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2월 안성맞춤박물관에서 발간한 기증유물전시회 ‘안성의 근.현대를 가다’ 책자에 소개된 기증자 프로필에 보면 “안성 우체국 사진은 기증자의 가족이 보관하고 있던 것이다”라고 소개되어 있다.
기획물 책자에서 “이번 전시회는 안성에서 오랫동안 살아오신 개인이나 종중과 집안의 자료를 담아, 일제강점기 시대에서 부터 60-7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안성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다”고 밝히고 있다.
1990년대 말부터 안성맞춤박물관 설립을 준비하였던 안성시 학예사 등 관계 공무원들은 시민들이 소장하고 있던 옛 사진이나 문서들과 민속자료들이 무심코 버려져 가고 있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자료 수집에 열정을 기울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필자는 2001년 2006년 두 차례에 걸쳐서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종교자료(고서적, 사진, 이콘 등)와 출생 이후 가지고 있던 개인생활 사진자료와 상장, 문서 등 약 400여점을 안성시에 기증하고 ‘기증문화재수납서’를 안성시로부터 받은 적이 있다.
기증자료는 안성맞춤박물관 기획물인 ‘근현대 안성인의 삶’(2003, 12)에 23점, ‘안성의 근현대를 가다’(2006, 12)에 28점, ‘안성사람의 일상의례’(2011, 12)에 10점이 소개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안성시지’ 8권(사진자료집, 2011, 12)에 4점이 실리기도 하였다.
안성우체국과의 인연은 필자의 가족이 결혼 전 1964년 1월 체신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첫 발령을 안성우체국으로 받았던 것을 시작으로 한다. 당시의 안성우체국 건물은 안성읍 서인동 313번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안성지방에 근대적인 우체국이 최초로 설립된 것은 1905년 6월 12일 ‘안성우체사’가 설립되면서 부터이다. 안성군지(1990, 7/필자, 행정편 편찬위원)에 따르면 그 이후 ‘안성우편소’(1910)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조선총독부 기구 개편에 따라 ‘특정안성우체국’(1943), ‘보통안성우편국’(1946)으로 개편되기도 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1950년에 체신부 직제개정에 의해 ‘안성우체국’으로 개정되었다. 우체국은 읍내면 동리(1905), 혹은 동본동(1939)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건물 사진 등은 확인하지 못하였고 1950년대의 서인동 소재 우체국 장소만 생각 날 뿐이다.
필자는 10살 때인가 할아버지 부고 전보를 치러 우체국에 들른 적이 있었다. 신청용지에 전할 말을 써 내야 하는데, 길게 썼더니 돈을 많이 내라고 해서 새로 쓴 일이 생각난다. 모르스 부호인지도 몰랐지만 “또돈 똔 또돈똔또...” 전보치는 소리가 매우 신기하기도 하였다.
초등학교~중학교 시절까지 가끔 지나 다녔던 서인동거리는 번화가였다고 기억된다. 지금의 성모병원 근처에 위치한 중앙약국 앞 ‘안성사거리’는 당시 안성군의 중심가였다.
당시엔 버스가 지나 다녔던 안성사거리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서인동, 인지동, 동본동, 낙원동 행정구역이 정해졌음을 알 수 있다. 사거리 +자로엔 사거리백화점, 식육점과 양조장, 복다방과 미화장, 문방구점이 있었고 바로 옆 안성읍사무소 건물과 건너편 안청학교도 있었다.
안성우체국 업무 직제는 1953년부터 1960년대 초 까지는 서무과와 통신과로 나뉘어져 있었다. 통신과는 우편, 환금, 보험, 집배, 교환 등 5개 업무를 담당하였다. 이때부터 보험업무와 환금업무를 담당하는 등 금융기관으로서의 성격도 지니게 되었다.
문제는 업무 폭주로 인하여 소수의 인원으로 구성된 직원들은 피곤 속에서 근무하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관내 공도, 양성, 일죽, 죽산 심지어는 장호원 까지 분임 관할국이 있었고 원곡과 서운면에는 별정 우체국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1964년엔 별정우체국으로 금광 우체국이 추가로 생겼고 이 후부터 삼죽, 보개, 미양, 대덕, 고삼면에도 별정우체국을 신설하여 업무가 분산되기도 하였다.
우체국 건물이 협소하고 시설 등이 낙후 되었지만 특히 부족한 집배원이 담당했던 우편물 수집과 배송업무 그리고 밤샘 업무가 필요한 전신업무와 폭주하는 전화 교환업무는 감당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렇지만 당시 김*배 국장의 친화력으로 인한 가족적인 분위기는 대단했다고 전해진다.
1968년 12월 31일엔 대천동 80번지에 우체국 새 청사를 마련하여 이전하게 되었고 드디어 1969년 2월 22일 성대한 준공식을 갖게 되었다. 필자와 가족은 1966년에 결혼, 출산으로 육아와 수유를 해야 하는 맞벌이 주부 입장에서 옥천동 신혼집에서 다소 가까운 곳으로의 이전은 기쁜 소식이었다.
1974년엔 인구증가로 폭주하는 전신 전화업무를 따로 관장할 전신전화분실이 신설되어 청사를 이전하게 되었다. 1983년 1월 1일자로 전신전화업무 공사(公社) 이관으로 전신전화국(지금의 KT)이 발족되어 안성시 봉남동에 건물을 마련하여 업무를 완전히 이관하게 되었다.
1950년대 전후해서 전화는 가정집에는 거의 없었고 관청이나 큰 상점에 있었다. 납작하고 옆에 핸들이 붙어있는 까만색의 자석식 전화기가 있던 시대가 있었다. 힘들여 핸들을 돌리면 교환이 나와 응답한다. 어디를 대 달라고 하여 연결이 되면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 질러 통화하곤 하였다.
1960년대 초에 다이얼이 달린 전화기로 교체되었지만 안성우체국엔 장비와 시설 부족으로 설치하지 못하고 그냥 손으로 돌리는 자석식 전화기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시외전화는 요금이 비싸서 잘 하지도 못하였고 요금 때문에 빨리 끝내야만 했던 시절이 있었다.
산업화로 전화수요가 폭발하였지만 회선부족으로 전화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려웠다. 가설하는데 일 년에 몇 대씩 배정되는 수로는 감당이 안 되니 전화 한 대 값이 몇 십 만원에서 몇 백 만원까지 나가게 되어 전화기 청약으로 횡재한 사람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1970년대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전화 수요는 투기로 이어져 심각한 사회문제로 까지 대두하게 되었다. 급기야 정부에서는 전기통신법을 개정하여 앞으로는 “가입 전화의 매매나 증여, 양도할 수 없으며 질권의 목적으로도 사용할 수 없다”라고 개정되기에 이르렀다.
이 때 법 개정 이전의 가입 전화 즉 양도가 가능한 전화와 개정 이후의 가입전화 즉 사용권만 인정되는 전화를 확연히 구분하기 위하여 전화 원부의 색을 전자는 백색, 후자는 청색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속칭 ‘백색전화’ ‘청색전화’라는 말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1980년대 들어서서 정부는 88올림픽을 대비해야 하는 관계로 백색전화 청색전화는 없어지고 드디어 광통신 시대가 와서 부족한 전화 회선을 획기적으로 해결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휴대폰 시대가 다가오기 시작한 것은 아마 모토롤라에서 나온 팔뚝만한 핸드폰이 나오면서 부터였다고 기억된다. 그것도 무선전화이기 때문에 당시 정보부의 심사를 거쳐야 허가를 얻을 수 있었다.
필자는 1990년 7월에 무선종사자 자격증(체신부장관)을 취득한 바 있다. HAM이라 하여 아마추어무선기사(3급전화급) 자격시험에 합격하여 HL2 LDQ 호출부호를 얻어 통신보안 교육을 필한 후 주소지에 안테나를 높이 세우고 무선국을 설치 운용하게 되었다.
C-150무선기(출력 2.5W)를 구입하여 동호인들과 함께 144MHZ~146MHZ 주파수대역에서 HAM 활동에 심취하기도 하였다. 공중파를 이용하는 무선전화이기도 하기 때문에 차량에 안테나를 설치하여 활용하기도 하였고 무전기를 자랑삼아 손에 들고 다니면서 동호인들과 정보도 교환하고 통화를 즐기기도 하였다.
이후 신형 핸드폰이 출현, 증가하면서부터 무전기의 유용성이 떨어져 HAM활동은 잠시 쉬고 있지만 5년마다 갱신과정을 거쳐 무선국(RADIO STATION) 허가증(과학기술정보통신부)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입장이다.
회고해 보면 무선전화 출현으로 핸들을 힘주어 돌리던 자석식 전화기, 손가락으로 번호를 돌리던 공전식 전화기는 이제 옛날이야기가 되었고 격세지감이 느껴질 뿐이다.
세상은 온통 ‘스마트 폰’ 열풍에 빠져들고 있다. 사람들이 새로운 세상을 탐험하고 익히느라 손가락을 과다 사용하게 되어 건초염이 생길 지경이다. 특히 청소년들의 시력도 점점 나빠지고 쉽게 정보를 얻는 바람에 힘든 일을 기피하게 되는 현상까지 생기게 되었다.
앞으로 지구 사람들이 온통 인공지능을 통하여 우주여행 하느라 기계손에 매달리게 된다면 ET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손가락이 길게 변형되고 말런지도 모르겠다.
박종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