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4월 7일 오후의 하늘은 하양, 파랑들이 무수히 모였다가 물러나며 희한한 형상이 이루어진다. 하늘과 구름이, 구름과 구름이 조화를 이루어 화려한 정경을 전개하며 필자의 명상 속으로 파고든다.
JC청년기(20~40세)를 다 넘기기 전인 35세 때 외국을 한 번 가보겠다는 설계를 한 지 4년 만에, 중화민국(대만) 永和鎭 영화JC 초청으로 처음 이국땅을 밟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청년기에 ‘나’를 발견해야 장년, 노년기를 보람 있게 보낼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김포공항에서 이륙한지 2시간 만에 대만 상공에서 고도를 낮추는 순간 시계는 5시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녹음으로 우거진 듯 푸른 대지 위에는 예쁘게 단장된 농로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대만의 중정(中正)공항은 예상보다 크고 시설이 잘되어 있었다.
입국하자마자 挑園 靑商(JC) 陳繼昌회장과 영화JC 陳一雄, 陳欽諭 역대 회장과 회원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전년도인 1978년 12월, 불과 4개월 전에 한국을 다녀간 바 있는 이들은 굉장히 오래 사귄 친구 같이 느껴져 반가웠다. 4월의 깨끗한 봄을 만끽하던 필자는 불과 두 시간 후에 끈적끈적한 여름 기후에 부딪혔으나 이국 방문의 호기심으로 곧 잊어버리고 말았다.
1. 흔들릴 뿐 꺾이지 않는 가로수
도착한 4월 7일 늦은 오후, 아열대 기후 속에 사철 덥다는 대만(TAIWAN)은 섭씨 23도를 가리키고 있으나 그리 덥게 느껴지지는 않았고 특유의 땅 냄새가 바람을 타고 몸속으로 파고들 뿐이었다.
9차선의 완전 분리된 고속도로를 달려 불과 20분 만에 수도 臺北(TAIPEI)시에 들어섰다. 거리는 깨끗하고 한가로워 보였다. ‘톨게이트’의 착검 차렷 총 자세의 보초 군인들이 부동자세로 쏘아보는 눈동자와는 달리, 낮에 본 대북시의 거리와 주민들의 발걸음은 여유 있게 보였다.
30~40m의 널찍한 도로 사이사이에는 열대성 가로수가 이중삼중으로 자라고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가로수는 섬나라 바닷바람에 흔들리고 있을 뿐 꺾이지는 않았다. 식물원에서나 보는 야자수려니 하고 기둥을 만져보니 ‘시멘콘크리트’처럼 단단하기 짝이 없었다. 오랫동안 바람에 시달리고 시달려서 생명에 적응하기 위해 기둥이 단단하게 된 것이란다.
대만 역시 중공(당시의 호칭)의 국제사회 진출에 따라 외교단절을 당하느라 흔들리고 있었으나 강인한 정신력으로 단결된 국민은 쉽게 꺾이지 않았던 것이다. 거리의 건물 군데군데 莊敬自强 愛國自强의 붉은 구호가 자주 눈에 띠었다.
거리의 간판은 모두 漢字로 되어 있었고 영어로 된 글자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금년(1979) 1월 미. 중공이 국교를 선언하자, 반미 데모와 함께 자발적인 방위성금 대열이 한 달간이나 끊이지 않았다는 사실만 보아도 쉽게 꺾일 것 같지 않아보였다.
2. 한. 중 민간외교
대만 방문의 주된 목적인 중화민국 영화JC와 대한민국 안성JC와의 자매결연 조인식이 4월 8일 오후 1시부터 永和시내 중심가에 있는 해세계(海世界)란 회관에서 거행되었다. 무비카메라의 라이트 속에 진행된 조인식은 자유중국 국기위에 덧붙여 게시된 국부 孫文선생의 초상화에 허리 굽혀 세 번 절하는 국민의례로부터 시작되었다.
200여명의 영화 청년상회(靑年商會, 청년회의소) 회원 및 부인회원들, JCI(국제청년회의소) 임원, 영화시장을 비롯한 관내 기관장들과 이웃 챕터인 新化JC, 挑園JC 회원들이 우정 참석한 가운데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진행되었다.
양국 JC대표단의 서명으로 조인식은 다소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끝마치게 되었으며, 옆방에 마련된 연회장으로 안내되어 축하연을 열고 양국 JC의 발전과 민간외교의 결속을 다짐하게 되었다. 안성JC는 회장과 역대회장 둘, 재정이사 한명으로 대표단을 꾸려, 필자는 역대회장의 한사람으로 참석하였다.
원탁위에 펼쳐진 북경요리식 비둘기 고기, 오리구이와 양고기 곰국 등이 차례로 들어왔으며 상해요리인 각종 채, 사천요리 해산물 등은 우정의 맛을 돋우는데 충분하였으며 부인회원들과의 건배로 인한 한. 중 친선의 민간외교는 절정에 이른 듯하였다.
원래 유명한 중국요리인 줄은 알았지만 자유로이 식생활을 즐기며 여유 만만해 하는 민족성, 풍부한 식생활의 자원 속에 구김살 없는 생활의 일면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특히 한국인에게는 더없이 친절하고자 노력하는 민간외교의 일면을 찾을 수 있어 매우 흐뭇하였다.
3. 愛國自强 다짐하는 교육
4월 9일 아침 9시 永和국민중학교를 방문하였다. 필자가 교직자인줄 알고 이곳 중학교와 국립 대만대학, 사립 淡江대학 등의 방문 일정을 마련한 것이었다. 영화중학교에서는 瀋胎燕교장선생님이 직접 상황실(교장실)로 안내하여 학교소개를 해주었다.
학교교육은 국민정신 함양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특히 직업 및 상담교육이 활발하였다. 중학 의무교육 11년째라 하는데 학교에서는 교사의 연구 논문과 학생작품을 수록하여 3, 4종의 간행물을 컬러판으로 정기 발간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으며 홍보물 표지에는 예외 없이 愛國自强의 붉은 구호가 대문자로 쓰여 있었다.
학생 수 5600명에 교사 200여명의 매머드 학교치고는 운동장이 너무 비좁아서 섬나라의 인구밀도를 실감할 수 있었다. 학교 현관에는 학생 초상화가 10여개 걸려있었는데 모범학생을 표창하는 방법이며 여러 학생이 이를 본받게 하기위한 조치라는 것이다.
남녀공학인데 성적이 우수한 학생은 여학생과 한 반에서 공부하며 정서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말에는 다소 의아해 하였다. 교복이 중학생은 감색(紺色), 고등학생은 카키색으로 마치 군복차림 같았고 교모는 장교 정모와 비슷하였다.
오후에 방문한 국립 대만대학 농학원은 자연환경을 그대로 살린 유서 깊은 곳이었다. 학년 당 30명 전후의 정원을 가진 교실에서는 동물 해부실험을 하고 있었다. 방문단인 안성JC 역대회장 중 수의사가 있어 배려한 일정이었다. 동물 입원실까지 갖추어진 의료시설들을 안내하는 傳祖慧 노교수의 진실하고 겸손한 인간미에 모두들 감탄하였다.
臺北현 담수강변에 자리 잡은 대만성 가축위생시험소의 규모는 12개 부문의 연구실을 갖춘 훌륭한 시설이었다. 이 연구소에서 나오는 동물연구 업적은 세계 수의학계에서 가장 권위 있다는 인정을 받는다고 한다. 이곳에서 숨진 무명용사(?)를 위한 동물 진혼 탑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이들의 동물애호 정신의 농도를 가늠할 수가 있었다.
淡江대학은 사립인데도 조선, 항공의 단과대학을 가지고 있었다. 방위산업을 극비리에 추진하고 있다는 귀 뜸이었다. 나무가 울창하고 잔디가 넓은 야영지엔 靑年活動中心이란 아취 탑이 꼭 세워져 있었다. 대만의 대학생들은 휴가를 이용하여 야영활동을 함으로써 체력과 정신력을 기르는 교련 교육장으로 활용하는 훈련센터인 것이다.
4. 野柳 풍경 특정 관리구
4월 10일 오전부터 선택된 명소를 찾아 안내되었는데, 마치 부처님 덕분으로 안보를 유지하려는 듯 시내에는 절이 꽤 많아 보였다. 도교라고 하는 민속 종교인 지도 모르겠다. 애인끼리 가서 빌면 뜻이 이루어진다는 情人廟의 묘한 불교 건축양식, 굴속에 각종 불상을 전시해 놓은 媽祖廟안의 헌금 통은 인상적이었다.
대북 시 서남쪽 해변도로를 달려 金山 해수욕장으로 가는 산중 은밀한 곳엔 핵발전소와 조력발전소가 세워져 있었고 野柳 풍경 특정 관리구의 기암괴석들은 바닷물의 위력을 자랑하듯 각종 신기한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여인 머리 형상의 美人頭를 비롯하여 물개, 용의 형상, 앵무새, 코끼리 등 수 십 가지의 신기한 자연석은 바닷물에 부닥쳤으나 오직 예술품으로 다듬어질 뿐이었다. (다음에 계속)
<필자 주: 이글은 1979년 4월, 대만 방문 후에 써 놓은 기행문을 재구성한 것이다. 대만에서 중요시하는 민간외교의 실상은 물론 시사성(時事性)을 비교하기 위해 옛날 사진을 곁들여서 소개하고 싶은 마음에서이다.
박종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