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치밀한 일제의 지배정책 – 1910년 12월 안성관련 기사(2)
4. 치밀한 일제의 지배정책 – 1910년 12월 안성관련 기사(2)
  • 봉원학 기자
  • 승인 2018.05.20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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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1910년~1945년)안성관련 신문 읽기
매일신보 1910년 12월 16일 2면 6단
매일신보 1910년 12월 16일 2면 6단

1910121626-죽산 지보

경기도청에서는 관내 각 부윤 군수에게 훈령하고 각면 동리의 명칭을 조사 보고하라 하얏는데 죽산군에서는 하등 보고가 고무한 고로 작일 동 도청에서 촉훈을 발하고 지급 보래하라 하얏다더라.

1910122026-죽산의 면동 사보

경기도 죽산 군수 이윤영(李潤永)씨는 해도 장관의 훈령을 승하야 본 군내의 각면 동리의 명칭을 조사하야 작일 해 도청으로 보고하얏다더라

 

191012월의 기사에서 주목하고 싶고 현재의 관점에서 아쉬움을 주는 기사는 1216일과 20일자 기사다.

여기서 아쉬움은 기사 자체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라 기사에 등장하는 지명조사와 관련된 아쉬움이다.

19101216일 기사는 각 마을의 명칭 조사와 관련한 기사인데 죽산군에서는 아무런 보고가 없다는 내용인데, 나흘후인 1220일 기사에는 죽산군에서 각 마을 명칭을 조사하여 군청으로 보고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를 통해 당시 일제가 우리나라의 각 마을 이름을 조사했다는 사실과, 그 조사가 그리 치밀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죽산 전체의 마을이름을 조사하는데 2-3일밖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대목은 현재의 관점에서는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이 때의 조사결과가 1911년경 만들어진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시기적으로 보아 이 때(191012)의 마을 이름 조사 후에 또 다른 조사가 이루어졌다고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조선지지자료는 일제의 의도와 관계없이(일제는 지배의 편의성을 도모하기 위해 이 자료를 만들었을 것이다) 지금의 상황에서 보면 우리나라의 각 마을은 물론이고 산과 하천 등의 옛지명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다.(기자도 이 자료 덕을 톡톡히 보았다)

그래서 기왕이면 좀 더 주도면밀한 조사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는 것이다.

실제 조선지지자료를 보면 마을에 따라 그 내용이 편차가 심하다. 즉 어떤 마을은 상대적으로 자세하게 조사가 이루어진 반면 어떤 마을은 그 내용이 매우 부실하기 때문이다.

부실하게 조사된 마을의 경우 100년이 지난 현재의 상황에 까지 영향을 미처 지금 그 마을의 명칭유래에 대해 알고 싶을 때 부실하게 알 수 밖에 없게 만든다.

이를 단지 일제강점기의 문제로 볼 것이 아니라, 행정과 관련된 문제로도 볼 수 있다. 행정의 안일함과 무능함이라는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이 기사를 앞에서 소개한 죽산의 역사와 관련해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즉 의병운동, 농민운동, 동학운동이 활발했던 죽산지역에서 주민들이 일제의 통치정책에 협조하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주민들이 일제의 통치에 협조하지 않음으로 인해 제대로 조사를 할 수 밖에 없었고 그 결과 부실한 조사결과가 남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매일신보 1910년 12월 11일 2면 5단
매일신보 1910년 12월 11일 2면 5단

 

1910121125-양성 수 사직

경기도 양성군수 정영택(鄭永澤)씨는 하등 층절이 유한지 부지하거니와 사직 청원서를 본도청으로 제정하얏다더라

매일신보 1910년 12월 15일 2면 5단
매일신보 1910년 12월 15일 2면 5단

 

1910121525-정수의 사직 불허

양성군수 정영택(鄭永澤)씨가 사직서를 제출하얏다함은 기보하얏거니와 갱문한즉 본도 장관 회원직우(檜垣直右)씨가 정씨를 대하야 사직지말고 환임 시무하라함으로써 정씨는 거 일요일에 환임하얏다더라.

매일신보 1910년 12월 15일 2면 5단
매일신보 1910년 12월 15일 2면 5단

1910122125-양성 수 인병 청유

양성군수 정영택씨가 신병이 잇셔 안성군으로 전왕 치료하겟스니 기일간 허유하라고 경기도청에 청원하얏다더라

 

앞서 191093일자와 98일자 기사를 소개하며 정영택 양성군수에 대한 내용을 일부 소개한 바 있다. 즉 양성군수 정영택이 부임하지 않고 있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101일자로 정영택을 양성군수로 또 다시 발령한다.

그런데 여기 1211일자 기사에서는 정영택 군수가 사직서를 제출했다는 기사고, 15일자 기사는 경기도장관(지금의 경기도지사)이 직접 사직서를 반려하고 복무할 것을 지시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그러나 1221일자 기사에서는 정영택이 신병을 치료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있다. 이쯤되면 정영택은 전혀 양성군수로 부임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 확실해진다.

일제의 입장에서는 아주 골치 아픈 일이 생긴 것이다. 거듭 생각하지만 대단한 용기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정영택 군수와 관련된 기사는 추후 기사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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