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출신 염수정 추기경의 신앙이야기(4) - 박종권의 사담기
안성출신 염수정 추기경의 신앙이야기(4) - 박종권의 사담기
  • 시사안성
  • 승인 2023.11.04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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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 지난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시사안성을 통해 안성의 역사와 문화 관련 귀중한 글을 연재했던 박종권 선생님이 특별히 안성출신 염수정 추기경 인터뷰 내용을 정리해 주셨다.
박종권 선생님은 안성출신으로 오랫동안 안성에서 교편을 잡았을뿐만 아니라 천주교 안성성당 사목협의회 총회장을 역임하신 분으로 안성시지 1권 역사와 지리, 천주교 인물을 집필한 바 있으며, 본 지면에 “박종권의 사담기(사진에 담긴 이야기)”를 통해 안성관련 귀한 역사와 자료를 연재한 바 있다. 이번 염수정 추기경과의 인터뷰 내용 연재는 4회에 걸쳐 월1회 연재할 예정이다.

필자 주 : 이 글은 필자가 천주교 안성본당이 구성한 양협공소복원추진위원회위원들과 함께 2022122일 오전 10시 서울 혜화동 주교관에서, 천주교 서울 대교구장 직을 이임하신(추기경은 종신직) 안성출신 천주교 고위 성직자인 염수정(廉洙政, 안드레아) 추기경을 면담하면서 기록한 것이다. 인터뷰 대담 내용으로서는 마지막 회이다.

103위 성인 성화(출처: 천주교 서울 대교구) 1977년 문학진 토마스 화백이 그린 한국 순교 복자 103위 성인의 유화(285cm x 330cm)는 198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하여 선포한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식에서 성인 품위에 오름으로서 성인 성화로 재탄생한 것이다. 원본은 서울 대교구 혜화동 성당에 보관되어 있다
103위 성인 성화(출처: 천주교 서울 대교구) 1977년 문학진 토마스 화백이 그린 한국 순교 복자 103위 성인의 유화(285cm x 330cm)는 198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하여 선포한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식에서 성인 품위에 오름으로서 성인 성화로 재탄생한 것이다. 원본은 서울 대교구 혜화동 성당에 보관되어 있다

(질문자 박종권): “추기경님께서 재임하던 시기부터 시작되어, 현재까지 한국천주교회에서 추진하고 있는 시복시성(諡福諡聖)운동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필자 주): (아래에 있는 답변 내용들은 시복시성운동의 중요성에 따라, 염 추기경 말씀을 정확하게 옮기기 위하여,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CBCK 공식 자료를 참조하여 기록하였다.)

(염 추기경): <시복 시성의 의미> “한국 천주교회에서 추진하는 시복시성운동은 시복운동과 시성운동을 합친 용어로, 교회에서 신앙의 모범으로 살다가 죽은 인물, 혹은 순교 인물에 대하여 교황의 공식선언을 통해 공경할 수 있도록 하기위한 운동이다. 로마 가톨릭에서 그 성성(聖性)이나 순교로 인해 이름 높은 자에게 복자(福者,Beatus, Beata)’라는 칭호를 주어 공적으로 공경을 바칠 수 있도록 허가하는 교황의 선언을 시복(諡福,Beatificatio)이라 하고, 이미 시복된 복자를 '성인(聖人,Sanctus)'의 명부에 올리고 전 세계 교회로 하여금 공경할 수 있도록 하는 교황의 선언을 시성(諡聖,Canonizatio)이라 한다.”

(염 추기경): <한국교회의 성인과 복자> “한국 천주교회는 시복시성 절차를 거쳐 ‘103위 성인’(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124위 복자’(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를 모시고 공경하고 있다.

‘103위 시성식은 이미 1925년에 시복된 79위 순교복자와 1968년 시복된 24위 순교복자를 대상으로 로마 교황청 심사를 거친 후에 198456일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대회가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열릴 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천주교 역사상 처음으로 직접 내한하여 시성 선언을 통하여 이루어 졌다.

또한 ‘124위 시복식20148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직접 내한하여 천주교 신자 들 뿐만 아니라 온 국민이 큰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가운데,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시복미사를 장엄하게 드리며 124위의 시복을 선포한 바 있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출처: 안성 성당)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2020년 11월~2021년 11월) 기도문 표지 사진이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출처: 안성 성당)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2020년 11월~2021년 11월) 기도문 표지 사진이다

(염 추기경): <현재 추진 중인 시성 안건’> “현재 한국 천주교회가 추진하고 있는 시성 안건으로는, 지난 2014년 한국에서 거행된 시복식을 통하여 복자 품위에 오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124위에게 영광스러운 성인 품위에 올려 시성도록 청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조선왕조시기에 일어났던 천주교 박해인 신유박해(1801~1802) 때 목숨 바쳐 신앙을 지킨 순교자들을 중심으로, 기해박해(1839~1841)와 병인박해(1866~1872) 때 목숨 바친 순교자들이다.

앞으로 복자 124가 시성이 되려면 로마 가톨릭 교회가 인정하는 기적이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 124위 순교 복자들은 하나의 안건으로 묶여서 교황청 시성성에 제출되어 있으므로, 확실한 증거와 굳건한 믿음으로 124위 순교 복자 전체에게 기적적 치유를 전구(轉求)하여 구체적인 한 건의 기적이 확인되면 시성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는 124위 순교 복자들의 시성을 위해 ‘124위 순교복자 호칭기도를 제정하여 2014년 추계 정기총회에서 이를 승인하였다. 한국 가톨릭교회 전 신자들은 124위 순교복자들의 시성을 위해 열심히 전구기도를 바치고 있다.”

(염 추기경): <‘시복 안건’> “이번에 시성 안건과 함께 추진되고 있는 시복 안건을 보면, 현재 교황청에서 성덕 심사를 마치고 기적 심사를 준비하고 있는 <‘가경자(可敬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안건> 한 가지와 또한 순교심사를 위해 제출한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등 133위와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 등 동료 81’> 안건이 있다. 그리고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이 추진하고 있는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 사우어 아빠스와 동료 등 38’> 등 모두 세 가지 안건이 있다.”

(필자 주: 위의 호칭에서 가경자란 후보자의 영웅적인 덕행이나 순교자일 경우, 순교사실을 심의하고 그 결과를 교황청에 제출하여 시복 조사가 시작될 때 붙이는 경칭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종이란 교황청에 정식으로 시복 조사가 접수되기 전에 주어지는 호칭이다.)

(필자 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CBCK) 자료에 의하면, 위의 시복 추진 대상자인 하느님의 종 133는 조선왕조 시기인 1785~1879년 사이 신앙에 대한 증오때문에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로, 기존의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순교 사실 증명이 연구되고 현양되어 온 분들이다. 또한 하느님의 종 81는 대부분이 1950년 한국전쟁 전후로 그리스도에 대한 증오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의 조직적인 박해로 인하여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이다.

 

(질문자): “추기경님께서 재직 중 추진하시던 시복시성운동에 따른 청원 결과, 안성 본당 설립자 겸 초대 주임이신 공베르 안토니오 신부3대 주임이며 본당 최초의 한국인 사제인 이순성 안드레아 신부두 분이 영광스럽게도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셨습니다. 안성 본당에서는 자체로 시복시성기도문’(주교회의 2017년 추계정기총회 수정)을 제작하여 매 미사 때마다 신자들이 열심히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앞으로 두 분 신부님의 시복 신청에 따른 전망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염 추기경): “안성성당에서 사목하시던 역대 본당신부님 두 분이 한국천주교회주교회의에서 추진하는 시복시성추진 대상자 예비심사에서, ‘하느 님의 종으로 선정되신 것을 축하드린다. 2013년 주교회의 춘계정기총회에서 한국교회의 근 현대 신앙의 증인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승인 명부에 두 분 신부님이 포함되어 로마 교황청에서 심사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125주년의 역사를 준비하는 본당으로서 신앙심이 깊은 전 신자들이 열심히 기도하여, 반드시 두 분 신부님이 복자 품위에 오르시기를 함께 기도하겠다.”

(필자 주):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에서 제작한, 근 현대 신앙의 증인 81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略傳)’에 있는 <공베르 신부(No.27)><이순성 신부(No.66)>에 대한 본문을 요약하여 옮겨 보겠다.

공베르 안토니오 신부(출처: 안성 성당) 천주교 안성 성당이 2021년에 발행한 ‘시복 시성 기도문’(주교회의 2014년 추계 정기 총회 승인) 표지 사진이다
공베르 안토니오 신부(출처: 안성 성당) 천주교 안성 성당이 2021년에 발행한 ‘시복 시성 기도문’(주교회의 2014년 추계 정기 총회 승인) 표지 사진이다

< 순교자 약전 No.27 앙투안 공베르 신부(1875-1950) >

피랍일: 1950.7.15 피랍지: 서울

평양이송: 1950.7.19

순교일: 1950.11.12. 순교지: 중강진

순교형태: 병사

앙투안 공베르(Antoine Gombert, 孔安國 안토니오) 신부는 1875425, 프랑스 로데즈 교구에 속한 아베롱의 캉불라제에서 조제프 공베르와 마리 라콩브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느님의 종쥘리앵 공베르(Julien Gombert, 孔安世 율리아노) 신부는 앙투안 공베르 신부의 동생이다. 앙투안 공베르는 1893년 로데즈 대신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하다가, 1897914일 파리 외방 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1900624일 동생 쥘리앙 공베르와 함께 사제품을 받은 뒤, 두 형제는 조선대목구 선교사로 파견되었고, 부산을 통하여 한국 땅을 밟은 뒤 109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 뒤 주교관에 머물던 앙투안 공베르 신부는 1019일 공세리 본당(현 충남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에서 분리되어 설립된 경기도 안성 본당(현 안성시 구포동)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한국어를 배우면서 첫 사목을 시작하였다.

공베르 신부는 신자들을 돌보면서 선교에 힘썼고, 아주 검소하게 생활하였다. 병자에게 약을 나눠 주거나 프랑스에서 가져온 포도나무 묘목을 널리 보급하는 등 지역 사회를 위하여 아무런 조건도 없이 봉사하였다.

1909115일에는 남자 어린이들을 위해 공교(公敎) 안법 보통학교를 설립하였고, 1912년에는 여자 어린이들을 위한 학급을 증설하였다. 19193.1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일본 경찰에게 쫓겨 온 주민들을 보호해 준 일도 있었다. 1922년에 이르러 본당의 신자 수가 1600명을 헤아리게 되자 새 성당을 건축하기 시작하였고, 8월에는 이를 완공하여 104일 경성대목구의 에밀 드브레(E. Devred, 유세준) 보좌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가졌다.

이처럼 33년 동안 안성 본당에서만 사목한 앙투안 공베르 신부는 19329월에 서울 소신학교와 대신학교의 영성 지도 신부로 임명되어 안성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1936년부터는 혜화동 소신학교(곧 동성 신학교)의 영성 지도와 경리부장을 맡았다. 1948년부터는 신학교 옆에 있던 서울 가르멜 여자 수도원의 지도 신부를 맡았다.

1950624일은 공베르 형제 신부들이 함께 사제품을 받은 지 5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바로 그 이튿날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앙투안 공베르 신부는 상경해 있던 쥘리앵 공베르 신부, 성신대학의 교수로 임명된 파리 외방전교회의 셀레스탱 코요스(C. Coyos, 구인덕 첼레스티노) 신부와 함께 사제관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러다가 715일 가르멜 수녀원에서 마리 메히틸드(M. Mechtilde) 수녀 등 네 명의 수녀와 함께 체포되어 서울 소공동의 삼화 빌딩에 감금되었다.

앙투안 공베르 신부는 삼화 빌딩에 갇혀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인민재판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고 나서 719일에는 일행들과 함께 평양으로 이송되었으며, 95일에는 평양 수용소를 떠나 911일 만포(현 자강도 만포시)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그들 일행은 고산진(현 만포시 고산리) 등지로 끌려 다니다가 1031일 중강진(현 자강도 중강군 중강읍)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죽음의 행진이 시작된 것이다.

이미 쇠약해져 있었던 공베르 형제 신부는 행진 과정에서 더욱 탈진하였고, 118일 중강진에 도착한 뒤로는 더 이상 움직일 수조차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때 북한군들은 운동을 핑계 삼아 일행들을 혹한 속으로 불러내곤 했는데, 앙투안 공베르 신부는 그 과정에서 선종하고 말았다.

19501112일로, 그의 나이는 75세였다. 이어 이튿날 쥘리앵 공베르 신부도 선종하자, 형제가 함께 폴 비예모(P.Villemot, 우 바오로) 신부 옆에 조악하게 마련된 무덤에 묻혔다.

선종하기 하루 전날, 앙투안 공베르 신부는 움직일 수조차 없는 몸을 이끌고 동료인 폴 비예모 신부 곁으로 가서 임종을 지켜 주었다. 마지막까지 그와의 약속을 지키고, 사랑의 의무를 실천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남긴 생활 법칙이었고, 형제적 사랑의 정신이었다.

이순성 안드레아 신부(출처: 안성 성당) 같은 ‘시복 시성 기도문’ 표지 사진이다
이순성 안드레아 신부(출처: 안성 성당) 같은 ‘시복 시성 기도문’ 표지 사진이다

< 순교자 약전 No.66 이순성 안드레아 신부(1895-1950) >

피랍일: 1950.7.5. 피랍지: 정봉

순교일: 1950.10월경 순교지: 해주

순교형태: 생매장(추정)

이순성(李順成) 안드레아 신부는 18951128일 강원도 이천군 산내면 용포리 대곡동(큰골, 현 판교군 용포리)에서 이명룡(李明龍) 바오로와 박 페트로닐라의 아들로 태어나 1896314일 유아세례를 받았다.

1908926일 용산의 예수 성심 신학교에 입학한 이순성 안드레아는 1923년에 학업을 마친 뒤 520일 사제품을 받고 62일 경기도 행주 본당(현 고양시 행주외동)의 주임으로 임명되어 사목하였다.

이순성 안드레아 신부는 3년 뒤인 19265월 황해도 해주 본당(현 해주시 장춘동)의 주임으로 임명되었다가 19285월 황해도 은율 본당(현 은율군 은율읍)의 주임으로 전임되었다. 은율 본당에 재임하는 동안 이순성 안드레아 신부는 해성 야학원을 개설하여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그는 비신자들에게도 호평을 받을 정도로 성품이 온화하고 자상하였으며, 불우한 이웃을 돕는 데 적극적이었다.

19348월 이순성 안드레아 신부는 경기도 안성 본당(현 안성시 구포동)의 주임으로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폐결핵으로 황해도 신계군 고면 태을리에 있는 동생 이근성 야고보의 집에서 요양하게 되었다. 그런 다음 193610월경 인근에 있는 정봉 본당(현 황해북도 신계군 정봉리)의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이순성 안드레아 신부는 병으로 쇠약해진 상태였지만, 미사 강론을 열정적으로 하여 신자들에게 많은 감화를 주었다고 한다. 그 뒤로도 그는 일제 말기의 고난과 공산 정권의 반 종교 정책을 겪으면서도 본당 사목을 무리 없이 이끌어 가려고 노력하였다.

1949년부터 북한 공산 정권의 교회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노동당원들이 정봉 성당에 느닷없이 닥쳐 성당의 풍금을 빌려 달라고 요구하였고, 급기야는 성당 자체를 인민 위원회에 양도하라고 협박하였다. 이에 기가 막힌 이순성 안드레아 신부는 그들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이순성 신부가 보는 앞에서 풍금과 성물들을 파괴하고 제의를 찢는 행패를 부린 뒤에야 철수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극도의 위협을 느꼈지만, 다른 곳으로 피신하지 않고 성당을 지켰다.

19506.25 전쟁이 발발한 지 열흘이 지난 75일 오전 10시경, 마침내 우려하였던 일이 발생하였다. 신계읍 정치 보위부원 두 명이 찾아와 의논할 일이 있다고 하면서 이순성 안드레아 신부를 차에 태우고 가 버린 것이다. 그 와중에도 이순성 안드레아 신부는 성당으로 달려온 신자들에게 내가 나오지 못하게 되면 아무라도 성당 감실을 열고 성체를 영하도록 해라.” 하고 당부하였다. 그 뒤 정봉 성당은 노동당원들에게 점거되고, 성모상은 그들의 몽둥이에 맞아 부서지고 말았다.

이순성 안드레아 신부의 행방이 알려진 것은 국군과 유엔군의 진격으로 북한 인민군이 후퇴하던 195010월경이었다. 해주 동면 해변 백사장에서 구덩이를 파고 있는 이순성 신부의 모습이 목격된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이순성 안드레아 신부는 유재옥 프란치스코 신부처럼 해주 교화소에 수감되었다가 자신이 파 놓은 그 구덩이에 생매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염 추기경 안수 기도(출처: 필자 보관 사진) 2022년 12월 2일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 인터뷰를 마치고 필자에게 안수 기도를 하는 모습이다. 염 추기경은 이 날 방문한 안성 성당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축복의 안수 기도를 하였다
염 추기경 안수 기도(출처: 필자 보관 사진) 2022년 12월 2일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 인터뷰를 마치고 필자에게 안수 기도를 하는 모습이다. 염 추기경은 이 날 방문한 안성 성당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축복의 안수 기도를 하였다

(질문자): “2014년 한국 추기경님으로는 최초로 분단선을 넘어 개성을 방문하시어 직접 북한 인사와 근로자를 만나고 오셨습니다. 저희 안성 본당에서는, 북한에서 순교하신 후 중강진 지역에 매장되어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공베르 안토니오 신부님의 유해를 모셔오기를 염원하고 있습니다. 당시 평양교구 교구장의 임무를 겸하고 계셨던 경험으로 보실 때, 앞으로의 남북관계의 개선과 통일에 대한 전망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염 추기경): 답변 기록 생략

(필자 주): 상기 답변에 대신하여, 2014521일자 신문 방송 등 언론 기사에 의하면, 염 추기경은 521일 신부 6명과 서울대교구 관계자 2명으로 구성된 방문단과 함께 한국교회 추기경으로는 최초로 분단선을 넘어 직접 북한 지역 개성을 방문하고 근로자를 만나고 왔다.

한국천주교 평양교구장 서리 임무를 겸하고 있는 추기경은 당시 언론을 통하여 우리 교회는 남북관계의 개선 및 북한 주민들의 행복한 삶, 그리고 평화로운 통일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종합적이고 단계적으로 접근할 방안을 준비하고 조금씩 실천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서울대교구 측에 의하면, 이번 방문은 북한지역 개성공단의 천주교 신자 공동체인 로사리오 회의 요청에 의한 단순한 사목(司牧)적 방문이기 때문에 개성공단 관계자들과 천주교 신자들을 만났을 뿐 북한 주민이나 북측 관계자들과의 접촉은 없었다고 하였다. 북한의 유일한 천주교 창구인 조선카톨릭협회인사들을 만나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전하였다. (2014.5.22. 가톨릭 뉴스, 지금여기, 한상봉 기자 기사참조)

한편, 1988년에 설립된 북한의 조선카톨릭협회장재언 위원장은 2012년 염수정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에 착좌했을 때 우리 교우들도 대주교님이 교구장으로 사목하시는데 대하여 신앙적으로 기쁘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 하면서 민족의 평화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길에서 사랑과 정의의 신앙적 유대와 신뢰를 두터이 하여 긍정적인 성과가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한다.”고 축하 인사를 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2013215일 열린 제46차 정기총회에서 설립 25주년을 맞는 조선카톨릭교협회와 평양 장충성당과 민간교류를 하는 방안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아직은 구체적으로 추진되지 않았다. 당일 개성공단에 들어간 뒤 돌아온 염 추기경은 기자회견에서 선의의 뜻을 가진 사람들이 대화하며 진실로 노력한다면 평화가 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힌 바 있는데 선의의 뜻을 가진 사람들에 대하여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www.catholicnews.co.kr 참조)

현재는 남북관계가 단절된 상황이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8월 방북을 추진한 적이 있다. 202110월 바티칸 국무원장인 파롤린 추기경은 교황의 북한 방문과 관련해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북한방문 의사는 확실하며, 지금도 북에서 초청장이 오길 기다리고 있다고 밝힌 것으로 볼 때, 하루 빨리 남북 관계가 회복되기를 고대할 뿐이다.

(질문자): “마지막으로 2025년에 본당 설립 125주년을 맞이하는 안성 본당 신자들에게 귀중한 교훈의 말씀을 주십시오.”

(염 추기경): 답변 기록 생략

(질문자): “오랜 시간에 걸쳐 귀중한 말씀을 주신 존경하올 추기경님께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저희들에게 강복해주시고 안수기도로 축복하여 주십시오.”

(추기경님께서는 방문한 일행과 함께 사진 촬영에 응하신 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안수 기도로 축복하여 주시고 인터뷰를 끝마치시었다.)

(필자 박종권의 마무리 소감)

필자가 지난 8월 초부터 시작하여 총 4회에 걸쳐 안성출신 염수정 추기경의 신앙이야기원고를 쓸 수 있었던 것은 지난 해 2022122일 염수정 추기경님의 허락을 받은 안성 성당 양협공소 복원추진위원회위원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모두 이루어진 것이다. 개인 원고 형식의 기고문 특성으로 인하여, 당일 수고하신 한 분 한 분의 실명과 추기경님과 함께 찍은 사진을 초상권 문제로 모두 밝히지 못하였음에 송구할 따름이다. 끝으로 연재를 허락하여 주신 시사 안성대표님께 감사드린다. 또한 시사 안성독자 여러분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바이다. 많이 부족하지만 앞으로도 건강이 허락하는 대로 안성지역의 종교(천주교)분야 인물 탐구와 역사 공부를 계속하여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이다.”

 

박종권 전 천주교 수원교구 안성성당 사목협의회 총회장

안성시지(2011) 1권 역사와 지리 천주교 인물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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