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라시의 안성
버라시의 안성
  • 시사안성
  • 승인 2021.04.21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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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교의 안성살이 20
소외지역 찾아가는 외국인
소외지역 찾아가는 외국인 상담 운영-경기도 외국인 인권지원센터

1992년 안성농업전문대(현 한경대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안성을 떠나 방황하다가 다시 온 것이 94년인가 95년일 것이다. 서울 황학동 벼룩시장에서 구입한 장교용 야전침대와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정착한 곳이 사곡동이다. 동남아파트를 지나 성베드로의 집과 서울우유 건물 맞은편 동네였다. 살게 된 집에 들어와 보니 폐가인 것을 알았다. 누구 소유인지는 모르겠고 안성에서 편하게 알고 지냈던 형님 두 명이 고쳐서 사용하던 폐가였는데 건넛방 하나를 내주신 것이었다. 전기와 물, 화장실이 없고 방안에 허름한 책상의 촛불 하나, 야전침대 위 장미 그림으로 여백조차 보이지 않았던 붉은 밍크담요 그리고 책상 옆 바로 밑에 휴지통으로 썼던 뚜껑없는 작은 항아리 하나가 초창기 안성 살림살이였다.

 

공장급구 직원모집전단지를 보고 찾아간 미양공단 내 대웅정밀이라는 정밀주조회사 생산직으로 취직되었다. 사곡동에서 미양공단으로 출퇴근은 자전거로 하였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장 구내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하였다. 전기, ,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는 공장이 엄밀히 말하면 내 집이었다. 잠만 사곡동에서 해결했으니 말이다. 공장에는 기숙사가 있었고 외국인 노동자도 함께 지냈다. 외국인들은 대부분 불법체류자였고 2~3명이 모여 조직적으로 임금협상하여 팀 전체가 취업하는 방법으로 직장을 구했다. 아마 외국인 혼자 구직활동을 하는 것보다 수월했을 것이다.

 

함께 일한 외국인들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잘 어울렸고 일도 열심히 했었다. 처음에 육체노동에 익숙하지 않았던 난 정말 힘들었고 퇴근무렵이나 가끔 야근할 때는 입에서 단내가 났고 이완된 근육은 되돌아오지 않았던 것 같았다. 몇 달 지나니 근육들이 적응하게 되었고 적응한 만큼 공장 내 시야가 넓어졌다. 다른 라인 사람들이 무슨 일 하는지, 어떻게 여기 입사하게 되었는지, 젊은 남녀 썸 타는 장면도 볼 수 있게 되었다.

 

버라시는 방글라데시 사람이었다. 한국에 온 지 5년 정도 된 것 같았고 총각인 20대 청년이었다. 나보다 하나 아니면 두 살 어린 것으로 기억한다. 미남형이면서 친근하게 한국말을 잘했다. 내게 형님이라고 했으며 2시간마다 한 번 쉬는 15분 동안에 장난치며 지냈다. 한국말은 억양까지 닮아 블라인드치고 서로 대화하면 외국인이라고 느껴지질 않을 정도였다. 배우는 속도도 빠르고 손도 야무져서 공장직원들에게 칭찬을 많이 받는 친구였다. 이후에 방글라데시대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번은 넌지시 여기서 배운 기술로 방글라데시 귀국하여 사업을 하면 잘할 거라고 이야기해줬더니 방글라데시에는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한국에서 살고 싶다고 이곳 생활에 만족한다고 했다. 아시아에서도 제일 가난한 나라 축에 속하는 방글라데시는 사회기반시설이 잘 갖춰있지 않아 불편하다고 했다. 타국의 설움보다 고국의 불편함을 이기지 못하는 젊은 방글라데시 청년이었던 것이다. 애국심은 덜해 보여도 함께 사는 재주는 남달랐던 친구로 기억된다.

 

내가 다닌 회사는 3D업종이었다. 뜨거운 쇳물을 붓는 등 위험한 요소가 많은 공장이어서 점점 내국인 근무자는 줄어들고 외국인 노동자들이 점점 증가하였다. 회사 형편도 점점 어려워져 사내복지도 축소되는 양상이었다. 버라시는 정해진 월급을 받았지만 다른 회사에서 지금보다 좀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 갈 수 있는 분위기이었다. 외국인들 중 나이 많은 파키스탄아저씨 빼고는 그랬다. 그들은 안성이든 오산이든 화성이든 원하면 떠나고 들어오는 뜨내기들이다. 함께 있는 동안에는 잘 지내지만 일한 것보다 급여 수준이 낮다고 판단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회사형편도 어려워지는 분위기에서 외국인노동자들이 들락날락하면서 그들에 대한 험담이 많아졌다. 내국인도 사정은 같았지만 바라보는 눈길은 달랐다.

 

젊었을 때 일본에 가서 살다 온 친구가 한 말이 기억난다.

지나가는 외국인들이 있으면 한 번 더 보게 된다고 했다. 일본에서 알게 모르게 겪게 되는 설움과 차별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그 느낌을 모른다고 했다. 같은 언어 쓰는 나라에서도 타향살이는 만만치 않은데 물도 다르고 말도 다른 나라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작은 배려에도 눈물이 날 것이다. 너무 감성적으로 흐르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맞다.

그들도 기분을 나쁘게 하거나 호의를 사기 처먹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인간 개개인의 인성으로 봐야지 내국인 외국인, 남한 북한으로 구별해서는 안 된다. 사람 사는 것은 지구 어디에서나 비슷하다. 부자나라건 교육시스템이 잘되었건 민족성이 다르든 어디에나 사기꾼, 소매치기는 비슷한 비율로 있고 불친절한 사람은 널렸다. 그것은 빈부의 격차나 교육 여부를 떠나 그 나라 정부의 치안 정도와 함께 사는 공동체 지향성에 의해 높낮이가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안성도 이제는 이들에게 예산 지원할 정도의 여유가 있다. 지원해 줄 근거도 있다. 그들은 안성 인구의 약 10% 정도를 차지한다고 보고 있다. 안성 산업구조의 제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3D산업과 농축산업 대부분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그들이 안성에 거주하는 동안만이라도 차별받지 않고, 당당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공적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최소한의 도리는 해야 할 것이다. 너무 늦었다.

 

정인교 전 안성천살리기시민모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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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완 2021-04-21 08:44:45
외국인비중이 높아지는 현상은 피할 수 없는 시대의 과정일 것입니다. 문면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나는 산업화와 도시화의 과정이 서구에 이어 우리에게 나타난 것이거 아마도 동남아도 우리의 뒤를 따르게 되겠지요.
차별의식은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강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국가차원의 정책도 필요하지만 지역차원에서 할 일도 많은데 안성시는 매우 소극적이다. 인권과 환경 그리고 민주를 지향하겠다는 시장의 태도를 이해하기 어렵고 너무 선거와 정치공학적인 모습이 안타깝고 답답하고, 시민단체의 정치편향은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