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여름 숯골절에서 보낸 이야기
1962년 여름 숯골절에서 보낸 이야기
  • 시사안성
  • 승인 2018.07.0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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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권의 사진에 담긴 이야기 - 11
1962년 여름에 공부하러 왔던 안성시 서운면 양촌리(숯골)에 있는 ‘숯골절’ 앞에 서있는 필자(안성맞춤박물관 기증사진)/배경은 대웅전이란 간판이 없는 대웅전 건물 정면이다
1962년 여름에 공부하러 왔던 안성시 서운면 양촌리(숯골)에 있는 ‘숯골절’ 앞에 서있는 필자(안성맞춤박물관 기증사진)/배경은 대웅전이란 간판이 없는 대웅전 건물 정면이다

계곡 물이 흘러 여름에는 더 시원한 안성시 서운면 양촌 마을 아늑한 골짜기(숯골)에 있는 숯골절이라는 이름의 자그마한 절이 있었다. 지금부터 56년 전엔 오고가는 사람이 별로 없는 아늑하고 적막한 곳이라서 불심이 가득한 사람이나 조용히 공부하러 온 사람이 머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언제부터인지 지금은 태고종 약사사(안성시 서운면 동양촌길172)라고 불리는 아담한 사찰로 변해 있었다.

이곳을 다녀간 여행객들은 한결같이 깔끔히 정돈된 사찰 입구, 정성껏 쌓아 올린 돌탑들, 고목이 울창한 약사사의 뜰, 여름이면 더욱 차가운 계곡 물이 흘러내리고, 봄이면 온갖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하여, 한가로움을 즐기기 위해 온 사람들이 차 마시러 다시 오고 싶은 절간이라는 수식어를 쏟아낸다.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는 듯한 어느 여행객이 20074월초파일에 다녀간 후에 egloos라는 블로그에 올린 글을 보면, “날로 아름다워지고, 예뻐지는 약사사를 보며 얼마나 많은 분들이 정성과 성의를 다해 가꾼 도량인지, 한 눈에 달라진 모습이 보인다라는 찬사로 표현하고 있다. “개울 따라 자라고 있는 대나무들, 계곡 위 난간 다리 건너서면 대웅전이 보이고, 요사채로 잇는 길목엔 예쁜 항아리와 예쁜 꽃 화분이 나란히 놓여있고, 수석과 다구, 목부작으로 만든 풍란들로 절간 부엌을 아담하게 장식하고 있다.”

약사사는 나지막한 산으로 포근히 감싸여 있다. 바로 아름다운 서운산(瑞雲山, 547.7m)이다. 안성의 지형은 험준한 차령산맥의 영향으로 높지는 않으나 수려한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안성의 노래에 있는 비봉과 서운의 높은 산성에~~’라는 가사에 나오는 서운산이다.

서운산 등산코스 중 인근 청룡사에서 정상까지 2.9km(80분소요)되는 등산로와 석남사에서 정상까지 2.3km(60분소요)의 두 코스는 등산 마니아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같은 서운면에 있는 약사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청룡사(靑龍寺/안성시 서운면 청룡리)는 고려 원종 때 명본국사가 1265년에 건립하였고(대웅전/보물 제 824) 역시 서운산 줄기에 소재한 석남사(石南寺/안성시 금광면 상중리)는 고려 초기 680년에 고승 석선이 창건(영산전/보물 제 823)한 유명한 고 사찰이다.

안성 석남사에서는 얼마 전 623, 2회 서운산 산사음악회와 소원 풍등 날리기 행사가 열린바 있다. 안성의 자랑인 서운산은 경기 남부 지방의 등산코스로 유명하고 최근에 서운산 자연휴양림이 준공되어 산림생태 관찰관, 산림문화 휴양관, 숲속의 집, 캠핑센터, 잔디 광장 등의 시설을 완비하여 휴양객들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

안성에는 청룡사, 석남사와 함께 또 하나의 고 사찰인 고대 삼국시대 선덕여왕 5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칠장사(七長寺)가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칠현산에 있다(보물 제 488호 혜소국사비가 있음).

약사사로 이어지는 서운산 둘레길 중 농민의 숨결을 간직한 산중 옛길로 알려진 질마재~양촌호수~약사사~행랑재로 이어지는 순수한 자연 경관을 배경으로 한 3.0km 트래킹 구간 역시 많이들 선호하는 둘레길이다. 아직은 잘 다듬어진 구간은 아니지만 산골 농삿길을 체험할 수 있고 진짜 산행하는 묘미를 느낄 수 있는 트래킹 코스이다. 20159. 12일 제1회 서운산 둘레길 걷기대회를 개최한 이후 안성에서는 어린이들을 동반한 많은 참가자들에게 인기가 대단히 높다.

병풍이 둘러져 있는 숯골절 요사채 문간방에서 같이 공부하러 내려온 같은 과 친구와 함께 책 씨름을 하고 있다 (동 박물관 기증사진)
병풍이 둘러져 있는 숯골절 요사채 문간방에서 같이 공부하러 내려온 같은 과 친구와 함께 책 씨름을 하고 있다 (동 박물관 기증사진)

필자는 대학교 3학년 때인 19627월 여름방학을 택해서 대학 친구와 함께 고향으로 내려와서 서운면 동양촌 골짜기에 있는 숯골절에서 한 달 여 보낸바 있다. 졸업을 1년 앞두고 있는데다 무엇보다도 큰 시험을 앞두고 있어서 내심 걱정도 되고 마음도 다잡을 겸 조용한 곳을 택해서 책을 보기 위해서였다.

숯골절은 원래 홍씨 집안에서 세운 절이었다고 한다. 남양 홍씨 집성촌이 모여 살고 있는 동양촌은 옛날부터 양반이 많은 마을답게 선비들이 마을에 있는 서당에 모여 공부를 많이 하던 곳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서운초등학교(43) 동창회가 올린 다음카페에 실린 글에는 양반 많고, 부자 많고, 공무원이 많았던 서운면 양촌리라고 마을을 소개하고 있다.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종중 땅이 많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숯골이라고 불리는 이곳 골짜기에 절을 지었던 모양이다. 지금도 절 땅 소유주는 남양 홍씨로 되어 있다고 한다.

본 지 시사안성발행인이 모 언론사에 재직 당시에 우리동네 우리마을취재차 20161월경 방문했던 일이 있었는데 양촌리 주민들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처음에는 김씨 성을 가진 스님(2016년 기준 살았으면 120)이 숯골절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 스님이 절을 처분하고 떠났으며, 그 후 박OO이라는 태고종스님이 와서 약사사라는 이름으로 절을 운영했고 2016년 당시에는 박 모 스님의 제자가 절을 운영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주민들로부터 들었다고 전한다.

필자는 1960년에 대학을 들어간 후 1, 2년 동안은 공부다운 공부를 하지 못했다. 아니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겨우 논 다섯 마지기에서 나오는 농사를 가지고는 세 식구 끼니거리는 되지만 그 당시에는 꽤 비싼 학비와 하숙비를 댈 수가 없어서 가정교사라는 이름으로 남의 집을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1학년 때는 안성 숭인동에 사시는 영세 대부님의 친척이 서울 서소문동에서 철물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 집 아들인 중학생 아이를 가르치게 되면서 겨우 숙식을 해결할 수가 있게 되었다.

2학년에 올라가서는 모교 서무과장을 지내신 은사님(OO증권 회사 대표)이 부르시어 역시 중학생인 아들을 가르치게 되어 집을 옮기게 되었다.

집이 마포구 대흥동이어서 주일날이면 가까이에 있는 서강대학교 성당 으로 가서 미사참례를 하였다. 1960년에 개교된 서강대학교는 세계적인 수도 단체인 예수회 한국지부 창시자이신 박고영(안성 구포동 출신) 교수신부님이 계시기 때문에 더욱 편리하게 드나들 수 있었다. 서강대 학생은 아니지만 박 신부님의 배려로 가톨릭 학생회 주일학교 활동에 참여하면서 친교의 범위를 차차 넓히는 계기도 되었다.

3학년이 되자 고대 가톨릭학생회 박희봉(명동성당) 지도신부님의 배려로 오지리(Austria)가톨릭부인회 장학생으로 선발되어서야 학비 걱정을 덜 수 있게 되었다. 또 학교 근처로 옮겨 하숙집을 얻어 공부할 수도 있게 되었다.

다만 집에서 고생하시는 부모님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려야 하는 데 하숙비까지 부담을 더 드리게 된 것이 무엇보다도 죄송스러운 입장이었다. 아버지 어머니는 틈틈이 궂은일까지 하시며 생활비를 마련하시고 작은 농사는 거두는 대로 몽땅 팔아서 자식 생활비로 보내주신다는 점을 알고 있는 외아들로서는 더욱 죄송하기 짝이 없었다.

하숙방 구하러 첫 번째로 갔던 안암동 개운사(開運寺) 옆 동네 하숙촌, 쪽방이나 다름없는 자그마한 하숙집 하나에 방이 10여개는 더 넘어 보이는 분위기에서는 도저히 공부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 다시 학교 정문 건너편 돈암동으로 옮기게 되었다.

좀 비싸지만 방 두어 개를 내 놓고 하숙을 치는 상냥한 아주머니가 너무 따뜻하게 대해주시고, 마침 전에 있던 하숙생이 나가게 되어 아주 널찍한 방을 얻어서 편히 지낼 수 있었다.

그 후에 건너 방이 비게 되어서 절친 동급생 친구를 불러들여서 서로 의지를 삼아 함께 학교도서관 자유 열람실에 고정자리를 잡아 놓고 밤늦게까지 공부할 수 있었다

여름방학이 되자 그 친구는 자신의 고향인 공주 동학사(東鶴寺)로 내려가 공부하겠다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어서 공부할 곳을 정해서 들어간 곳이 바로 고향에 있는 숯골절이다. 마침 같은 과 또 다른 친구 하나도 안성으로 같이 내려가고 싶다고 해서 서로 토론도 하면서 공부도 할 겸 부모님이 계신 고향집으로 함께 내려오게 되었다.

숯골절 계곡 골짜기에 서있는 고목나무 아래에 서있는 절밥 친구들(동 박물관 기증사진)/필자와 한 방에서 공부하는 친구와 의대생, 놀러 온 고등학교 동창생이 함께 찍었다
숯골절 계곡 골짜기에 서있는 고목나무 아래에 서있는 절밥 친구들(동 박물관 기증사진)/필자와 한 방에서 공부하는 친구와 의대생, 놀러 온 고등학교 동창생이 함께 찍었다

숯골절에 들어가자마자 고등학교 동창 부친 김모 주지스님(대처승) 배려로 요사채에서 가장 시원한 방으로 안내되어 책 보따리를 풀게 되었다.

저녁을 먹으려고 마루로 나가 보니 서울서 공부하러 내려온 또 다른 청년이 보이지 않는가? Y대 의대 본과에 재학 중이라는 윤 모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역시 의사시험 국가고시를 준비하기 위해서 내려왔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법학도들은 학교 시험을 뛰어 넘는 목표로 하는 시험과목이 워낙 광범위하고 내용이 어려워서 깊이 파고드는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에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6법 전서를 몽땅 외울 수도 안 외울 수도 없는 입장이 수험생들이 안고 있는 심한 압박감이다.

1950년부터 1963년까지는 고등고시 사법과가 실시되고 있었다. 1963년부터 시행된 사법시험 합격자는 합격자 수를 보장하지 않고 평균 60점이상을 획득해야 제 2차 시험에 합격할 수 있고 당시 사법부 실정에 따라 한 자리 수의 합격자만을 내는 경우도 있었고 그 대신 합격자 전원이 판사 검사로 임용될 수 있었다.

당시 1차 시험 과목은 헌법, 민법, 형법, 경제학개론, 문화사, 국사의 6개 과목이었고, 2차 시험 과목은 국민윤리, 헌법, 행정법, 상법, 민법, 민사소송법, 형법, 형사소송법 8개 과목이었다.

헌법과 형법은 좀 쉬운 편이지만 어려운 과목인 민법 한과목만 하더라도 총칙 편은 그냥 지나가지만 물권법, 채권법, 친족법, 상속법 분야로 광범위하게 구성되어 있어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괴롭히는 과목이다. 민법의 5개 분야 중 물권(物權)편만 예를 들어보면 점유권, 소유권, 지상권, 지역권, 전세권, 유치권, 질권, 저당권 등으로 구성 되어 있기 때문에 변명 같지만 난해한 공부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필자는 2차 시험은 경험해 보지도 못했지만 민사소송, 형사소송의 판례에 맞추어 'OOO에 대하여 논 하여라'는 단문의 실로 오묘한 논설에 응답하듯 답안지를 쓴다는 것은 지극히 힘든 문제였다.

숯골절 주지스님(대처승)과 공부하러 들어온 학생들과 양촌리에 사는 고등학교 동창이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동 박물관 기증사진)
숯골절 주지스님(대처승)과 공부하러 들어온 학생들과 양촌리에 사는 고등학교 동창이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동 박물관 기증사진)

숯골절에서 공부하는 동안 매일 점심시간이 되면 다 같이 모여서 절에서 주는 보리밥을 고추장에 쓱쓱 비벼서 맛있게 먹고 나무가 우거진 숲 속으로 우선 들어가는 것이 하루의 일과이다.

신선한 공기도 마시면서 더위를 잊으려고 계곡에서 흐르는 깨끗한 물을 손바닥으로 떠서 마시기도하고 머리를 감기도 하였다.

계곡물에 들어가 가재도 잡고 발로 물장구도 치며 옷을 적시기도 하였다.

산에 고목이 많아서 제일 잘 생긴 나무를 골라 멋진 지팡이 하나씩 만들어가지고 도사 흉내도 내보았다.

절간에 있는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하루 종일 쪼그려 책만 보고 있으려니 서로 힘들기도 해서 더러는 모여서 자신의 인생관, 종교관, 애정관에 대하여 진지하게 이야기도 서로 나누었다.

강의실에서 공부하던 중 재미있었던 에피소드를 의대생과 경쟁이라도 하듯이 털어 놓곤 하면서 한 달 넘게 지내며 퍽 친한 친구가 되었다.

의대생은 해부학 실험에서 있었던 엽기적인 이야기도 털어 놓았다. 기증받은 시체를 조각내면서 공부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서 어쩔 수 없었을 거라고 이해는 가지만 남성, 여성의 몸을 샅샅이 파헤치면서 교수님 몰래 장난치느라고 시신 일부를 잘라 O학생 손가방에 넣어주어 골려주었다는 이야기에선 재미 보다 섬뜩함을 느껴서 웃을 수가 없었다.

우리 방에서는 행형학(行刑學)시간에 배운 사형집행 방법에 대하여 외국 사례, 우리나라 교수형 사례로부터 시작하여 사형장 인부들이 캄캄한 밤중에 교수대 바로 밑에 있는 지하실에서 시체를 수습하던 중 겪었던 무서운 사례 등을 실감나게 이야기 해주기도 하였다.

형법시간에 배운 정조에 관한 범죄(요즘의 성범죄)의 종류에 따라 강간과 준강간의 차이점, 강제추행과 준강제추행의 다른 점을 사례를 들어가며 자세하게 설명해 주기도하였다. 또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죄, 혼인빙자 간음죄, 미성년자 간음 및 추행죄에 대한 판례를 이어가느라고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

사실 우리 방에서는 법전에 있는 내용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재미있는 이야기라기보다 공부한 내용에 대한 피드백을 스스로 하고 있었던 셈이다.

숯골절의 밤은 깊어가지만 새벽에 일찍 깨어보니 머리는 무겁다. 절에 들어온 지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서 한 달이 넘어간다. 늙어 가시는 부모님 생각이 머리에 떠올라 눈을 지그시 감는다.

고시공부를 늦게 시작하여 3, 4학년 재학 중 2년 안에 목표를 달성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를 시도하는 것과 같았다. 재학 중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목표했던 정상에는 오르지 못했다.

졸업을 앞두고 필자는 학생회 지도신부님과 면담하여 오지리(墺地利) 가톨릭부인회 장학금 수여조건인 대학원 진학을 안 하겠다는 통지서를 보낸다. 그 후 서울시 을지로 6가에 있던 교육위원회를 찾아가서 대학 성적증명서를 제출하고 사회과 중등교사 자격증을 신청 하였다.

1964년 2월 25일 안암동 고려대학교 중앙광장에서 거행된 졸업식에 축하하러 올라온 부모님과 누님, 조카와 친구들이 함께 찍은 사진(개인소장)/특히 고등학교 때 3총사는 군대에서 특별휴가를 얻어 참석하였다. 옆에 학사 모 쓴 절친 김용태 법학박사(대구대 명예교수)
1964년 2월 25일 안암동 고려대학교 중앙광장에서 거행된 졸업식에 축하하러 올라온 부모님과 누님, 조카와 친구들이 함께 찍은 사진(개인소장)/특히 고등학교 때 3총사는 군대에서 특별휴가를 얻어 참석하였다. 옆에 학사 모 쓴 절친 김용태 법학박사(대구대 명예교수)

 

운동장에서 졸업식을 마치고 잠간 올려다 본 하늘은 더더욱 높아보였다. 그러나 무척 푸르고 맑아 보였다. 감회가 깊었고 그만큼 아쉬운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아들의 자랑스러운 대학 졸업식에 차멀미를 이겨내고 올라오셨던 부모님의 은혜에 한없이 고마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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