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포동 성당과 혼배성사(婚配聖事) (1)
구포동 성당과 혼배성사(婚配聖事) (1)
  • 시사안성
  • 승인 2018.12.10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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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권의 사진에 담긴 이야기 - 24
애인기념 사진/ 결혼하기 1년 전인 1965년 11월 어느 날 데이트 중 안성읍 창전동에 있는 사진관에 가서 찍은 사진이다. 아내가 보관하고 있는 사진을 보면 애인기념 사진이라고 메모가 되어있다
애인기념 사진/ 결혼하기 1년 전인 1965년 11월 어느 날 데이트 중 안성읍 창전동에 있는 사진관에 가서 찍은 사진이다. 아내가 보관하고 있는 사진을 보면 애인기념 사진이라고 메모가 되어있다

가톨릭 신자가 서로 결혼하려면 혼배성사(지금의 혼인성사)를 받아야 한다. 혼배성사는 두 사람의 결합을 축복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두 사람은 자유로운 마음으로 혼인할 것을 고백하고 일생동안 서로 사랑과 존경과 신의를 지키고 하느님께서 주실 자녀를 사랑으로 받아들이며, 예수그리스도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자녀를 가르치겠다고 서약하는 전례의식이다. 혼배성사는 가톨릭 미사전례 안에서 성가대의 축하 속에서 이루어진다.

필자가 지금의 아내인 마리아와의 만남과 약혼 그리고 혼배성사는 모두 안성 구포동 성당과 인연이 깊다.

사담기에서 여러 번 거론 했지만 필자는 태어나서 세례성사를 받은 장소를 비롯해서 미사성제에서의 복사(服事)생활, 성장,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의 꿈을 모두 키운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사제의 길을 희망하여 신학교로 갈 것인가 혼인으로 이어져서 평범한 인생의 길을 걸을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던 곳도 바로 구포동 성당이었다. 당시 3대 독자의 신분으로서는 신학교에 추천할 수 없다는 판정을 이곳에서 받았기 때문에 혼인에 관한 이야기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필자가 1964년 봄에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전에 있을 때, 교장신부를 겸하고 있던 강 방그라시오 주임신부의 권유로 안법중고등학교 강사로 첫 출발을 하도록 교직의 길을 열어 준 곳도 이곳이었다.

약혼반지 끼워 줌/ 1966년 8월 수원 신풍동에 있는 어느 중국음식점에서 가진 약혼식에서 신랑이 약혼자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고 있다. 약혼식은 수원 처가에서 준비하였다
약혼반지 끼워 줌/ 1966년 8월 수원 신풍동에 있는 어느 중국음식점에서 가진 약혼식에서 신랑이 약혼자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고 있다. 약혼식은 수원 처가에서 준비하였다

당시 스물다섯 살 된 청년을 이끌고 가톨릭 학교인 전라남도 광주 살레시오 고등학교를 알아보기 위해 호남선도 타보게 만들었고 대전 성모고등학교 정교사 직을 문의하기 위하여 경부선 차표를 끊어준 분도 구포동 성당 엘리사벳 수녀님이었다.

이러한 때에 즈음하여 공교롭게도 아내 될 마리아와 만나서 사귀게 되는 과정과 결과적으로 약혼, 혼배성사를 받을 수 있게 해 준 원동력이 된 것도 당시 미양 갈전리 성당 한 스테파노 주임신부님과 구포동 성당의 보좌신부 장 갈리스도 신부님의 소개 때문이었다고 말 할 수 있겠다.

마리아의 본당(신자의 교적이 있는 성당) 수원 북수동 성당 보좌신부로 있던 한 신부님이 안성 갈전리 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했을 때 북수동 성당 주일학교 교사들과 서로 왕래가 있던 때였기 때문이다. 구포동 성당에서 중매했다고 하면 이상할지 모르겠지만 구포동 성당에서 인연이 된 것 만큼은 틀림없는 이야기가 되겠다.

필자가 스물여섯 살 되던 해인 1965년 초가을, 학교 강사로 있으면서 성당에서 교적 작성 등의 일을 돕고 있을 무렵, 오늘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주일미사를 마치고 사제 집무실에 붙어 있는 성당 사무실에 먼저 나와서 유리창을 통하여 성당 입구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우리 본당에서 처음 보는 젊은 여성이 거침없이 사무실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미사를 마치고 나온 장 신부님은 그 여성이 수원 북수동 성당에서 교리 교사로 있던 마리아 자매라고 하면서 웃음 띤 얼굴로 소개해 주었다. 장 신부님은 갈전리 한 신부님으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는 터였다.

목걸이 증정 모습/ 약혼식에서 신랑이 약혼자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고 있다
목걸이 증정 모습/ 약혼식에서 신랑이 약혼자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고 있다

처음 본 여성을 가까이서 보니 첫 인상이 너무 좋았고 훤칠한 키에 버버리 코트를 걸친 모습과 세련된 말투는 더욱 마음을 이끌게 하였다.

그 후 우리는 자주 만나게 되었다. 자기는 서울 국제우체국에서 근무하는 당고모의 권유로 체신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1년 전에 안성우체국으로 첫 발령을 받았노라고 이야기 해 주었다. 그 후 읍내에 나가 창전동에 있는 미화장에서 같이 식사도 하고, 책을 빌려주기도 하였다. 빌려준 책을 다 읽어 보았느냐고 하면서 하숙집도 방문하게 되었다.

한 여성과의 만남이 그리 대단하냐고 반문이 있을 수 있겠지만 당시 가톨릭 혼인제도가 신자끼리만 결혼이 가능한 내혼(內婚)제도 형식의 종교혼으로 규정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 개인으로서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많은 가톨릭 신자 젊은이들이 혼인하고 싶어도 신자 아닌 비신자와의 혼배성사는 당시 많은 제약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둘은 만남을 계속하면서 그녀의 나이가 스물세 살이며 6남매중의 첫째 딸이라는 사실과 부모님은 물론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모시고 사는 대가족이라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서울에서 재동주유소를 경영하고 있었는데, 화재가 나서 많은 재산을 잃었다는 아픔까지도 털어 놓게 되었다.

이 쪽에서는 환갑을 앞둔 노부모를 모시고 사는 스물다섯 살 3대독자라는 말과 조그맣게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기 때문에 집안 형편은 그리 넉넉하지 못하다는 집안 이야기도 은근히 밝히기도 하였다.

신랑 측 가족/ 약혼식에 참석하고 있는 신랑 측 부모님과 가족 모습이다
신랑 측 가족/ 약혼식에 참석하고 있는 신랑 측 부모님과 가족 모습이다

그러나 할아버지 대부터 천주교를 믿는 구교우 집이라는 이야기에서 독실한 천주교 신자 가정이라는 믿음을 주었고, 그 쪽 역시 가톨릭 신자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졸업과 동시에 성가대와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만난 지 불과 몇 달 되지 않았지만 우리 둘은 초스피드로 마음을 열고 있다는 느낌을 서로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하느님의 안배가 있으셨는지 모르겠지만, 둘은 마음이 맞아 사진관에 들러 애인기념(?) 사진도 찍을 수 있었다.

필자는 어느 날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다. 부모님이 연로하시고 외아들이기 때문에 결혼을 서둘러야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말문을 열었다. 그랬더니 자기는 생각해보지도 않았으며 무엇보다 스물세 살 나이에 갓 직장을 나왔기 때문에 전혀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솔직하게 들려주었다.

신부 측 가족/ 신부 측 부모님과 가족 모습이다
신부 측 가족/ 신부 측 부모님과 가족 모습이다

어찌 되었든, 사는 집을 보여 줄 겸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게 하였다. 수원 여자 친구 집도 방문하고 인사를 드리게 되었다. 그 쪽 부모님은 안색이 영 좋지 않아보였다. 직장 잡아 외지로 보냈더니 1년도 안되어서 무슨 큰일을 저질렀는지 남자를 데리고 와서 인사를 시키니 기가 막히다는 반응이었다. 저녁을 얻어먹고 우리 두 사람은 해질 무렵에 같이 안성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며칠 지난 주말에 서울 사는 당고모(전직 뉴욕시청 공무원/미국 뉴욕거주)가 만나고 싶다는 말을 전해 왔다. 필자는 건강진단을 미리 떼어가지고 같이 수원으로 올라갔다. 루즈를 빌려달라고 해서 볼에 살짝 문질러 바르기도 하였다. 몸이 마른데다가 본래 얼굴에 핏기가 없었기 때문에 혹시 폐가 약한 청년으로 의심 받기 싫어서이다.

얼마 후에 좋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90이신 할아버지가 순홍(淳泓)이가 골랐으면 믿음직스러우니 냉수를 떠 놓더라도 결혼을 허락하라는 분부가 있었다고 한다. 그 이듬해인 1966년 여름에 약혼식은 여자 측에서 준비하고 결혼식은 가을에 신랑 측 성당에서 하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다.

신랑 인사말씀/ 약혼식을 치러주신 부모님들께 감사의 인사와 함께 앞으로 잘 살겠다는 약속을 드리고 있다
신랑 인사말씀/ 약혼식을 치러주신 부모님들께 감사의 인사와 함께 앞으로 잘 살겠다는 약속을 드리고 있다

신자가 혼배성사를 받으려면 몇 개월 전에 교회법이 요구하는 혼인 전 교리교육을 필수적으로 받아야 한다. 신앙교육에서 주입될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은총의 의미, 크리스천 결혼의 책임에 대한 지식과 아울러 혼인 전례의 예식에 의식적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한 준비가 필수적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혼배 지침서가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교회에서는 약혼자들을 위한 가나 혼인 강좌와 자연적인 가족계획 교육을 필수적으로 받도록 되어 있었다. 필자 역시 천주교 수원교구청에 가서 혼인 전 교육을 받게 되었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에서 발표한 혼인교리교육 지침에 따라 받은 교육에서 제1부 첫째 시간에서는 혼인의 특성(단일성, 불가해소성)을 비롯한 혼인교리’, 둘째 시간에는 혼인 전에 지켜야 할 절차와 행복한 가정의 모습 등 혼인과 사목과목에 대하여 아주 엄격한 내용의 교육을 받았다.

혼인 전에 지켜야 할 절차로는 교회에서 실시하는 혼인 강좌에 반드시 참가하고 그 수료증을 혼인하게 될 본당신부에게 제출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의치 않을 때에는 교회 단체에서 실시하는 약혼자들을 위한 M.E 프로그램이나 혼인 강좌, 미혼자들을 위한 행복한 가정 운동 프로그램, 약혼자 또는 미혼자들을 위한 피정(避靜) 중 택일하여 받으면 된다.

약혼식 장면/ 약혼식에 참석하고 있는 양가 부모님과 가족, 신랑 신부의 친구들이 참석하고 있다
약혼식 장면/ 약혼식에 참석하고 있는 양가 부모님과 가족, 신랑 신부의 친구들이 참석하고 있다

혼인 교리교육 제2부에서는 건전한 가족계획에 대하여 한국 주교단 사목교서를 바탕으로 매우 엄격한 내용의 성교육을 받았다. 특히 교회가 허락하는 자연법적 산아조절의 원칙에 대하여 엄격한 교육 받았는데 당시 필자가 교육 받았을 때 구체적인 용어로 표현된 사례와 내용을 추려서 여기에 그대로 옮겨보겠다.

루프를 사용하는 것은 피임 방법이 아니라 잉태된 태아를 자궁 속에서 살지 못하게 하는 행위이므로 살인행위이다. 콘돔을 쓰는 것과 질 외에 사정하는 것은 부부행위 그 자체를 훼손시키는 행위이다. 불임 수술이나 피임약은 부부행위의 자연적인 결과를 미리 막아버리는 것이므로 교회법 위반이다. 만약 자녀를 낳지 말아야 할 타당한 사유가 있을 때에 배란주기법’(빌링스법)에 따라 한동안 금욕 생활을 하는 것은 하느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다. 수태치 못하는 기간에 부부행위를 하는 것은 죄가 아니며, 잉태될 수 있는 기간에 성행위를 안 하는 것도 죄는 아니다.”(혼인교육 교재 82~83p)

이와 같이 하는 것은 자연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연을 지키는 것이고, 하느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고 그 법을 지키기 위해서 그만큼 욕정을 억제하므로 하느님의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1986년 춘계 주교회의 발표문 발췌)

(Sexuality)은 인격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로서 자신을 드러내며, 타인과 친교를 나누고 사랑을 주고받는 양식의 하나이다. 특히 자녀 출산을 지향하는 성행위는 혼인한 부부가 육체를 통하여 사랑의 친교를 나누는 가장 완벽한 표현이다.”(교황청 가톨릭교육성, 인간적 사랑에 관한 교육지침, 4-5)

약혼식 뒤풀이/ 약혼식이 끝난 후 수원시 화서동에 있는 서호 공원에 가서 신랑 신부의 친구들과 함께 뒤풀이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약혼식 뒤풀이/ 약혼식이 끝난 후 수원시 화서동에 있는 서호 공원에 가서 신랑 신부의 친구들과 함께 뒤풀이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가톨릭 생명운동 지침에서 보듯 교회는 성행위가 혼인 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죽을 때까지 서로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부부 사랑의 표현과 자녀 출산의 목적으로만 허용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혼인 전 교육시간에 수강하고 있는 예비부부들에게 큰 관심을 일으키는 문제는 혼인하기 전에 성행위를 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의 문제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강사는 이 질문에 대하여 혼인하기 전에 성행위를 하거나 성욕 때문에 혼인을 한다면 이는 하느님의 계획에 어긋나는 것이다. 성은 단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성 전체를 포함하는 것이다. 두 사람이 은밀한 생각과 감정을 서로 남김없이 나누는 수단이므로 온 인격을 수반하는 것이다.”라는 답변과 설명을 내 놓았다.

 

우리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게 되어 결혼을 준비하는 기쁜 마음으로 혼인 전 교리 교육에 임했는데 성 문제에 대한 엄격한 교회법 강의를 듣고는, 실제로 결혼생활에서 이러한 규정들을 모두 지킬 수 있을는지 걱정을 안고 돌아오게 되었다. 특히 서로를 위해서 희생을 함으로써 서로에 대한 사랑도 나아질 것이며, 특히 남편이 부인의 의사를 잘 받아들여서 협조하지 않으면 성공을 바랄 수 없다는 말에 커다란 부담을 안게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52년 전 19668월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양가 합의하에 약혼식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결혼하게 될 때 약혼식은 신부 측에서 준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수원 신풍동에 있는 어느 중국식당에서 양가 부모님과 가족 그리고 예비 신랑 신부의 가까운 친구들만 초청한 가운데 조촐하게 치르게 되었다.

약혼식 기념사진/ 약혼식을 기념하여 서호 방조제 앞에서 찍은 기념 사진이다
약혼식 기념사진/ 약혼식을 기념하여 서호 방조제 앞에서 찍은 기념 사진이다

 

그래도 간단한 격식은 갖추어야 한다면서 황O열 친구가 사회를 보면서 양가 가족소개, 신랑신부 약력 소개, 간단한 예물교환과 약혼 서약 순으로 진행되었다. 신랑 측에서 정성들여 준비한 예물은 평범한 보석이 박힌 알반지와 금목걸이였다.

신부 측에서는 금반지와 시계를 준비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약혼 서약을 할 때 성경을 가지고 갔었더라면 그 위에 손을 얹고 서약을 해야 하겠지만 그대로 이루어지지는 못하였다.

식사를 마친 다음에는 신랑 신부와 친구들 끼리 수원 근교에 있는 서호(西湖)에 가서 사진도 찍고 축하의 시간도 가졌다.

1966년 그해 가을에는 신랑 측 본당(本堂)인 안성 구포동 성당에서 혼배성사를 갖기로 하였다.(다음호에 계속)

 

박종권(교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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