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안성지역 언론 - 박종권의 사담기
60년대 안성지역 언론 - 박종권의 사담기
  • 시사안성
  • 승인 2020.02.24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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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권의 사진에 담긴 이야기 43
안성군 언론인 협회/ 1967년 5월 경 안성읍 동본동 소재 안성읍사무소 회의실에서 열린 안성군 언론인 협회 총회를 마치고 관내 언론인들이 모여서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다
안성군 언론인 협회/ 1967년 5월 경 안성읍 동본동 소재 안성읍사무소 회의실에서 열린 안성군 언론인 협회 총회를 마치고 관내 언론인들이 모여서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다

19604.19 이후의 우리나라 언론은 한 때 상당히 자유분방 하였다. 그것은 민주혁명으로 들어선 장면 민주당 정권이 언론에 대하여 자유방임적인 기본정책을 채택하였기 때문이다.

무너진 자유당 치하에서, 당시 언론에 가했던 공개적인 탄압정책에 대한 반작용과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데 공헌이 큰 언론이라는 국민적 여망이 높았던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한 언론정책이기도 하였다.

이승만의 하야와 함께 들어선 허정 과도정부에서는 당시 신문 등 정당 등 등록에 관한 법률을 공포한다. 이 법에 의하여 그동안 허가제로 언론통제가 심했던 신문, 잡지 등의 발행이 비교적 자유로운 등록제로 바뀌게 된다.

이를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는 신문을 비롯한 각종 잡지 등의 정기 간행물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왔다. 이러한 혼란기에 등장한 신문은 대부분 준비 없이 이름만 내건 실속 없는 신문이었다. 이른바 급조된 ‘4.19 기자라는 사이비 기자가 속출하여 국민에게 지탄을 받기에 이르렀다.

신문의 날 자축 연회/ 1966년 4월 7일 안성읍 영동에 위치한 안성군청 회의실에서 가진 신문의 날 기념식 후에 가진 축하연 모습이다. 단상 오른쪽에 한복을 입고 앉아있는 사람이 원로 언론인 김태영 선생이다(동 박물관 기증 사진)
신문의 날 자축 연회/ 1966년 4월 7일 안성읍 영동에 위치한 안성군청 회의실에서 가진 신문의 날 기념식 후에 가진 축하연 모습이다. 단상 오른쪽에 한복을 입고 앉아있는 사람이 원로 언론인 김태영 선생이다(동 박물관 기증 사진)

그러나 바로 1년 뒤인 19615. 16쿠데타로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 신문 잡지 방송은 직격탄을 맞게 된다. 소위 국가재건 최고회의 포고령으로 4. 19 이후 난립했던 언론기관의 일제정비가 단행되었기 때문이다.

국가재건 최고회의가 새로운 언론정책을 발표한 이후부터 일간지의 신규 등록을 엄격히 억제하는 방침을 선언하고 몇 차례에 걸쳐서 언론사 통폐합을 단행하였다.

월간 신문과 방송통권 20호 기념특집으로 나온 논문인 한국언론’(정진석, 2014)에 의하면, ‘1962년에 공포된 새로운 언론정책은 기업적 측면에서는 언론을 건전하게 육성하고 편집 제작 측면에서는 언론의 책임을 강조하는 양면정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오히려 기존 신문사들의 경영을 간접적으로 크게 도와주는 결과를 가져오게도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1920년에 창간되어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늦게 창간되었으나 이들 대형 신문사와 맞먹는 한국일보(1954) 등 일간지 경영주들은 힘을 모아, 언론기업의 카르텔이나 다름없는 한국신문 발행인 협회를 만들어 운영하게 되었다.

3. 1절 기념행사/ 1966년 3월 1일 경기도에서 주최한 3. 1절 기념행사에 안성지역 언론인들이 참가하여 유지처럼 기관장들과 함께 시위행렬 선두에서 행진하고 있는 모습이다(동 박물관 기증 사진)
3. 1절 기념행사/ 1966년 3월 1일 경기도에서 주최한 3. 1절 기념행사에 안성지역 언론인들이 참가하여 유지처럼 기관장들과 함께 시위행렬 선두에서 행진하고 있는 모습이다(동 박물관 기증 사진)

마침 경제성장과 함께 국민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인구가 증가하게 되자 신문구독의 가구가 급속도로 증가되었다. 사람들은 보다 많은 지식과 정보를 얻기 위해 집집마다 대중매체인 신문에 의존하는 경향이 생겼다.

언론의 경영주들은 수지타산을 맞추어야 한다는 상업적 풍조가 생겨, 독립적인 편집 계통 종사자들의 지위를 상대적으로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시키기도 하였다. 특히 장기영사장의 한국일보는 우리나라 신문사 최초로 경비행기를 이용하여 전국 방방곡곡에 신문을 속달로 배달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된다.

이러한 영향으로 각 신문사들은 대량생산으로 전국 지방마다 ‘00신문 총국’, ‘00신문 지국을 앞 다투어 설치하게 된다. 물론 서울 등 대도시에서도 곳곳마다 신문 보급소나 판매대를 설치하여 언론 본연의 모습인 보급이라는 상태에서 벗어나 판매라는 상업시대로 전환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무렵, 1962년부터는 새로운 신문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종합 일간지 한국일보가 발행하는 일간 스포츠’(1963), 그리고 단간제 실시 이후에 창간된 일요신문’(1962)현대경제일보’(1964)가 나왔다. 또한 1965년에는 신아일보중앙일보두 종합일간지가 창간되기도 하였다.

삼성재벌을 배경으로 창간된 중앙일보의 출현으로 우리나라 언론기업은 경영의 독점화와 병행해서 경영에 대한 정부의 특혜라는 양면정책 형태로 변하게 되었다.

안성군 동계 체육대회/ 1966년 12월 안성군 체육회(회장 박용복)가  안성천에 설치한 빙상장에서 개최한 스케이트 경주대회를 마치고 체육회 인사들과 군내 언론인들이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다(동 박물관 기증)
안성군 동계 체육대회/ 1966년 12월 안성군 체육회(회장 박용복)가 안성천에 설치한 빙상장에서 개최한 스케이트 경주대회를 마치고 체육회 인사들과 군내 언론인들이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다(동 박물관 기증)

필자가 기고문에서 60년대 언론에 대하여 거론하는 이유는 한 때 신문사 지방 주재기자로 일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담기에서 밝힌바 있듯이 대학 재학 시에는 대학신문에 논단(고대신문 345호 제4, 1963. 6.1)을 기고하기도 하였고 안성학우들과 어울려 비운(飛雲)이라는 쪽지 신문도 만들면서 신문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대학을 갓 졸업한 해인 1964년에는 고향에 내려와 모교에 강사로 첫 취직이 되어 교직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학교사정으로 잠시 그만 두게 되는 일이 생겼다. 그 때, 지역에서 신문지국을 운영하고 있던 인사의 권유로 1966년부터 한 1년여에 걸쳐 현대경제일보 일요신문 안성지국 주재기자로 추천이 되어 언론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안성에는 각 신문사 안성지국이 설치되어 지국장과 주재기자들이 구분 없이 지역 언론인(기자)으로 활발하게 취재활동을 하고 있었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한국일보 박은성 기자와 동아일보 백두인 기자의 취재 활동은 중앙지 기자와 맞먹는 실력으로 안성 소식을 전하여 중앙지 사회면과 지방판에 기사가 자주 게재되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안성지방의 신문지국은 1920년대부터 100여년에 걸쳐서 상당히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김태영 원저 안성문화금석관’(안상정 편역, 안성문화, 2011, pp.122~123 참조)에 의하면 꽤 오래전부터 지국장과 기자들이 안성지방에서 활동했었다는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그 내용을 여기에 옮겨 보겠다.

 

<‘안성에서도 매일신보의 지국이 있었다. 기미 3. 1독립운동이 일어난 뒤로 왜정은 과거의 무단정치를 버리고 이른바 문화정치를 시행하면서 민간인에게도 신문발간을 허용하게 되었다. 이때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기미년 다음해인 192041일에 발간되었다.’>

<‘안성에서는 1920424일에 동아일보 안성분국(수원지국 소관)이 생기어 분국장에 김중묵, 총무에 윤지병이 임명되고 필자(김태영)는 기자가 되었다.’>

<‘필자(김태영)192141일에 분국장이 되었고 총무는 이응오, 이봉대 등이었고 기자는 한주덕 이었다. 다시 1922529일에는 지국으로 승격되어 필자(김태영)가 지국장이 되어 1940810일 동아일보가 폐간될 때까지 만 205개월간 지국장을 계속하였다.’>

<‘조선일보는 1920년 창간 당시 반기관지 색채로 있다가 순 민간지로 변경되었으며 안성에도 지국이 생겼다. 또한 시대일보가 나와서 중외일보, 조선중앙일보 등으로 개호하여 안성에도 지국을 두었다.’>

<‘8. 15해방 직후에는 최영수라는 청년이 당시 안성 주둔 미군의 허락으로 안성주보를 발간하였고 뒤이어 좌익지로 이일신 명의의 안성인민보가 주간으로 발간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 한성일보 등 여러 신문이 중앙에서 발간되고 이들이 안성에 지국을 설치하여 활발히 독자를 흡수함에 따라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주재기자들의 담소 모습/ 1967년 5월 경 군내 행사에 안성 주재기자들이 참가하고 나서 장소 미상의 건물 잔디밭에 한가로이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다(동 박물관 기증사진)
주재기자들의 담소 모습/ 1967년 5월 경 군내 행사에 안성 주재기자들이 참가하고 나서 장소 미상의 건물 잔디밭에 한가로이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다(동 박물관 기증사진)

필자가 활동할 때인 1960년대 중반에 안성지역에 있었던 각 신문사 지국을 보면 다음과 같다. 경향신문(지국장 이기영, 기자 박응원), 동아일보(지국장 이기중, 기자 백두인), 한국일보(기자 박은성), 현대경제일보/일요신문(지국장 천수일, 기자 박종권) 안성지국이 있었다.

그리고 조선일보(지국장 김무한), 신아일보(기자 윤승태), 서울신문(지국장 김용기), 경기매일신문(지국장 진기만, 기자 김명윤), 중앙일보(지국장 성창근) 대한일보(지국장 허장회), 일간스포츠신문 안성지국도 운영되고 있었다.

또한 1964년 한국일보가 창간한 주간한국이 처음으로 등장하여 성공하자 이에 자극된 각 신문사는 그 후 주간중앙, 주간조선, 주간경향, 주간여성, 선데이서울 등 주간지 붐이 일어나 지방에까지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미풍양속을 해치는 저속한 내용과 만화 때문에 독자가 오히려 늘어나는 등 윤리적인 문제까지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추세에 지국장들은 본연의 업무인 신문보급 확장에 주로 전념하였으며 독자가 점점 늘어나는 바람에 경쟁을 부추기기도 하였다. 주재기자들은 취재활동을 열심히 하였다. 그러나 일부 기자들은 지국장의 신문 보급 확장에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월구독료는 신문 한 부에 130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필자 결혼식 피로연/ 1966년 11월 19일 안성성당에서 결혼식을 마치고 나서 옥천동 자택에서 가진 결혼잔치에서 필자 부부에게 축하를 하고 있는 박은성(한국), 백두인(동아), 박응원(경향)기자의 정겨운 모습이다(동 박물관 기증 사진)
필자 결혼식 피로연/ 1966년 11월 19일 안성성당에서 결혼식을 마치고 나서 옥천동 자택에서 가진 결혼잔치에서 필자 부부에게 축하를 하고 있는 박은성(한국), 백두인(동아), 박응원(경향)기자의 정겨운 모습이다(동 박물관 기증 사진)

당시 신문사 본사에서는 경영 적자를 내지 않기 위해서인지 신문 수량을 매월 늘려서 지국에 내려 보내는 일도 있었다. 뒤 늦게 창간한 **일보는 구독자를 늘리기 위해 무가지를 돌리기도 하였고 독자를 많이 늘리려는 목적으로 경품을 내려 보내기도 하였다.

안성지역의 언론인들은 언제부터인지 안성언론인협회를 구성하여 단체로 활동하고 있었다. 매년 47일 신문의 날이 오면 안성읍사무소(안성군 동본동) 회의실에서 기념식을 성대히 갖고 연회를 베풀기도 하였다.

이 때 내빈들로는 군수, 서장, 세무서장 등 기관장, 안성군체육회 등 사회단체장과 안성양조장 사장 등 크고 작은 자영업자들이 많이 와서 축하를 해 주었다. 당시 고문으로는 김태영 원로 언론인(안청학원 이사장)이 꼭 참석하여 격려해 주었다.

당시 안성 기자들의 일상적인 취재활동은 안성군청(윤석범 군수, 안성읍 영동, 1동사무소)에 매일 한 번 씩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언론을 담당하는 공보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보실(김용규 실장)은 군청에서 언론, 공보, 군정 계몽과 여론조사 및 정보 수집을 담당하는 행정기구이다.

결혼잔치에 참석한 지국장/ 필자에게 일요신문사 안성 주재기자로 일할 것을 권한 천수일 지국장에게 결혼잔치에서 술잔을 권하는 모습이다(동 박물관 기증 사진)
결혼잔치에 참석한 지국장/ 필자에게 일요신문사 안성 주재기자로 일할 것을 권한 천수일 지국장에게 결혼잔치에서 술잔을 권하는 모습이다(동 박물관 기증 사진)

이밖에 군청에는 일반 행정과 선거사무를 담당하는 내무과, 관내 학교를 관장하는 교육과(군 교육청 설치 전)도 있었다. 또 식량증산 운동을 벌이는 산업과와 전국적으로 펼쳐지는 새마을 운동을 관장하는 새마을과 등이 있어서 기자들이 원하는 보도자료 등이 많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기자들이 자주 들어가는 기관은 안성경찰서(김남순 서장, 안성읍 낙원동, 현 안성공원 옆)이다. 기자들은 보초 순경에게 기자증(보도증)을 보여주고 들어갔으나 얼굴이 알려진 다음부터는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 기자들은 제일먼저 수사과에 가서 간밤의 사건 사고는 어떤 것이 있었는지 알아보았다.

마침 안성에서는 모 사찰의 주지스님이 독살되는 사건이 일어나서 주민들이 불안해하고 있을 때였다. 기자들은 당시 발생한 살인사건에 대한 수사과정을 취재하여 여러 번 속보를 올리기도 하였고 범인을 검거하여 현장 검증하는 과정에서도 카메라를 들고 가서 직접 취재하기도 하였다.

어느 날 한 번은 저녁 늦은 시간에 갑자기 선배기자의 연락으로 5~6명의 기자들이 소집된 적이 있었다. 사유인즉 모 유명 병원에서 의사 잘못으로 숨진 어린아이의 시신을 밖에 방치하는 것도 모자라, 무지한 부모를 회유하여 매장하려 한다는 사실이 민원으로 급히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당시 취재 현장에 함께 있었던 필자는 불의와 부정을 용납하지 않고 파헤치려는 선배 기자들의 모습을 보고 많은 감명을 받았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려는 진정한 언론인의 모습을 현장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보수나 다름없는 처지에서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으로 활동하였던 선배 언론인들을 본 받고 싶은 마음이다.

주재기자들은 처우를 생각하지 않고 활동하였으며 어떤 사명감을 갖고 사회부조리를 파헤치는 일에 몰두하는, 일종의 청년 사회운동가처럼 보였다. 비록 지방이지만 지역사회에서 언론인으로 일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였다. 순진하게도 자기가 송고한 내용이 채택되어 안성주재 000기자라는 이름이 기사 끝에 달리는 것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필자가 속했던 신문사는 유명하지는 않았으나 주간지였기 때문에 한 주일 동안에 올린 기사가 가끔 사진까지 달려 주말에 3건에서 5건까지 보도되는 바람에 항상 신문 나오기를 무척 기다리곤 하였다. 그리고 신문이 도착하면 가지고 다니면서 친지들에게 나누어 주곤 하였던 생각이 난다.

신문사 퇴직 증명서/ 필자가 1966년 1월 1일자로 현대경제일보/일요신문사 안성지국 주재기자로 임용되어 활동하다가 퇴직한 뒤 발급받은 퇴직 증명서 사본이다. 1968년 3월 이후 재직하고 있던 고등학교에서 교사경력 산정과 호봉 책정에 필요해서 발급 받은 서류이다(개인소장)
신문사 퇴직 증명서/ 필자가 1966년 1월 1일자로 현대경제일보/일요신문사 안성지국 주재기자로 임용되어 활동하다가 퇴직한 뒤 발급받은 퇴직 증명서 사본이다. 1968년 3월 이후 재직하고 있던 고등학교에서 교사경력 산정과 호봉 책정에 필요해서 발급 받은 서류이다(개인소장)

지금 생각하면, 당시 경기도 소재 신문사가 하나밖에 없었던 언론 취약지인 군 단위까지 주재기자들을 두고, 그야 말로 방방곡곡 지방의 작은 소식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보도하려는 당시 언론사의 시스템이 다소 놀랍기도 하다.

필자는 신문사 주재기자 경력 인연으로 196781일자로 군청 공보실 공보요원으로 임용되어 주로 군정 계몽, 보도자료 수집 편찬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또한 방송요원으로 군내 스피카 행정망을 통하여 안성소식을 전하는 아나운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196831일자로 모교 정교사로 복직하여 근무하는 동안에도 학교 신문반 지도교사로 오랫동안 일하기도 하였다. 1980년 초 많은 예산을 들여 설치한 교내 TV방송국 개국 기념으로 실시한 군내 공개수업을 자원하여 ‘TV생방송 시범수업’(과목/정치경제, 학습주제/‘범죄와 형벌’) 첫 방송을 내보내기도 하였다.

필자는 취미 삼아 신문(잡지) 기고 활동을 자주 하였던 편이다. 시론(時論), 칼럼, 논단 기고 및 신문, 잡지 인터뷰 등 헤아려보니 30여 차례이다. 꼼꼼히 수집해서 만든 신문스크랩 모음 파일 4권에 보관하고 있는 관련 기사를 헤아려 보니 200여건에 이른다.

그리고 지역TV방송 토론회 패널과 평생교육 프로그램에 출연하였고 KBS-TV, EBS-TV, KTV에 천주교문화재 탐방 프로에서도 방송된 적이 있다. 최근에는 안성지역 유력 인터넷신문인 시사안성(대표 봉원학) ‘안성을 말한다코너에 2년간 연재되고 있는 박종권의 사담기’(사진에 담긴 이야기) 횟수도 44회에 걸쳐 게재되고 있다.

언론 인터뷰 기사/ 2003년 7월에 창간된 안성지역 A신문 창간특집호 집중인터뷰 란에 게재된 필자의 인터뷰 기사 사본이다(개인소장)
언론 인터뷰 기사/ 2003년 7월에 창간된 안성지역 A신문 창간특집호 집중인터뷰 란에 게재된 필자의 인터뷰 기사 사본이다(개인소장)

언론을 경험하면서 얻은 교훈은, 정보권을 벗어난 취약지대에서 사람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사회적 약자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언론이 외면, 침묵하거나 방치하게 된다면 사회적 약자의 권리가 침해당하는 것은 물론 이 땅에 사회정의는 이룩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언론과 기자는 공공의 이익을 지키는 감시자이다. 공공의 이익이란 사회 구성원 전체의 이익을 말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언론이 진실을 전하려 한다면 권력과 이익집단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현대 대중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론을 통해 세상의 소식을 듣게 된다. 그렇지만 우리는 뉴스를 접할 때 그 정보가 정의에 맞는지 먼저 판단해야 할 것이다. 특히 요즈음 SNS, 유튜브 등 여러 형태를 통해서 쏟아지는 정보들은 그것이 정확한 사실인지 어떤 입장에서 나온 내용인지 등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바로 혜안(慧眼)을 갖게 되는 것이며, 사람들이 정보의 홍수 속에서 솟아오를 수 있는 길이요 방법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어느덧 신문 방송 마니아가 되었다. 눈만 뜨면 습관처럼 핸드폰을 켜서 뉴스를 먼저 검색한다. 그리고 TV를 통하여 쏟아지는 방송뉴스, 대담이나 토론회 등을 빼놓지 않고 보게 된다.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정의롭고 현명하게 진리를 추구하는 지혜를 좋은 뉴스(Good News, 福音)를 통하여 얻게 되기를 소망하여 본다.

 

박종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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