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출신 염수정 추기경의 신앙이야기(1)-박종권의 사담기
안성출신 염수정 추기경의 신앙이야기(1)-박종권의 사담기
  • 시사안성
  • 승인 2023.08.05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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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 지난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시사안성을 통해 안성의 역사와 문화 관련 귀중한 글을 연재했던 박종권 선생님이 특별히 안성출신 염수정 추기경 인터뷰 내용을 정리해 주셨다.
박종권 선생님은 안성출신으로 오랫동안 안성에서 교편을 잡았을뿐만 아니라 천주교 안성성당 사목협의회 총회장을 역임하신 분으로 안성시지 1권 역사와 지리, 천주교 인물을 집필한 바 있으며, 본 지면에 “박종권의 사담기(사진에 담긴 이야기)”를 통해 안성관련 귀한 역사와 자료를 연재한 바 있다. 이번 염수정 추기경과의 인터뷰 내용 연재는 4회에 걸쳐 월1회 연재할 예정이다.

(필자 주) 이 글은 필자가 천주교 안성본당이 구성한 양협공소복원추진위원회’(이하 위원회) 위원 자격으로, 위원들과 함께 2022122일 오전 10시 서울 혜화동 주교관에서, 서울대교구장직을 이임하신(추기경은 종신직) 안성출신 염수정(廉洙政, 안드레아)추기경을 면담, 인터뷰하면서 기록한 내용이다. 필자는 천주교 박해시대에 신자들이 겪었던 순교이야기와 더불어, 추기경 가정공동체의 신앙 이야기 등 안성지역의 종교역사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믿어 대담 내용을 요약하여 시사안성에 기고한다.

염수정 추기경 인터뷰 모습(출처:2022. 12. 2일, 서울 회화동 소재 주교관에서 인터뷰 방문단 권** 위원이 촬영한 사진, 위원 공유) 자료를 보며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염 추기경(왼 쪽에서 두 번째)과 방문단 일행
염수정 추기경 인터뷰 모습(출처:2022. 12. 2일, 서울 회화동 소재 주교관에서 인터뷰 방문단 권** 위원이 촬영한 사진, 위원 공유) 자료를 보며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염 추기경(왼 쪽에서 두 번째)과 방문단 일행

안성성당(경기지방문화재 기념물 제82)은 설립 125주년(2025)을 앞두고 천주교 선조들의 신앙 발자취인 옛 교우촌 및 공소(公所) 터를 발굴하여 순교정신을 함양하기 위하여, 이를 추진할 위원회를 구성하여 1차적으로 양협 공소’(1933년 설립, 안성시 보개면 양복리) 터를 복원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이 공소 설립 이전에는 옹기 굽는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사는 교우촌 이었고, 1904104일에는 조선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가 당시 안성성당 공베르(Antoine Gombert, 孔安國) 신부와 함께 방문하였던 곳이다. (뮈텔주교일기3, 한국교회사연구소, 2008, p.368 참조)

안성성당에서는 작년 11월 초, 상기 위원회 명의로 염 추기경 비서실장 신부 앞으로 추기경 면담 요청과 함께 인터뷰 일정을 잡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의 공문을 발송하였다.

 

1. 추기경 면담 인터뷰 목적

1) 안성성당 설립 125주년(2025)을 맞이하여 순교자의 후손이신, 안성출신 염수정 추기경님 선대조(先代祖)의 천주교 박해시대에 겪었던 신앙생활의 증언을 청취, 기록하여 신자들의 순교정신을 함양하기 위함

2) 1900년대 추기경 선대가 거주하던 옹기마을 노루목 교우촌에 있었던 노루목 공소’(1916년 설립, 추후 미장리 공소로 변경, 안성시 삼죽면 미장리) 터와 추기경 생가를 확인하여 천주교 도보 성지순례 코오스로 개발하기 위함

2. 방문자 명단: *덕 위원(도보 성지순례 단장)4

3. 인터뷰 방법: 보내드린 별첨 질문지에 따른 추기경님 말씀 청취, 녹음, 기록 및 사진 촬영 및 관련 자료 요청

4. 소요 시간: 1시간 정도(시간 절약을 위해 가능하시면, 별첨 질문지 순서에 따른 답변 요지 또는 선대 가계 및 가족관계 인적 사항, 생존 연대 등을 미리 준비하여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 인터뷰 기록문 >>

필자와 함께 사진촬영에 응해 준 사제복장의 염 추기경(출처: 2022. 12. 2일 서울 회화동 주교관에서 인터뷰 방문단 권** 위원이 촬영한 사진, 이 날 염 추기경은 방문단 한 사람 한 사람과 함께 사진 촬영에 응해 주었다
필자와 함께 사진촬영에 응해 준 사제복장의 염 추기경(출처: 2022. 12. 2일 서울 회화동 주교관에서 인터뷰 방문단 권** 위원이 촬영한 사진, 이 날 염 추기경은 방문단 한 사람 한 사람과 함께 사진 촬영에 응해 주었다

(질문자 박종권): “존경하옵는 추기경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희 안성성당은 19001019일 프랑스 선교사 공베르 안토니오 신부님이 부임하시어 본당을 창설한지 125(2025)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를 대비하기 위하여 교회 역사를 새로 조명하고, 신앙의 뿌리가 박힌 옛 교우촌의 흔적과 안성 성당 공소 터를 찾아, 도보 성지순례 코오스를 개발할 예정입니다. 아울러 순교자의 후손이신 추기경님의 증언을 기록하여 신자들의 순교정신을 돈독히 하기위하여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바쁘신 가운데 귀중한 시간을 허락하여 주신 추기경님께 감사드립니다.”

(필자 주): 인터뷰 당시 염 추기경은 우리 일행을 따뜻이 맞이하시면서, 자신이 태어난 고향 안성(삼죽면 미장리)에 대하여 각별한 애정을 표현하였다. 또한 추기경이 출생 당시 세례 받았던(세례문서 보관) 안성성당 신자들이 이 곳을 방문해 준데 대하여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추기경은 미리 받아 본 여러 항목의 질문지에 답하기 위하여, 준비한 자료(파주 염씨 가계도)와 염 추기경의 생애를 다룬 책자(한 성직자 가정공동체의 신앙 이야기, 차기진, 2003, 빅벨출판사, 이하 인용 시 신앙 이야기로 표기)와 또 다른 참고자료를 책상위에 펴 놓고 인터뷰에 응하였다. 인터뷰가 끝난 다음에는 신앙 이야기책자와 추기경을 다룬 저서 몇 권을 건네주면서, 대담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못한 내용 들을 추가해서 답변 자료로 참고하도록 말씀하였다.

(염 추기경은 상기 신앙 이야기책자 서두에 있는 인사말에서 처음에는 집안 이야기라 망설임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사가 그랬던 것처럼 이 작은 이야기들이 모여 큰 교회사를 이룬다는 생각에서, 그 작은 이야기 속에서 우리 스스로 교훈을 찾을 수 있고, 그것은 또 다른 교훈이 되어 후손들에게 전해진다는 생각에서 이 책의 간행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염 추기경님은 인터뷰에 앞서 성호경과 시작기도를 주관하심>

의암공파 후손들의 첫 모임(출처: 염 추기경의 ‘신앙이야기’ p.5 사진  전재)/ 파주 염씨 의암공파 후손들이 1988. 5. 5일 진천 새울 가족 묘역에서 당시 염수정 사제 주관으로 위령미사를 드리고 있는 모습.
의암공파 후손들의 첫 모임(출처: 염 추기경의 ‘신앙이야기’ p.5 사진 전재)/ 파주 염씨 의암공파 후손들이 1988. 5. 5일 진천 새울 가족 묘역에서 당시 염수정 사제 주관으로 위령미사를 드리고 있는 모습.

(질문자): “먼저 추기경님 가정 공동체의 가계배경에 대하여 여쭙겠습니다. 여러 언론에서 거론된 추기경님의 프로필을 보면 순교자의 후손또는 옹기장이의 집안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추기경님의 선대는 언제부터 천주교회와 인연을 맺어 왔으며 박해시대의 신앙생활은 어떠하셨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염 추기경): <천주교와의 인연> “선대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은 파주 염 씨 중시조 15세손이신 염()자 덕()자 순()자 되시는 분이었다. 선조가 복음을 접하게 된 시기는 1822(순조 22) 무렵, 서울에서 거주할 때로 나이 54세였다고 한다. 당시 서울에서는 천주교 신자를 마구 잡아들이는 신유박해로 수많은 순교자들이 발생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는 온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어, 가족 4명이 함께 피신을 결심을 하게 된 것 같다.

그해 겨울, 서울을 떠나 처음 정착했던 곳은 염 씨들이 많이 산다고 들었던 충청도 옥천 화일리 마을이다. 그러나 막상 그곳에 가서 살다 보니 생계유지는 물론 천주교 교우촌이 아니어서 신앙생활을 마음 놓고 할 수 없을뿐더러 언제 누가 관가에 고발을 할지 모르던 차에, 한 옹기행상으로 부터 충청도 진천의 명심이(현 진천군 백곡면 명암리) 근처 사기장골에 옹기점이 있고, 그곳에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살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 때에 은밀하게 일러준 옹기 행상은 천주교 신자였거나 아니면 천주교에 호감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으로 믿고 있다.”

(염 추기경): <세례로 이어진 신앙공동체> “선조 염덕순은 피신해 간 충북 옥천 화일리가 여의치 않아서인지, 피신한 지 1년 반 후, 18245~6월경에 다시 가족들을 이끌고 천주교 교우촌인 진천 사기장골로 이주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그런 다음 일가족이 함께 이곳 교우들로부터 세례를 받게 되었는데 선조의 세례명은 요셉, 아내는 이 마리아, 외아들 염석태의 세례명은 베드로, 며느리는 김 마리아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선조 할머니(이 마리아)18248, 52세로 선종하였고, 3년 뒤인 18279월에는 선조 할아버지마저 59세의 일기로 선종하고 말았다. 선조의 외아들인 성덕공 염석태(베드로, 16세손, 추기경의 고조부)는 당시 나이 33세로, 부친이 선종하기 두 달 전인 18277월에 첫 아들(염성문, 요셉)을 시작으로 둘째 염성모(라자로), 셋째 염성수(루도비코) 등 세 명의 아들을 두게 되었다. 막내 염성수 루도비코는 저의 증조부가 되며, 염재원 요한(조부), 염한진 갈리스도()로 대를 이어가며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필자 주): ‘신앙이야기'(p.20)에 의하면, 충북 진천군 이월면 신계리의 새울에 건립(1988)<의암공 유적비 비문>에 선조 염덕순이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된 과정, 그가 천주교 교리를 받아들여 실천하기로 하고 서울을 떠나 충청도 옥천과 진천으로 피신하던 과정, 사기장골 교우촌에서 온 가족이 함께 세례를 받기까지의 과정들이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 파주 염 씨 15세 의암(義岩) 덕순공(德舜公)께서는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 춘추관(春秋館) 수찬관(修撰官)으로 신학문을 학구적 호기심과 지적 탐구욕으로 연구 중 천주 교리에 심취되었다. 사당(祠堂) 훼철과 제사폐지는 유교 국가에서 허용되지 못하고, 조정에서 이를 서교(西敎) 동침(東侵)의 사교(邪敎)’라 규정하여 법으로 엄금하며, 천주교에 대하여 혹독한 박해로 무수한 신자들이 학살당하였다. 신유사화(辛酉邪禍) 이후 수차 박해가 있었으나 금할수록 만연되는 천주교를, 헌종(憲宗) 왕은 철저히 금하려고 척사윤음(斥邪)을 내리고, 오가작통(五家作統)이라는 법까지 마련하기에 이르러, 의암공이 남인 명사로 신학문을 연구 중인 것을 알고 증거를 포착하고자 공의 일거일동을 감시하게 되니, 공은 야반을 이용하여 가족을 데리고 182211월 옥천군 용호리로 피신하셨으나, 그곳 역시 관헌들의 손길이 뻗치어 신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는 진천군 백곡면 명암리 사기장골 옹기마을로 피신하시어 의암공은 요셉으로, 석태공(奭泰公)은 베드로로 영세를 받으셨다. >>

염 추기경 조부 염재원 요한의 회갑 기념으로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출처: 신앙이야기 p.68 사진 전재) 1934. 3. 7일 찍은 회갑 사진에서, 앞 줄 가운데 갓을 쓴 분이 염재원 요한.
염 추기경 조부 염재원 요한의 회갑 기념으로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출처: 신앙이야기 p.68 사진 전재) 1934. 3. 7일 찍은 회갑 사진에서, 앞 줄 가운데 갓을 쓴 분이 염재원 요한.

(염 추기경): <옹기점 운영> “고조부(염석태, 베드로)는 사기장골에 살면서 아내 마리아와 함께 타당하게 수계(守誡)생활을 하였으며, 자식들에게도 열심히 교리를 가르치고, 비밀리에 복음을 전하는데 노력하면서 평온한 세월을 보낼 수 있었다. 또 그곳 교우들로부터 옹기 굽는 법을 배워 옹기점을 운영하면서 생계를 꾸려가기 시작하였다. 염 씨 집안의 옹기 기술은 이때부터 시작된 셈이었다. 고조부의 아들 삼형제가 장성한 뒤에는 모두 옹기 장사로 활동하면서 교회 소식을 듣거나 신앙을 전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자들 박해가 계속되고 있던 시국에 천주교 신앙을 증오하여 고발하고자 호시탐탐하는 무리들은 언제 어디서나 신자들을 노리고 있던 판국이었다.”

(필자 주): 옹기장이와 숯쟁이의 신앙은 오늘의 교회를 있게 해준 징검다리 역할을 해 왔다. 좋은 점토와 나무를 찾아 이 지역 저 지역으로 떠돌아다니면서도 가정공동체의 신앙을 굳게 지킨 그네들이었다. 여기에서 잠깐 한국 천주교회의 옹기점 문화에 대하여 알아보겠다. 천주교 신자들이 옹기점을 운영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박해시대 초기부터였다. 옹기점 운영은,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관헌들에게 쫓겨, 이곳저곳으로 피신해야만 했던 교우들에게 중요한 생계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또 옹기를 팔기 위해 여기저기로 다니는 동안 다른 교우들을 만나게 되거나, 새 교우촌을 알게 되었고 그들로부터 새로운 교회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그동안 옹기점이나 숯 점 등에서 숨어 사는 여러 교우촌 신자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점 조직과 같은 연락망으로 연결될 수 있었고, 이러한 연락망 때문에 성직자(프랑스선교사)가 어느 지역을 순방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모두가 천주교 공소로 설정된 교우촌으로 암암리에 들어가 고해성사를 보고 미사에도 참례할 수 있었다. 이 밖에도 옹기 장사는 새로운 신앙을 찾는 이들을 만나 복음을 전해주는 선교 수단도 될 수 있었다. (신앙이야기 p.13, p.29 참조)

(염 추기경): <체포와 순교> “그러던 중, 18505월 중순 사기장골 옹기마을에 천주교 신자들이 집단으로 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관가에서 몰래 보낸 수십 명의 포졸들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고조할아버지(염석태 베드로)와 고조할머니(김 마리아) 두 분은, 동네 옹기마을 천주교 교우촌에 사는 신도 수십 명과 함께 체포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러나 아들 3형제 중 다행히 장남, 차남은 옹기 팔러 나가서 집에 없었고, 막내아들은 어려서인지 잡혀가는 화를 면하게 되었다. 이튿날 집에 돌아온 형제들은 너무나 놀랐고, 또 언제 포졸들이 들이닥쳐 자신들까지 잡아갈지 몰라서 그 날 밤으로 몸만 빠져나와 다른 곳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 자식들이 수소문 해 본 결과 아버지 어머니는 진천 감옥에 수감되었는데, 당시 천주교 신자는 중죄인이라서 바로 안성 죽산 도호부 감영으로 이송되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죽산 감영에서는 두 분에게 천주교를 배교할 것을 압박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였고, 4개월여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굴복하지 않자 참수형이 선고되어 그해 930, 안성 죽산 사형 터에서 참수 당하여 순교하셨다고 전해지고 있다.”

천주교 신자들의 교우촌 위치도(출처: 동 신앙이야기 p.33) 충북 진천 ‘사기장골’과 ‘새울’ 교우촌의 위치가 안성시 삼죽면 미장리 ‘노루목 교우촌’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천주교 신자들의 교우촌 위치도(출처: 동 신앙이야기 p.33) 충북 진천 ‘사기장골’과 ‘새울’ 교우촌의 위치가 안성시 삼죽면 미장리 ‘노루목 교우촌’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질문자): “추기경님께서 서임(敍任)되셨을 당시 <안성출신 천주교 추기경 탄생>이라는 경축 현수막이 안성성당과 안성지역 요소요소에 걸린 적이 있습니다. 또한 지역 언론에서도 큰 관심을 갖고 염수정 추기경에 대한 보도를 한 바 있습니다. 추기경님의 집안은 언제부터 안성으로 오시어 살게 되셨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염 추기경): <선대 가족 번성>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고조할아버지(염석태 요셉) 내외분이 진천 사기장골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된 후 안성 죽산 감영으로 이송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참수 당한 이후부터 남은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3형제는 모두 장성해 가족을 이루고 살면서 천주교 신자들이 옹기점을 운영하는 교우촌 마을로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고생을 겪은 것으로 전해 들었다. 선대 조 집안은 특히 증조할아버지(염성수 루도비코) 때부터 많은 후손이 나오면서 가족이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저에게는 조부가 되시는 장남 재원(요한)과 차남 재실에게서 다시 많은 후손이 나오면서 집안이 크게 번창하였다. 특히 장남 재원은 밀양 박씨(막달레나)와 혼인하여 상진(아우구스티노), 승진(가밀로), 대진(라우렌시오), 한진(갈리스도) 네 아들을 탄생시켰다. 그러니까 장남(염재원)은 저의 조부가 되시고, 막내아들(염 한진)은 저의 부친이 되신다.”

<안성 노루목으로 이주> “우리 집안이 안성으로 오게 된 것은 할아버지(염재원 요한)때 부터이다. 할아버지는 42세 때인 1916년 가족들을 이끌고 새로운 지역을 찾아 이주하기로 결심하였다. 가족이 늘어 난데다가, 살고 있던 오감(경기 여주) 점말 일대의 점토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 때 여주 점말을 떠나 처음 도착한 곳은 당시 경기도 안성군 삼죽면에 위치한 참나무정이(진촌리) 교우촌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 가족은 여기에 정착하지 않고, 새 옹기점을 운영할 마땅한 곳을 찾아 곧바로 이주하게 된다. 그곳이 바로 참나무정이에 인접해 있는 노루목 교우촌옹기점(현 안성시 삼죽면 미장리 337번지)이었다.”

 

(질문자): “추기경님의 조부모님께서 안성 노루목 교우촌으로 이주해 왔을 당시에 안성 성당 설립자이며, 초대 주임 공베르 신부(재직기간 1900~1932)와의 인연에 대하여 전해 들으신바가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염 추기경): <‘노루목 공소의 탄생> “안성성당은 190010월 충청도아산의 공세리 본당에서 분리 신설된 본당으로, 초대 주임은 그 해 9월에 조선에 입국한 공베르 신부였다. 이 후 공베르 신부는 한국말을 채 배우기도 전인 19001019일 안성 공소에 부임하였는데, 당시 이곳에는 드비즈(Devise, 成一論) 신부가 마련해 놓은 기와집 성당(19009월 낙성)이 있었다. 공 신부 부임 당시에는 관할지역에 바울 공소’(안성 미양면 마산리), ‘선바위 공소’(안성 금광면 오산리), ‘돌실 공소’(천안시 직산면 석곡리), ‘갈전리 공소’(안성 미양면 갈전리) 등 오래된 공소들이 있었다.

1916년 여름, 조부(염재원 요한)는 안성 노루목에 정착하자마자 안성성당 공 신부를 찾아가 가족의 이주 사실을 보고 드리는 것과 동시에, 본당의 공소 순방 시에 노루목을 방문해 주십사하고 요청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공베르 신부는 이 요청을 받아들여 1916~1917년의 가을, 봄 판공(判功)시에 노루목을 방문하여 고해성사를 주고 이곳을 정식 공소로 설정하였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확인하였다.”

(필자 주): 염 추기경 가족의 신앙을 다룬 신앙 이야기에 의하면, 노루목 공소는 안성본당 공베르 신부의 1915~1916년 교세 통계표에 나타나지 않다가 1916~1917년 교세 통계표에 처음 나타나는 기록으로 보아, 1916년 처음으로 노루목 공소가 설정된 것을 증명하고 있다. 기록에 교우 수가 28명으로 보고가 되었는데, 이것은 이주해 온, 염 추기경 조부의 가족과 옹기점에서 일하는 일꾼 신자들로 공소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p.64 참조)

초대 공소 회장으로는 교우촌 옹기점 주인이면서 염 씨 집안의 어른인 조부 염재원 요한이 임명되었다. ‘노루목 공소는 해가 갈수록 교우 수가 늘어나 1920~1921년 교세통계표에 보면 102명에 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당시 공소회장의 선교 노력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염 추기경 조부가 노루목에 정착한 지 5년쯤 후에 이렇게 옹기점 공소가 커졌다면, 가족의 경제생활도 이 무렵에 이르러 안정된 상황에 이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상기 신앙 이야기’(p.65)에 의하면 추기경 조부 염재원은 1928년에 장남(염상진 아우구스티노), 차남(염승진 가밀로) 등 가족과 함께 옹기점 일꾼들을 이끌고 노루목을 떠나 안성의 건지뫼 옹기점’(현 안성시 대덕면 건지리)으로 이주하였다. 반면에 3(염대진 라우렌시오, 염 추기경 백부이며 유아세례 때 대부)과 막내(염한진 갈리스도/추기경 부친) 가족은, 삼죽면 미장리에 있는 노루목 교우촌에 그대로 남아 이웃들과 함께 살게 된다. 염 씨 가족의 거주지가 안성에서 두 지역으로 나뉘면서 그만큼 천주교 복음 선교의 폭도 넓어지게 된 것이다. (다음 회에 계속)

 

박종권 전 천주교 안성성당 사목협의회 총회장 (안성시지 1권 역사와 지리, 천주교 인물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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