였다. 체류하는 동안 필자는 중공 쌀로 지은 밥과 중공 제 술을 먹고 마셨으며 수돗물과 전기도 중공에서 공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항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구룡역은 중공의 北京으로 직행하는 열차가 머무는 곳이어서 그런지 딱 벌린 상어 입처럼 보였다. 세계 007의 각종 공작이 이루어지는 스파이 도시이기도 한 구룡반도 중심가엔 영화배우 최O희 씨가 납치되었다는 허여멀겋게 보이는 건물의 프리마 호텔이 기분 나쁘게 뻐기고 서 있었다.

구룡반도의 절반구역과 홍콩 섬은 영국 조차지로서 100년간 통치 후인 1997년에 반환될 예정으로 있었다. 그러나 100년간이나 자유분방하게 살아온 홍콩 주민들을 중공에 귀속시켰다고 했을 때 어떤 방법으로 동화시킬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큰 숙제이며, 게으르기로 유명한 홍콩 주민들의 생계를 어떻게 유지시킬 수 있겠는가 하는 우려 때문에 중공에서도 고민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밤은 화려하고 낮엔 풍족한 홍콩 주민들의 운명은 어찌될 것인가 불쌍하게도 보였다.

 

(3) 山頂道(Victoria Peak Road)

13일 아침 일행은 홍콩 섬으로 가기위해 2.7km의 해저 터널을 통과하였다. 200m 해저에 특수공법으로 가라앉혀 놓은 콩크리트 파이프의 해저 도로는 남산 지하 터널보다 넓은 도로가 상 하행선으로 완전 구별되어 있었으며 공해 처리시설을 완벽하게 해 놓아서 아주 깨끗한 공기가 유지되어 있었다.

터널에 들어선지 불과 2분 만에 섬에 도착한 우리는 시원한 해변도로인 山頂道를 달려 해발 1808피이트 정상에 올라, 섬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이곳은 세계 3대항의 하나인 빅토리아항이었으며 지난밤에 비행기에서 화려하게 내려다보았던 휘황찬란한 네온의 도시 바로 그곳이었다.

바다에서는 하루 200여척의 상선들이 들락거리며 활동하고 있었고 해상공원에서는 산 정상과 연결된 케이블카들이 수박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수중 도시처럼 보이는 건물은 바다에 띄어 놓은 대형 선박 건물이며 그중 Jumbo(珍寶) 식당은 임금님 용상처럼 꾸민 식탁을 갖춘 호텔이나 다름없이 웅장해 보였다.

14일 내일에는 경기도 安城농협과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일본 愛知安城 농협과 安城(ANJO) JC를 방문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날 예정이다. (다음호에 계속)

박종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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