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출신 염수정 추기경의 신앙이야기(2) - 박종권의 사담기
안성출신 염수정 추기경의 신앙이야기(2) - 박종권의 사담기
  • 시사안성
  • 승인 2023.09.0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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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 지난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시사안성을 통해 안성의 역사와 문화 관련 귀중한 글을 연재했던 박종권 선생님이 특별히 안성출신 염수정 추기경 인터뷰 내용을 정리해 주셨다.
박종권 선생님은 안성출신으로 오랫동안 안성에서 교편을 잡았을뿐만 아니라 천주교 안성성당 사목협의회 총회장을 역임하신 분으로 안성시지 1권 역사와 지리, 천주교 인물을 집필한 바 있으며, 본 지면에 “박종권의 사담기(사진에 담긴 이야기)”를 통해 안성관련 귀한 역사와 자료를 연재한 바 있다. 이번 염수정 추기경과의 인터뷰 내용 연재는 4회에 걸쳐 월1회 연재할 예정이다.

(필자주) 이 글은 필자가 천주교 안성본당이 구성한 양협공소복원추진위원회위원들과 함께 2022122일 오전 10시 서울 혜화동 주교관에서,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직을 이임하신(추기경은 종신직) 안성출신 염수정(廉洙政, 안드레아)추기경을 면담, 인터뷰하면서 기록한 내용이다.

필자는 천주교 박해시대에 신자들이 겪었던 순교이야기와 더불어, 추기경 가정공동체의 신앙 이야기 등 안성지역의 종교역사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믿어 대담 내용을 요약하여 시사안성에 기고한다. (아래는 전 회에 이어서 계속된 인터뷰 기록임)

염 추기경과 필자(사진출처: 방문단 권**위원 촬영 공유) 2022.12.2일 서울 회화동 주교관에서 인터뷰를 마친 후, 염 추기경은 방문단 일행을 1층 엘리베이터 앞까지 안내하며 고향 안성에서 올라온 신자들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표하였다
염 추기경과 필자(사진출처: 방문단 권**위원 촬영 공유) 2022.12.2일 서울 회화동 주교관에서 인터뷰를 마친 후, 염 추기경은 방문단 일행을 1층 엘리베이터 앞까지 안내하며 고향 안성에서 올라온 신자들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표하였다

(질문자): “추기경님의 조부모님(염재원 요한과 박 막달레나)께서 1916년 자녀들과 함께 안성 노루목(미장리)으로 이주해 오실 때를 전후하여, 작은 신앙 공동체인 가족을 형성하게 되는 과정에 대하여 설명해 주십시오.”

(염 추기경): <조부모의 자녀 4형제 혼인> “조부이신 염재원 노루목 공소회장의 아들 중에서 장남(염상진 아우구스티노, 저의 첫째 큰아버지)은 여주 옹기점인 오감마을(점말)에 살 때 경기도 광주의 곤옥골 교우촌 출신인 파평 윤 씨(바르바라)와 이미 혼인을 하였다. 그리고 안성의 노루목 교우촌으로 이주한 차남(염승진 가밀로, 둘째 큰아버지)은 같은 곤옥골 출신인 인동 장 씨(루치아)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셋째 아들(염대진 라우렌시오, 셋째 큰아버지)은 청주 출신 진주 강 씨(아가타)와 혼인을 하였다.

1926년에는 마지막으로 넷째 아들이며 저의 아버님 되시는 염한진 갈리스도는 전북 무주 출신인 수원 백 씨(백금월 수산나)를 아내로 맞아 들여 안성성당(: 1900년 설립된 한옥 기와집)에서 공베르 신부 주례로 혼인성사를 받고 가정을 꾸리게 된다.”

<어머니 수원 백 씨 집안> “아버지 갈리스도와 어머니 수산나는 혼인 당시 18살의 동갑내기였다. 위와 같이 네 형제가 아내로 맞아들인 교우들도 모두 유명한 구교우 집안 출신이었으니, 당시 까지만 해도 천주교 신자들은 비신자 집안과의 혼인에 관하여, 천주교 신자끼리만 결혼해야 하는 내혼(內婚) 전통 때문에 생각지도 못하던 상황이었다.

어머님의 친정인 수원 백 씨 일가는 4대 조부 때 천주교에 입교한 구교우 집안으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날 때마다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 전라도의 무주구천동 골짜기로 들어가 옹기점을 운영하며 어렵게 생활하였고,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된 이후 논산 지역으로 이주해 살았다. 어머니 백 씨 집안의 신앙은 염 씨 집안의 신앙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똑같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5대 째를 이어오는 동안 어떠한 상황에도 굴하지 않은 집안들이었다.”

봉헌식 때의 안성성당과 신자들(출처: 안성 근현대 사진첩1, 2003, 안성시, p.34, 안성성당 제공) 1922년 10월 4일 공베르 신부와 신자들이 합심하여 신축한 안성성당 봉헌식 날, 내빈과 성직자 신자들이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다. 성전 축성(祝聖)미사는 조선교구(현 서울대교구) 드브레(Devred, 兪世竣) 보좌주교가 집전하였다.
봉헌식 때의 안성성당과 신자들(출처: 안성 근현대 사진첩1, 2003, 안성시, p.34, 안성성당 제공) 1922년 10월 4일 공베르 신부와 신자들이 합심하여 신축한 안성성당 봉헌식 날, 내빈과 성직자 신자들이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다. 성전 축성(祝聖)미사는 조선교구(현 서울대교구) 드브레(Devred, 兪世竣) 보좌주교가 집전하였다.

(질문자 박종권): “추기경님의 조부모님(염재원 요한과 박 막달레나)께서 안성에 오신 이후, 당시 공베르 신부님이 설립한 안성 성당에서의 신앙생활은 어떠하셨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염 추기경): <신앙생활과 신심행위> “안성 노루목 교우촌으로 이주해 온 조부모님과 가족들은 언제나 모범적인 기도 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 같다. 특히 주일이 되면 이 곳 공소회장을 맡고 계신 저의 할아버지(당시 42)께서 앞장서 공소예절을 이끌었고, 여느 공소와 마찬가지로 대축일이 되면 전 공소 신자들이 함께 모여 20여 리 떨어진 안성 본당에까지 걸어가서 공 신부가 집전하는 대축일 미사에 참례하곤 하였다.

평일에는 마을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물론 온 가족이 자주 모여 기도생활을 하였으며 봄, 가을 판공(의무적인 고해성사)때 마다 본당의 공베르 신부가 칭찬할 정도로 자녀들의 교리 교육에도 열성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조부모님이 이곳 노루목 옹기촌으로 온 지 12년 후인 1928년에는 장남(염상진 아우구스티노)과 차남(염승진 가밀로) 두 아들을 데리고 또 다른 점토를 찾아 안성 대덕면 건지리 옹기점으로 이사 간 뒤부터는 3남인 염대진(라우렌시오) 저의 백부가 노루목 공소 회장을 맡게 되었고, 4남 염한진(갈리스도) 저의 아버님은 주로 본당 사목에 참여하여 공베르 주임 신부를 도우셨다고 한다.

또한, 신앙생활에 열심이었던 저의 할머니(박 막달레나)와 어머니(백금월 수산나)의 신앙심은 더욱 두드러졌다고 한다. 두 분은 매월 첫 주마다 이루어지는 신심 전례인 첫 첨례 5, 6, 7’을 지키기 위해 수시로 안성 성당으로 걸어 나가서 참례하였고, 더러는 안성 양성면 산골짜기에 있는 미리내 성당에 까지 가서 참례하였으며, 심지어는 충청도 음성 장호원에 있는 감곡성당에 까지 먼 길을 걸어가서 순례하면서 기도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염재원 부부(출처: 차기진의 ‘한 가족 신앙이야기’ p.64 사진 전재) 1916년 안성 ‘노루목 공소’ 설립 초창기 회장 염재원 요한, 박 막달레나 부부 사진(염 추기경의 조부모)
염재원 부부(출처: 차기진의 ‘한 가족 신앙이야기’ p.64 사진 전재) 1916년 안성 ‘노루목 공소’ 설립 초창기 회장 염재원 요한, 박 막달레나 부부 사진(염 추기경의 조부모)

(필자 주): ‘첫 첨례 5, 6, 7’은 천주교회에서 오랫동안 전통적으로 지켜온, 매월 첫 목요일(매월 첫 번째 일요일 시작으로 5일 째/성직자 수도자 지향 전례일), 첫 금요일(6일 째/예수 성심 지향 전례일), 첫 토요일(7일 째/성모 성심 지향 전례일)에 거행되는 평일미사에 나가 고해성사 후 영성체하고 기도하는 특별 신심 행위 순서를 말한다.

 

(질문자): “추기경님 가정에서는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3형제 사제 탄생이라는 기록을 세우셨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서울로 가시어 공부하시다가 사제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하시게 된 동기에 대하여도 말씀해 주십시오.”

(염 추기경): <가정 신앙공동체> "먼저 말한바와 같이 독실한 구교우 집안의 신앙이 192618세 동갑인 부친 갈리스도와 모친 백 수산나의 혼인성사를 통해 결합되었고 또 하나의 작은 신앙공동체를 이루는 포도나무의 새 순을 싹틔우게 되었다.

부모님은 혼인성사 이후 위로 딸 셋과 그 아래로 수운(루가, 1933년생), 수용(요한, 1938년생), 수정(안드레아, 1943년생), 수완(야고보, 1946년생), 수의(요셉, 1949년생) 등 내리 다섯 아들을 두게 된다. 그러나 훗날 어린 두 딸을 잃으면서 수제(마리아) 누님이 장녀이자 외동딸이 되었다.

그중에서 셋째 아들인 본인과 동생 수완과 수의 3형제가 훗날 성직자가 되었으니, 선대조의 천주교 입교와 순교로부터 부모까지 이어 내려온 독실한 신앙이 후손에 이르러 사제성소(司祭聖召)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저의 고조부모이신 부부 순교자(염석태 베드로와 김해 김 씨 마리아) 거주지인 진천 사기장골 교우촌, 참수 처형 장소인 안성 죽산 성지그리고 조부(염재원 요한)가 안성으로 이주해 정착한 노루목 교우촌’(안성시 삼죽면 미장리 337번지) 등은 바로 염 씨 집안과 관련된 사제성소의 못자리였다고 말 할 수 있다.”

안성 ‘노루목 공소’가 있던 자리(출처: 동 ‘신앙이야기’ p.67) 안성시 삼죽면 미장리 33*번지에 있는 청색 건물 자리가 염 추기경 생가, 가운데 마당에는 옹기공장이 있었고 오른 쪽 하단의 함석지붕 자리는 염대진(추기경 백부, 이름 바뀐 ‘미장리 공소’ 회장)의 옛집 터
안성 ‘노루목 공소’가 있던 자리(출처: 동 ‘신앙이야기’ p.67) 안성시 삼죽면 미장리 33*번지에 있는 청색 건물 자리가 염 추기경 생가, 가운데 마당에는 옹기공장이 있었고 오른 쪽 하단의 함석지붕 자리는 염대진(추기경 백부, 이름 바뀐 ‘미장리 공소’ 회장)의 옛집 터

<사제성소의 소원> “3형제를 성직자로 불러 주시도록 열심히 기도했던 분은 할머니(박 막달레나)와 어머니(백 수산나)였다고 한다. 할머니의 경우에는 30년 동안, 앞에서 말했던 바와 같이 안성 성당, 미리내 성당, 감곡 성당 세 곳을 번갈아 가며 걸어 나가, 매월 초 거행되는 첫 첨례날의 신심행위를 빠트린 적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 어머니는 특히 시어머니의 권유에 따라 1943년 셋째 아들이 되는 저를 잉태한 뒤부터 주님과 성모님께 기도를 봉헌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집안에서 아들이 태어나면 성직자로, 딸이 태어나면 수도자로 바치겠다는 지향을 가지고 바치기 시작한 기도는 넷째, 다섯째 아들을 잉태할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되었던 사실이 나중에 밝혀지기도 하였다.

큰 형님(염수운 루가, 안법고 1회 출신)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어머님은 지극히 평범한 분이셨다고 한다. 그러나 평범하게 사시면서 할머니와는 특별한 관계를 맺으셨던 것으로 생각된다. 저와 동생들을 임신하였을 때마다 할머니께서 크게 기뻐하시어 축하의 말씀을 전하시면서, 어머니에게 너희 대(염 씨 신앙 6대째)에서 사제가 나와야한다고 하시면서, ‘아들이 태어나면 사제로, 딸이 태어나면 수녀로, 주님과 성모님께 바칠 것을 약속하고 매일 기도를 해야 한다고 권유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시어머니로부터 들은 이런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고 속으로만 간직하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염 씨 집안에서 첫 번째 사제로 탄생한 1970128일 저(수정 안드레아)의 사제서품 이후에도 이러한 이야기를 들은바 없었다. 어머니가 이러한 이야기를 세 아들에게 털어 놓으신 것은, 3형제 중 막내(수의 요셉)가 서품을 받은 1981224일 저녁 모임이었다. 그러니까 제가 태어난 1943년 이래 38년 동안 혼자서만 가슴에 품고 숨겨온 소원과 기도 이야기를 그제 서야 털어놓은 셈이었다.”

<어머니 수산나의 신앙> “어머니는 본래 무학이어서 교리서나 기도서를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교리를 배우고 싶고 하느님을 더 잘 알고 싶은 마음에 독학으로 한글을 깨우칠 수 있었다. 그런 다음 처음으로 읽은 책이 요셉 감략’(: 창세기 가운데 요셉의 생애와 신앙부분을 따로 떼어 만든 성서 해설서, 1883년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 주교가 한글로 번역한 책)이었다. 이어서 천주교 요리문답320조목을 줄줄 외우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는 안성성당 공베르 신부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한다. 어머니는 특히 성모(聖母) 신심이 남달랐으며 언제나 묵주(黙珠)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또 교회의 공식 기도서인 천주 성교공과를 항상 가까이 두고 조과(아침기도), 만과(저녁기도), 매괴경(묵주기도) 등을 빠트리지 않고 바치면서 줄줄 외우곤 하셨다. 틈이 날 때마다 자식들에게 교리문답의 내용을 설명해 주거나 요리강령’(: 프랑스 파리에서 간행된 그림 교리서로, 1910년 한기근 신부의 한글 번역으로 널리 보급되었던 그림책)을 펼쳐 보이면서 재미있게 교리를 가르쳐 주었다. 이처럼 자식들에게는 어머니 수산나가 훌륭한 교리 교사였었고 이러한 영향으로 자식들의 사제성소는 암암리에 싹트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안성 건지리 옹기점 터의 현재 모습(출처: 동 ‘신앙이야기’ p.67)
안성 건지리 옹기점 터의 현재 모습(출처: 동 ‘신앙이야기’ p.67)

(질문자): “추기경님께서는 가족과 함께 안성을 떠나 서울로 가시어 공부하시다가 사제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하시게 되었던 동기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고 3형제가 함께 걸으셨던 성직자 생활에 대하여도 말씀해 주십시오.”

(염 추기경): <서울로 이주> “우리 가족은 사실 안성 미장리 노루목에 살 때 옹기점을 경영하였으나, 말년에는 생활이 여의치 않은 형편이었다. 부모님은 할 수 없이 옹기점을 폐쇄하고 옹기 공장과 일대의 부지를 모두 밭으로 만들어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또 농한기에는 가마니를 짜서 생계를 보탰는데, 이전 일제 말기에는 이마저 모두 공출로 빼앗겨야만 했던 시대도 겪으면서 어렵게 지내기도 하였다. 결국 부모님은 19545월경, 자식들을 데리고 서울 종로구 효자동 3번지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여 이주하게 되었다. 이 때 큰 형님(염수운 루가)은 단국대학교 법과 2학년에 재학 중이었고, 작은 형(염수용 요한)은 동성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저는 안성 삼죽면에 있는 삼죽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고 서울 청운초등학교로 전학하게 되었다. 저의 세례 대부이신 큰 아버지(염대진, 라우렌시오, 공소회장/노루목 공소가 미장리 공소로 명칭 변경) 가족은 이후에도 미장리에 살다가 1968년 서울 영등포구 도림동으로 이주하였다.”

<서울에서의 신앙생활> “아버님(염한진, 갈리스도, 1908~1983)과 함께 저희 가족들이 서울로 이주해서 살던 효자동은 당시 세종로 본당 관할이었다. 그 때 세종로 본당(주임 이완성 신부)은 그 자리에 있던 기와집을 성당으로 개조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아버님은 이 본당에서 회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면서 새 성당 터를 물색하는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런 다음 후암동으로 이사 간 후 부터는 가톨릭 중앙 신용협동조합의 창립(1960) 임원으로 활동하였고, 후암동 본당 신협이 설립되었을 때도 이사를 맡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훗날 논현동으로 이주해서는 본당의 레지오 마리에’(성모 신심단체)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신자들과 함께 선교와 성소개발에 적극 봉사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저희 가족은 서울로 이주한 뒤에도 신앙생활은 변함이 없었다.

어머니(백금월, 1908~1995) 역시 평범한 가운데서도 열심히 기도 생활을 하였고, ‘프란치스코 3신심단체에 가입하여 재속(在俗)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좋아하셨고, 그분처럼 하느님의 처분에 맡기는 관대한 마음의 소유자로 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물론 염 씨 집안에서 사제가 나오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과 열성적인 신심활동은 계속 변함이 없었다.”

<첫 번째 사제의 길> “저는 서울로 이주해 온 다음다음해인 19563월 혜화동에 있는 동성중학교에 입학하였고,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소신학교(小神學校)라고 부르기도 하는 성신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당시까지 가톨릭 교육기관인 동성중고등학교는 일반 중등학교로, 성신중고등학교는 대신학교(大神學校)인 성신대학의 소신학교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어 19622월 성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4월 가톨릭대학(성신대학의 후신)에 입학하게 된다. 그러나 군 복무를 위해 재학 중 육군에 입대하여 1966년 만기 제대한 뒤 학업을 계속하였고, 197075일 부제품(副祭品)을 받고, 그 해 128일에는 마침내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사제로 서품(敍品)되었다. 저희 염 씨 집안에서 첫 번째로 사제의 길을 걷게 되었다. 아마 어머니께서 열심히 기도해 주신 덕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3형제 신부와 어머니(출처: 동 ‘신앙이야기’ p.6) 1983년 12월 30일 염 추기경 부친 염한진(갈리스도) 삼우재 날 함께 찍은 가족사진(어머니를 둘러싼 가족 중 가톨릭 사제가 착용하는 로만칼라 복장의 3형제 신부가 보인다)
3형제 신부와 어머니(출처: 동 ‘신앙이야기’ p.6) 1983년 12월 30일 염 추기경 부친 염한진(갈리스도) 삼우재 날 함께 찍은 가족사진(어머니를 둘러싼 가족 중 가톨릭 사제가 착용하는 로만칼라 복장의 3형제 신부가 보인다)

(필자 주): <신학교 입학 계기> 염 추기경이 사제의 길을 걷게 된 계기에 대하여, 가톨릭신문(2014,1,19일자)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염 추기경은 6.25전쟁 발발로 생활고에 시달리는 등 갖은 어려움을 겪으며 자랐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고향 안성에서 형, 아우들과 함께 냇가에서 뛰놀며 고기를 잡던 평범한 소년이었다. 그러나 서울로 이사했을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 반에서 1~2등을 다툴 정도로 평범하지만은 않은 소년으로 자란다. 학업성적처럼 신앙생활도 매우 열심이었다. 염 추기경 가족들은, 매일 아침저녁 기도는 물론이고 묵주의 기도를 5단까지 바쳤다. 염 추기경이 소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계기는, 인생을 바꾼 이 책 한권 덕분이다. 그 책은 바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잡지인 경향잡지’(1906보감이라는 명의로 발행되다가 1911경향잡지로 제호를 변경)였다. 이 책에서 소신학교(성신고등학교)에 대한 소개와 입학 안내문을 발견하고서, 그는 사제가 될 것을 결심하였고, 오직 사제의 길만 바라보게 되었다.>>

(필자 주:) <사제 재직경력> 염 추기경은 1970128일 사제 서품 후 서울 불광동 본당 보좌 신부(1971)로 첫 발령을 받은 뒤, 당산동 본당 보좌 신부를 거쳐 성신고등학교 교사 및 부교장 신부(1973)를 겸임하면서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상담 심리학을 전공(1975,2)하였다. 다음, 이태원 본당 주임(1977) 신부를 거쳐 필리핀 아시아 극동 사목 연수원(E.A.P.I 1979~1980)에서 공부하였다. 그리고 장위동 본당주임(1980), 영등포 본당주임(1985)을 거쳐 가톨릭대학 사무처장(1987), 서울대교구 사무처장(1992)을 역임한 뒤, 서울대교구 제15지구장으로 선임되어 목동 본당 주임(1998)신부를 겸직하였다.

한 편 199527일에는 사제서품 제25주년을 기념하는 은경축 미사가 서울 혜화동 성당에서 열리기도 하였다. 이 행사는 염수완(역촌동 본당 주임), 염수의(혜화동 본당 주임) 두 동생 신부가 마련한 자리였다. 3형제와 가족들이 함께 모인이 자리에서는 어머니와의 일화를 자연스럽게 소개되기도 하였다 한다. 어머니는 27년간 프란체스코 재속회원으로 살아가면서 자신의 자리에서 지극히 평범한 신앙생활을 실천하시고 묵묵히 기도하셨던 분이며, 어머니는 막내 염수의 신부 사제품 받던 날 저녁에야 비로소 내가 소원했던 것을 하느님이 다 이루어 주셨다하시며, 세 아들이 사제가 되기를 늘 기도해 왔던 사실을 털어 놓았다고 한다.

 

(염 추기경): <두 번째 사제 탄생> “이번에는 바로 밑에 동생 수완(야고보)이 성소의 길을 밟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따라 평일 미사에 참례하던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어느 날, 아침 미사 후 본당 신부로부터 복사(服事, 미사 집전 예절에서 사제를 돕는 역할)를 하라는 부름을 받고 이를 시작하게 된 것이 성소의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러면서 6학년을 졸업할 즈음에 사제의 길을 생각하게 되어 19603월 소신학교인 성신중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672월 성신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가톨릭대학에 입학하였다. 아마, 형인 내가 가는 길을 따르고 싶어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1975128일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집안에서 두 번째 사제로 서품되는 또 한 번의 경사를 맞게 된 것이다. 동생 신부는 서울대교구 미아동 본당의 보좌신부로 첫 발령을 받은 후, 상봉동 본당 보좌 신부, 해군 해병 군종신부(1978)를 거쳐 의정부교구 동두천 주임신부(1982)로 갔다가 다시 서울 금호동(1985), 오류동(1989), 역촌동(1993), 상계동 주임신부(1998) 등을 역임하게 되었다. 2003년에는 서울대교구 석관동 본당 주임신부로 재직 하던 중 사제가 부족한 제주교구의 요청으로 파견되어 제주 중문본당 주임신부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현재는 서울대교구의 원로사목 사제로 일하고 있다.”

<세 번째 사제 탄생> “막내 동생 수의(요셉)는 신학교가 아닌 일반계 고등학교인 용산고를 거쳐 1972년 서강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육군에 입대하였다. 그러나 이 때부터 그의 마음에는 셋째 형인 저의 사제 서품과 넷째(수완) 형 신부에 이어 사제가 되겠다는 성소의 은총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 같다. 수의 동생은 제대한 뒤 사제가 되겠다는 희망을 형들에게 밝히고 넷째 형이 사제가 된 다음해인 1976년 대신학교인 가톨릭대학에 진학하였다. 1981224일에는 가톨릭대학원을 졸업함과 동시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염 씨 집안의 세 번째 사제가 탄생한 것이다. 한국 천주교 최초의 3형제 신부가 나란히 탄생한 역사를 스스로 기록하기도 한 것이다. 바로 이날 저녁,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3형제 사제의 어머니께서는, 제가 태어난 1943년 이후 38년 동안 사제성소를 기원하면서 끊임없이 기도를 바쳐 온 사실을 가족과 아들 신부들에게 털어놓게 된다. 이렇게 해서 할머니 살아계셨을 때 며느리에게 너희 대(염 씨 신앙 6대 째)에서 사제가 나와야 한다.’는 당부 말씀이 다 이루어 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필자 주): 상기 신앙 이야기에 의하면, 염수의 신부는 서울 명동 본당 보좌신부로 첫 발령(1981)을 받은 이후 서울대교구 중고등학생 연합회 지도신부, 교포사목(미국뉴욕 Queens 한인천주교회, 1983), 미국 유학(Maryknoll School of Theology, Peace & Justice, M.A, 1884)을 거쳐 서울대교구 대학생 연합회 지도신부로 활동하였다. 그런 다음 신월동 본당주임(1990)을 시작으로 혜화동, 면목동, 개포동, 잠원동, 용산 본당 주임(2015)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현재는 서울대교구 원로사목 사제로 있다.

(필자 주): 가톨릭신문(1981.3.15.일자)에 의하면 한국 최초의 3형제 신부 탄생에 대하여 이와 같이 보도하였다. <믿음의 온상인 가정에서의 건전한 신앙생활과 2대에 걸친 부모의 기도가 한국 교회사상 보기 드물게 3형제 신부를 탄생시켰다. 한 가정의 형제로 사제로서의 부르심에 응답한 주인공은 서울대교구 소속 염수정(장위동 주임, 70년 서품), 염수완(해군 해병군종, 75년 서품), 염수의(명동 보좌, 81년 서품) 신부 등 3 형제이다. 이들은 잉태 때부터 사제로 봉헌할 것을 기도해 온 어머니의 소망을 최초로 채워 주는 것이었다. “자신이 선택한 길이 진실 된 인간의 길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있다.”는 염수정 신부 등 3형제 신부는 믿음의 온상이며, 기초 교회 공동체인 가정과 젊은이와 함께하는 사제의 영향력이 미래 교회에 보다 풍성한 사제성소를 낳게 할 것이다.>

(필자 주): <점점 커지는 신앙공동체> 추기경으로부터 받은 신앙이야기’(pp.84~86)에 의하면, 염 씨 집안의 장손인 염석진(시몬)의 외아들 염수만(마티아) 집안에서도 이후 사제와 수도자가 탄생하였다. 1967년 수만의 장녀 순자(루치아)가 대구 성 베네딕토 수도회에 입회한 뒤 아가페 수녀로 서원(誓願)을 하였고, 4남 동규(도미니코)는 살레시오 수도회에 입회 한 뒤 1985년 필리핀으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부제품을 받고 귀국하여 1992년 구로2동 본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어 염수만의 장자인 동헌(안드레아)의 장남 영섭(라우렌시오)은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재학 중이던 1984년 예수회에 입회하여 1997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한편 1992년에는 염 씨 17세손 염성모(라자로)의 증손녀 매자의 아들인 김순진(요셉)이 서울대교구 소속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19957월에는 3형제 신부의 큰 집인 염대진(라우렌시오, 염 추기경 큰 아버지이며 영세 대부)의 손자요 수봉(시몬)의 차남인 동국(루가)도 서울대교구 소속 사제로 서품되었고 손녀 수옥(아우구스티나)은 수녀가 된다. 이들 중에서 아가페 수녀와 동규, 동국, 순진 신부와 수옥 수녀는 모두 염 추기경의 조카뻘이 되며, 영섭 신부는 손자뻘이 된다. 이러한 기록들은 순교자의 후손이며 성직자인 염 추기경 가정의 신앙공동체라고 지칭할 수 있겠다.

(필자는 1957년 고등학생 때, 안성 삼죽면 미장리 공소에서 가을 판공성사(의무 고해성사)가 있을 때, 교장신부 겸 본당신부이신 박성춘 레오 신부님의 복사로서 미장리 공소 교적부와 미사 짐을 들고 수행한 적이 있었다. 당시 가을 판공미사를 준비하고 신자들을 지도한 분은 추기경의 큰 아버지이며 세례 때 대부(代父)인 염대진 공소회장이었다.)

 

(다음에 계속)

 

박종권 전 천주교 수원교구 안성성당 사목협의회 총회장

안성시지(2011) 1권 역사와 지리 천주교 인물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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