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환일의 해주오씨 정무공파 이야기 - 덕뫼에서 세거 500년
오환일의 해주오씨 정무공파 이야기 - 덕뫼에서 세거 500년
  • 시사안성
  • 승인 2018.04.18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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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1. 덕봉리 정착과 정무공파 형성

*편집자 주 : 오환일 교수의 해주오씨정무공파실기 - 덕뫼에서 세거 500, 해주오씨 정무공파 종중에서 지난 2017년 발간한 책의 내용을 해주오씨 정무공파 종중과 글의 저자인 오환일 교수의 허락을 받아 연재하는 것이다. 이에 연재에 앞서 책 발간 당시 실렸던 머리말의 일부를 게재해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참고로 이 글의 필자인 오환일 교수는 고려대학교에서 사학을 전공한 후 41년간 대학에서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현재는 유한대학교 명예교수이자 해주오씨 정무공파 종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연재를 흔쾌히 허락해 주신데 대해 이 지면을 통해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앞으로 이 글은 매주 수요일 독자들을 찾을 계획이며 오늘은 머리말과 함께 덕봉리 정착과 정무공파 형성에 대한 글을 게재한다.

 

필자 오환일 교수

머리말 

해주오씨 정무공파 실기는 정무공파 후손들의 활동상을 간략하게 기록한 역사책이다. 다만 역사라고 하면 종합적인 면을 기술해야 하는데 그렇지는 못하고 단지 활동상과 사실만을 기록한 것이란 의미에서 실기라고 하였다.

우리 해주오씨(海州吳氏)는 고려 성종 때 오인유(吳仁裕)공이 중국 북송에서 학사로 있다가 고려에 귀화(歸化)해 해주에 적()을 두고 검교군기감감(檢校軍器監監)으로 국사(國事)에 깊이 관여하였고, 후손들도 계속 벼슬하면서 해주지방에 살았다.

이들은 고려말 조선 초기에 일부가 용인 기흥지역으로, 1525(중종 20)이전에는 11세 통례공 오현경(吳賢卿)이 덕봉리로 이주하여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게 되었다.

때문에 입향조(入鄕祖)는 통례공 오현경(吳賢卿)이다. 이후 후손들은 계속 벼슬길에 진출하였고, 증손(曾孫) 정무공 오정방(吳定邦)이 무과 장원으로 현달(顯達)해 자연히 정무공파가 형성 되었다.

정무공의 손자 4형제 중 3형제가 문과에 급제하고, 증손 충정공 오두인(忠貞公吳斗寅, 陽谷)이 형조판서로 순절충신(殉節忠臣)이 되어 영의정을 증직받고, 각 처의 서원에 배향(配享)되면서 명성을 떨쳤다.

계속해 현손(玄孫) 해창위 오태주(吳泰周)가 현종의 부마(駙馬)가 되어 명문가문으로 빛나게 되었다. 그 후 후손들은 문과 21, 무과에 114명이 급제해 문무를 겸비한 가문으로 발전했다.

역사란 과거 사실중 중대한 의미가 있는 것을 탐구하여 얻는 지식과 그 결과이다. 때문에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현재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평가하는 것이다. 이렇기에 이탈리아의 철학자 Benedetto Croce모든 역사는 현대의 역사이다.”라고 하였다.

이제 해주오씨 정무공파 실기를 펴내는 뜻은 현재의 후손들이 과거 선조들의 업적을 바르게 알고 긍지를 갖고 귀감(龜鑑)으로 삼게 하려는데 있다. 한편 외부인들이 우리를 이해하는데 참고 자료로 이용할 수 있게 하려는 뜻도 있다.

이 책은 본문 19장과 부록으로 외부인이 쓴 2편의 글을 실었다. 이는 우리 문중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을 살펴보려는 뜻에서다.

또한 조선시대 봉작 및 주요 관직표와 현대 공무원 직급의 비교표를 붙여 과거 관직의 위계(位階)를 이해하는데 편리하도록 했다. 모쪼록 이 한 권의 책이 후손들에게는 선조의 업적을 이해 하는데 보탬이 되고, 외부인들에게는 우리 문중을 알리는데 좋은 참고자료가 되었으면 한다.

미진한 부분이나 누락된 부분은 다음 수정증보할 때 바로 잡기를 바라며 많은 질정(叱正) 바란다.

 

1. 덕봉리 정착과 정무공파 형성

해주오씨 집성촌인 양성면 덕봉리 전경
해주오씨 집성촌인 양성면 덕봉리 전경

해주오씨가 덕봉리에 정착하게 된 계기는 불명확하나 1525(중종 20)에 유세창, 유세영 무리들의 고변무고사건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이들은 무뢰(無賴: 교활하고 거짓됨)한 무리들로 세상에서 용납할 수 없는 나쁜 짓만을 일삼다가 흉악한 음모를 꾸며 주위의 무리들을 꾀어 대역무도(大逆無道)한 반란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이 계획했던 음모가 비록 실행되지는 못했어도 사실이 밝혀지면 죄를 받을까 두려웠다.

이들은 나라에 역모를 알리면 벼슬을 얻고 상을 받는 실례가 있는 것을 알고, 거짓으로 역모를 보고하였다. 이 사건으로 60여 명이 체포되어 국문 과정에서 7명이 죽었고, 16명은 대역죄로 능지처참하고 많은 연루자가 먼 곳으로 귀양갔다.

이 사건에 오현경의 동생 오필경(吳弼卿)의 서자 오수경이 연루되어 오필경 부자는 처형당하고 오현경과 그 아들 오경운(吳慶雲)은 각각 산음과 안음(현재 경상남도 산청과 함양군 안의)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그해 12월에 돌아가셨다.

오경운의 부인 풍산심씨는 두 아들을 데리고 친정집 근처 덕봉리에 살다가 인편으로 시아버지와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고 현지에 달려가 두 분의 시신을 수습하여 덕뫼(덕봉리)에 반장(返葬: 객사한 사람을 살던 곳이나 고향에다 장사지냄)하고 두 아들을 데리고 이곳 덕봉리에서 계속 살면서 후손들이 번창하게 되었다.

때문에 해주오씨의 덕봉리 입향조(入鄕祖: 처음 들어와 살기 시작한 선조)는 통례공 오현경이며, 입향시기는 1525(중종 20)이전 이라 하겠다.

 

통례공 오현경 묘
통례공 오현경 묘

풍산심씨는 시어머니(증 숙인 안동권씨)를 모시고 어린 두 아들(10세 오수천, 7세 오수억)을 거느리고 친정집의 도움을 받으며 덕봉리에서 살았다.

풍산 심씨는 젊은 아녀자의 처지로 슬픔을 감내하며 두 아들에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억울하게 무고로 귀양지에서 돌아가셨음을 상기시키며 행동거지를 바르게 하고 공부에 열중하도록 엄하게 가르쳤다.

시간이 흘러 유세창의 역모고변은 거짓으로 판명되고 두 분(오현경 부자)은 혐의를 벗고 신원

(伸寃: 억울한 누명을 씻다) 되었으며 관직도 회복되었다.

그후 두 아들은 모두 관직에 진출해 오수천(吳壽千)은 어모장군 충무위 부호군으로 증 호조판서를, 오수억(吳壽億)은 무과 급제 후 어모장군 경상좌도 수군 우후로 증 병조판서가 되어 가문을 일으키고 오수억의 아들 즉 풍산심씨의 손자 오정방(吳定邦)은 무과에 장원급제해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현달(顯達: 입신출세)하여 가문의 명성을 떨쳤다.

이후 후손들은 덕봉리에 세거하였다. 이들이 해주오씨 정무공파이다.

풍산심씨는 멸문지화(滅門之禍)의 위기 속에서 가문을 유지, 계승시켜 해주오씨 정무공파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덕봉리가 정무공파 집성촌을 형성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신 분이다.

이분의 부덕(婦德)과 효열(孝烈)이 가문을 일으키고 명문가로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풍산심씨는 칠순이 지나 1568년에 돌아가셨으니 출생년도는 1498년경으로 추정된다.

후손들은 할머님의 은공을 영원히 추모하려고 2015년에 덕봉리에 영모각(永慕閣)을 건립하였다.

영모각
영모각

해주오씨들이 덕봉리에 정착하기 직전에는 조선 건국 초부터 용인 기흥지역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용인 지곡에 있는 소윤공 오현(吳顯)의 묘가 실전되었다가 1618(광해군 10)에 유남이의 신고로 다시 찾게 되었고, 용인 만현에 사정공 오윤(吳輪)과 사천공 오계종(吳戒從)의 묘가 있었던 점(두 분의 묘는 2006년 덕봉리로 이장함) 등으로 미루어 추정이 가능하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해주오씨 1(시조) 오인유(吳仁裕)공이 984(성종 3)에 북송에서 학사로 있다가 고려로 건너와 해주에 적을 두고 국사에 종사하면서 중국의 제도에 밝아 검교 예부감, 군기감감에 추천되어 오묘(五廟, 종묘)를 창건하고, 사직(社稷, 국가가 제사지내는 제도)을 세우며 국자감(최고학부, 대학) 신설을 청하는 등 국사에 깊이 관여하였고 후손들도 계속 벼슬길에 진출하면서 해주지역에 살았다.

실제로 해주오씨 4세 첨사공 오찰(吳札)은 고려시대 문과급제 후 태자첨사부 첨사로 금좌광록대부 상서성 좌복야로 추봉되었는데 그 묘가 황해도 금천 옛 우봉 오이능에 있는 점으로 확인할 수 있다.(계속)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중종 20314일 계유조~412일 신축조

선비마을 안성 덕봉리2008.

농재집부록 일사단기 4331, 1982

종규유묵2013

해주오씨세보2013

안성사람 안성이야기2005

유세창 역모사건 고변 실록 기사2015

 

오환일(해주오씨 정무공파 종중회장, 유한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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