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피는 마을
들꽃피는 마을
  • 시사안성
  • 승인 2018.07.05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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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교의 안성살이-8

 

안성에서 정착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안성에 제대로 정착을 했다는 느낌은 6년 전 들꽃피는마을로 들어오고 부터인 것 같다.

 

부모님에게 기대지 않고 살기로 작정하고 안성으로 왔다. 자취하면서 알바하며 굶기도 하였고, 사곡동 허물어지는 폐가에 살면서 미양공단에 공장에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안성에 사는 친구의 도움 덕으로 어려운 20대 후반의 안성생활을 간신히 때웠다. ‘때웠다라는 표현이 정말 맞는 것 같다.

 

안성에 다시 돌아온 것은 서른 중반 2001년 가을이었다. 퇴직금 700만원도 안 되는 돈을 통장에 넣고 배낭 하나 짊어지고 내려왔다. 안성의 청각장애인들이 한창 안성 농아인협회를 만들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사회복지기관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들을 도와주기로 약속하고 내려온 것이었다. 정부의 지원을 못 받을 때라 청각장애인들이 모아준 회비로 월급을 받을 때여서 한 달에 20만원만 받았다. 자취방 월세내면 5만원밖에 남지 않았던 것 같았다.

 

여하튼 우여곡절을 겪으며 이후 평택대 사회복지학과에 편입하게 되었고, 재주도 좋게 안사람을 만났으며 공중화장실밖에 없는 성남동 월세방에서 우리는 시작했었다. 그 후 안사람 덕으로 옥천동 2천만원짜리 전세방으로 옮기게 되었고 5년이 지나 함박눈 내리는 겨울 어느 날 아들이 태어났다. 병원을 퇴원한 안사람은 곰팡이가 피는 전세방에서는 도저히 아들을 키우기 힘들다고 데모를 하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내 생애 첫 대출이라는 대출금을 받아 대우경남아파트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내게 집이라는 공간은 밥 먹고 잠만 자는 공간이었지만 가정을 꾸리다 보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막연히 내가 없어지면 가족들은 누구를 의지하며 살게 될까?’ 마음 맞는 좋은 이웃들과 함께 살면 서로 보살피며 이런 걱정이 해결될 것 같았다. 그런 와중에 함께 사는 생태공동체 모임에 나가게 되었다. 몇 년 전부터 한 달에 한 번 지인들이 모여 공동체마을을 꿈꾸는 모임이었는데 중간에 내가 참여하게 된 것이다.

 

공동체마을을 일군 전 세계 사람들의 책을 함께 읽고 자신이 꿈꾸는 마을을 이야기하는 몽상 가들의 모임이었다. 꿈만 꿀 때는 정말 재미있었다. 여기 저기 안성의 여러 곳을 돌아보며 우리가 집짓고 살 마을 부지를 이모저모 살펴보고 정말 함께 사는 마을사람이 된 양 흥분 된 적도 많았다. 하지만 실제로, 현실로 다가오는 꿈은 우리들에게 아픔으로 다가왔다. 현실은 달랐다. 땅을 사고 마을을 설계하기까지 구성원들은 계속 의견충돌을 일으켰고 일부는 탈퇴를 하였다. 구성원 절반 이상이 나가버릴 때는 정말 이게 될까라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그래도 새롭게 들어오는 분들이 있어서 꿈은 계속 이어져 왔다. 이 모임을 이끌어 온지 거의 10년 만에, 지금 공동체마을 구성원 10가구가 만난 지 4년 만에 들꽃 피는 마을이 탄생했다. 돈은 마련하지 못하고 꿈만 꾼 나도 달리는 기차 맨 끝에 간신히 매달리듯 입주하게 되었다.

 

우리 마을에 대해 궁금한 분들이 제일 많이 물어보는 것이 있다.

이 집은 얼마에 분양 받았냐?’ ‘이 집은 얼마냐?’

 

그럴 때마다 해주고 싶은 말이 이 글에 녹아있다.

그러나 잘 내뱉지는 않는다.

마을 사람 대부분 그런 것 같다.

정인교(안성천살리기 시민모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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