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8대 도회지 안성”이 주는 의미 - 매일신보 1911년 5월 13일기사
“전국 8대 도회지 안성”이 주는 의미 - 매일신보 1911년 5월 13일기사
  • 봉원학 기자
  • 승인 2018.06.10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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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1910년~1945년) 안성관련 신문읽기 – 7

191151325- 인구 오천이상의 도회지

431231일 현재의 조선 전도(全道)중에 인구 오천 이상을 유한 도회지는 좌와 여()하더라

開城 : 전체 33,733, 내지인 1,396

咸興 : 전체 18,944, 내지인 1,214

光州 : 전체 12,256 내지인 1,314

北靑 : 전체 8,169, 내지인 216

水原 : 전체 7,326, 내지인 634

公州 : 전체 7,164, 내지인 1,163

義州 : 전체 6,419, 내지인 424

安城 : 전체 6,127, 내지인 163

江華 : 전체 5,705, 내지인 56

宣川 : 전체 5,419, 내지인 208

江界 : 전체 5,357, 내지인 75

濟州 : 전체 5,048, 내지인 232

 

이번에는 하나의 기사를 가지고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그만큼 아주 흥미롭고 안성의 입장에서는 의미있는 기사이고 주목해야 할 기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안성이 조선시대 전국 3대시장 이었다는 이야기는 안성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이야기다. 이 이야기의 근거는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잡지 개벽” 19245월호(47)에 나와 있는 안성시장이라면 이야말로 중부 조선에서 유명한 시장이다. 바로 전 조선 3대시장(대구, 전주, 안성)1이다는 기사다.

안성시청의 홍원의 학예연구사는 지난 2009년 안성맞춤 박물관 기획전시 자료집에 실린 안성장의 발전과 쇠퇴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비롯해 안성장의 발달과 관련된 다양한 문헌 자료를 제시한 바 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안성장의 발달은 안성의 발달, 안성의 위상과 안성사람들의 자부심의 근거였다.

매일신보 1911년 5월 13일 2면 5단

그런데 이와 같은 안성의 위상과 관련해 주목할 기사가 1911513일자 기사라고 생각된다.

이 기사에 의하면 1910(명치 43) 12월 말 안성 도회지의 인구가 6,127명으로 조선전체에서도 8번째로 큰 도회지다.

여기서 말하는 도회지(都會地)는 사전적 의미가 사람이 많이 살고 상공업이 발달한 번잡한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그 지역 전체의 인구가 아니라 그 지역에서도 특정한 구역내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안성의 경우에는 당시 장(,市場)이 섰던 장기리(場基里) 일대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1910년의 장기리는 다소 복잡한 행정구역 변천을 거치는데 현재의 낙원동, 옥천동, 창전동, 성남동, 신흥동 지역이다.

1910년 안성의 인구 자료는 없지만 안성기략(1925)에는 1924년의 당시 읍내면의 인구가 기록되어 있다. 1924년의 읍내면은 현재의 안성1.2.3동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그 원형이 되는 지역으로 당시 인구는 8,978명이었다.

1910년과는 14년의 차이가 나지만 비교해 보는데는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 기사에 의하면 안성 읍내 전체 인구가 9,000명가량 되었을 때 장기리의 인구가 약 2/36,000명 이상되었다는 것이다.

그 규모는 도회지라는 기준으로 보았을 때 경기도가 아닌 조선전체에서 8번째로 큰 규모라는 것이다.

당시 안성읍내의 위상, 안성 시장의 규모, 상징성이 어떤 것인지 상상할 수 있다.

1929년 '안성읍내'지도
1929년 '안성읍내'지도

기자는 일제 강점기 신문기사를 검색을 시작하면서 흥미롭고 놀라우면서 조금은 의아했던 것은 안성과 관련된 기사가 생각외로 많다는 것이었는데 이 기사를 접하면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말, 혹은 일제 강점기 초까지도 적어도 전국 8대도시중 하나라는 안성의 위상을 이해할 때 우리는 안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의병운동이나 독립운동, 3.1운동이 그토록 거세고 격렬하게 일어났던 이유를 보다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일본인들이 상대적으로 많았던 이유도 이해할 수 있으며 이후 수많은 기사에 등장하는 안성의 쇠퇴에 대한 안성사람들의 안타까움과 과거의 영화를 되찾기 위한 노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현재에도 적용되는 이야기다.

흔히 이야기하는 그렇지만 젊은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안성이 옛날에는 대단한 동네였다안성사람들의 자부심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아마도 지금 60대이상, 혹은 70대 이상의 안성사람들은 그러한 안성의 위상을 실제로 경험했거나 혹은 직접 경험한 사람들로부터 관련된 이야기를 하나 이상 들었을 것이다.

나아가 기자가 생각할 때 더욱 중요한 것은 당시 안성의 전국 8대도시였던 위상은 농업도시 안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상공업 도시 안성이었기 때문에 생긴 위상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안성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농업도시 안성이다.

상공업도시 안성이 어떻게 농업도시 안성으로 바뀐 걸까?

안성의 미래는? 안성의 비전은?” 같은 여러 상념을 떠오르게 하는 기사다.

아마 이러한 상념의 상당부분도 안성의 과거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는데서부터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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