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 권력서열2위 정무총감은 왜 양성사람들을 만났을까? - 매일신보 1911년 10월8일, 10일, 29일 기사
조선총독부 권력서열2위 정무총감은 왜 양성사람들을 만났을까? - 매일신보 1911년 10월8일, 10일, 29일 기사
  • 봉원학 기자
  • 승인 2018.07.08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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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1910년~1945년) 안성관련 신문읽기 – 11
매일신보 1911년 10월8일3면3단
매일신보 1911년 10월8일3면3단

매일신보 191110833- 광고

본 객주(客主)가 창설 수년에 고객에 후의를 몽하야 익익흥왕하오니 감사무지오며 시의를 응하와 미상객주를 겸설하오니 미곡에 유의하시는 첨언은 본 객주에 위탁하시면 매매간 불구다소하고 신속수응하게삽

안성시장 211호 수륙물산객주 오은영, 김성오

 

수륙물산객주 오은영과 김성오가 고객의 후의덕분에 발전하여 이번에 미상객주를 추가로 설치해 영엄하게 되었으니 많이 이용해 달라는 내용의 상업광고다.

똑 같은 광고가 11113면에 다시 게재된다. 앞에서 보험관련 광고 내용에서도 언급했지만 상업도시안성을 엿 볼 수 있는 자료다.

객주는 상인의 물건을 위탁받아 팔아주거나 매매를 주선하며, 위탁자를 위한 여숙·금융·창고 또는 운송 등 여러 가지 부수 기능을 담당한 중간상인을 말한다.

안성에 이와 같은 객주가 몇 명이나 되었고 그 종류는 어느 정도 되었는지 연구한 자료를 아직 접한 적이 없다.

다만 앞으로 보듯이 일제 강점기 신문기사에는 안성의 상인과 관련된 기사들이 자주 등장하므로 이들 기사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도 대략적인 짐작은 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더불어서 상업도시안성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도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장시”, 시장을 중심으로 한 연구는 조금 있었지만, 기자가 아는 한 최근에는 이마저도 뜸한 것 같아 아쉬움이 많다.

객주 오은영과 김성오에 대해 다른 기사를 찾아보니 오은영에 대해서는 다른 기사에서 이름을 볼 수 없지만 김성오는 한자표기는 다르지만 김성오(金聖吾)라는 인물이 1920년과 1921년 신문기사에 당시 야학회와 안성공보교 증축하는데 기증한 사람 중 한명으로 이름이 나온다. 동일인물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매일신보 1911년 10월10일 2면6단
매일신보 1911년 10월10일 2면6단

매일신보 1911101026京畿管內農形

양평, 여주, 죽산 등 9군의 정황을 시찰한 경기도 참여관 유혁노(柳赫魯)씨 일행의 언을 거즉 교육정도는 점차 발전의 희망이 유고 본년 농작물은 작년에 비하면 2할이상의 수확을 견함에 지하리라더라

 

유혁노에 대해서는 앞 선 연재에서 그 친일행적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어쨌든 1911924일 기사에 등장한 유혁노의 시찰이유가 이 기사를 통해 좀 더 명확해 진다. 교육 및 농업과 관련된 시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매일신보 1911년 10월 29일 2면 5단
매일신보 1911년 10월 29일 2면 5단

 

매일신보 1911102925總監 觀光團 引見

산현(山縣) 정무총감은 재작 이십칠일에 양성의 군참사 급 면장등의 일행을 총독부 회의실로 인견하고 각종의 간독한 훈시가 유하얏다더라.

 

정무총감은 당시 조선총독에 이은 권력 서열 2위의 요직중 요직이라 할 수 있다. 정무총감의 동정을 전하는 단신이지만 권력의 정점에 있는 인물이 양성에서 온 관광단을 만났다는 기사다.

100년이 지난 2018년 현재도 안성사람들이 국무총리를 만나려면 왠만한 이유와 인연 없이는 엄두조차 내기 힘들다.

그렇기에 양성에서 간 관광단의 면면이 궁금하고, 정무총감이 만나 준 배경이 궁금하기만 하다.

현재 가지고 있는 자료나 정보로는 앞에서 살펴본 정영택 군수의 사임으로 상징되는 양성의 민심이반을 다독이기 위한 것 아니었나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해 볼 수 있다.

또 하나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한일합방 당시 총리대신으로 있었던 이완용과 양성과의 인연이 작용한 것 아닌가 추측할 수 있다.

본지에 연재되고 있는 오환일 교수의 해주오씨 정무공파 이야기에서 자세히 이야기되겠지만 당시 이완용의 누나가 양성면으로 시집와 있었기 때문이다.

매일신보 1911년 10월 29일 2면 6단
매일신보 1911년 10월 29일 2면 6단

매일신보 1911102926- 京畿道路改修狀況

경기도청에셔 본년8,9월부터 착수한 연천토산간, 안성가도(安城街道), 홍천양평간의 각 도로개수공사는 11,12 양월간에 차제준공할터이라는대 목하 부역인수는 수만명에 지하얏다더라

 

기사에 등장하는 안성가도(安城街道)가 현재의 어느 도로를 말하는지 불확실하다.

다만 안성기략”(1925)1924년말 현재의 안성의 교통을 이야기하는 항목에 안성가도가 등장한다. 안성기략에 등장하는 안성가도는 주요 경유지가 원곡, 읍내, 일죽면으로 되어 있어 현재의 38번 국도노선의 원형으로 생각된다.

매일신보 19111029일 기사에 등장하는 안성가도도 안성기략에 등장하는 안성가도와 동일한 도로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러한 도로 개설과 관련된 자료는 일제강점기의 또 다른 중요한 자료인 관보경기도보등에 게재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은데, 기자는 아직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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