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법학교(安法學校) 설립과 운영에 관한 이야기
안법학교(安法學校) 설립과 운영에 관한 이야기
  • 시사안성
  • 승인 2018.08.20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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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권의 사진에 담긴 이야기 - 16
설립자 공안국(孔安國)신부(사진; 안성성당 100주년 기념관 소장)/ ‘사립공교(公敎)안법학교’ 설립자인 안토니오 공베르(Antonie Gombert)신부이다. 1900년 안성성당 도착 당시의 공신부는 프랑스 외방선교회 소속으로 2살 아래 동생 쥴리앙 공베르(Julien Gombert 孔安世)신부와 함께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설립자 공안국(孔安國)신부(사진; 안성성당 100주년 기념관 소장)/ ‘사립공교(公敎)안법학교’ 설립자인 안토니오 공베르(Antonie Gombert)신부이다. 1900년 안성성당 도착 당시의 공신부는 프랑스 외방선교회 소속으로 2살 아래 동생 쥴리앙 공베르(Julien Gombert 孔安世)신부와 함께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안법학교>란 초등과정의 사립 공교(公敎=가톨릭) 안법학교안법중학교’ ‘안법중고등학교’(병설) ‘안법고등학교를 통 털어서 일컫는 말이다.

안법학교의 역사는 천주교 안성성당의 역사와 떨어뜨릴 수 없는 운명이다. 프랑스 외방선교회 소속 선교사인 공베르(A. Gombert/한국명 孔安國)신부가 190010월에 안성 구포동에 있는 통진군수를 지낸 백()씨가 살고 있는 한옥을 구입하여 숙소 겸 성당으로 자리 잡게 되면서부터이다.

천주교 조선교구가 선교지로 경기도 안성을 지목할 수밖에 없었던 종교적 환경에 대하여 궁금하던 차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선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주교(사진; 뮈텔주교일기2, 한국교회사연구소 자료실)/ 1890년 제8대 천주교 조선교구장을 지낸 뮈텔(Gustave Charles Marie Mutel)주교가 명동성당주교관 난간에서 찍은 사진이다. 민주교는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한국교회를 이끌어간 분이다
조선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주교(사진; 뮈텔주교일기2, 한국교회사연구소 자료실)/ 1890년 제8대 천주교 조선교구장을 지낸 뮈텔(Gustave Charles Marie Mutel)주교가 명동성당주교관 난간에서 찍은 사진이다. 민주교는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한국교회를 이끌어간 분이다

 

1890년 천주교 조선교구장에 임명된 뮈텔(Mutel, 閔德孝)주교는 1900115일자 일기에서 오늘 아침에 우리는 각자 자기 방향으로 가기 위해 헤어졌다. 부이용(Bouillon)신부는 집으로 돌아갔고, 드비즈(Devise, 成一論/*충남 아산 공세리 주임)신부와 나는 안성 양촌(陽村)으로 떠났다. 우리는 우선 옥정(玉井)리로 가는 작은 길로 들어섰고 이어서 안성읍에 이르는 골짜기로 내려갔다.”(뮈텔주교일기2, 한국교회사연구소, 1993)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공안국 신부가 안성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조선교구에서 안성을 선교지로 지목하고 신자들이 모여 사는 여러 공소(公所;사제가 없는 가톨릭 공동체)를 순회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공()신부가 안성에 도착했을 때의 상황을 공신부 일기자료에서 찾아보았다. 공신부는 내가 거처하는 곳이며 성당으로 쓰이기도 하는 오래된 집에서 겨우 1개월을 지냈을 때 주민들이 나를 거슬러 술렁이고 있음을 알았다. 사람들은 여러 차례 모임을 갖고 모임에서 내 목에 현상금을 걸었고 나의 거처는 파괴시켜 버리기로 결정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렇듯 얼굴이 다른 서양사람 공신부가 낯 선 이국 땅 한국 안성에 와서 자리를 잡게 되기까지는 결코 순탄치만은 아닌 것으로 볼 수 있다. 공신부의 선교사업과 구국의 교육사업은 자칫 수포로 돌아갈 뻔 했던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공안국 신부가 안성본당에 주임신부로 부임할 당시의 시국은 대한제국의 국권이 날로 기울어지던 시대였다. 1904년 일본은 한일합방을 강요하였고 결국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주권이 일본으로 넘어가면서 의병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1908년에는 의병 운동의 절정기였고 안성에서만도 일곱 차례나 의병운동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다.

공신부는 나라를 되찾기 위한 의병활동의 한계와 당시의 암울한 교육여건을 보면서 더더욱 교육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했을 것으로 보여 진다.

당시 서울을 중심으로 사립학교가 활발히 설립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안성의 유지들은 시대적 고민과 학교 설립의 당위성을 공신부에게 하소연하게 되었다. 1908년 가을에는 학교 설립 제안을 수락하게 되었다고 한다(안법100년사, 안법고등학교, 2009).

1909115, 드디어 공베르 신부의 교육에 대한 열정으로 사립학교인 안법학교가 설립되었다. 성당 내 임시 교사에서 개교식을 거행하였으며 이때 공안국신부는 초대교장으로 취임하게 되었으며 당시의 전교생은 남학생 25명이었다.

정식 학교 교명은 사립공교 안법학교(私立公敎 安法學校)’라고 칭하였다. ‘공교(公敎)’는 가톨릭을 한역한 것이고, ‘안법(安法)’은 안성의 자와 설립자의 국적 프랑스=법국(法國)자에서 유래된 것이다.

‘사립안성공교(公敎,가톨릭)’ 안법학교 교직원과 학생들(사진; 안성성당 소장)/ 1912년경 안법학교 교직원과 남녀학생들이 천주교 경당(經堂)에서 찍은 사진이다. 경당은 정식 성당이전의 전례를 거행하던 곳이다(당시 교실로 사용하던 지금의 100주년기념관 자리). 교직원중 공신부, 김태영선생, 배베로니카수녀, 정알퐁소수녀가 보인다
‘사립안성공교(公敎,가톨릭)’ 안법학교 교직원과 학생들(사진; 안성성당 소장)/ 1912년경 안법학교 교직원과 남녀학생들이 천주교 경당(經堂)에서 찍은 사진이다. 경당은 정식 성당이전의 전례를 거행하던 곳이다(당시 교실로 사용하던 지금의 100주년기념관 자리). 교직원중 공신부, 김태영선생, 배베로니카수녀, 정알퐁소수녀가 보인다

개교 당시 학교는 10평 남짓한 작고 허름한 교실(현재의 안성성당 수녀원 자리)이었으나, 공신부는 당시 학교가 세워지니 아이들이 넘쳐 났다며 좋아했었다고 한다. 시대적 요청에 따라 국권 회복이 중요했었던 만큼, 주요 과목은 국어와 역사였으며 학생 수가 증가하면서 점차 학년제와 학급제를 도입하게 되었다. 하지만 초창기 10여 년 간은 학생들이 2, 3학년 정도 수료하고 나면 대부분 공립학교로 전학하게 되는 실정이었다고 한다.

설립 4년째가 되던 1912년에는 서울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의뢰하여 여자부 교육을 시작하여 안성지역의 첫 여성교육의 개척자가 되었으며, 첫 부임한 수녀는 배 베로니카 수녀와 정영순 알퐁소 수녀가 초빙되었다(백년에서 다시 백년으로, 천주교수원교구 안성성당, 2000. 10).

시대적으로 일제 강점기인 1919년 기미년 31, 전국적으로 민족 독립운동이 벌어진 날에는 안성에서도 대대적으로 만세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공신부는 우선 일본인에게는 해를 입히지 말고, 시설 파괴, 방화 등은 절대 하지 말라며 비폭력 평화운동을 전개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한 때 안법학교는 학교를 폐교하려고까지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우선 3. 1운동 나던 해는 조선에 큰 흉년이 들어서 그 이듬해 봄에는 굶는 사람이 많이 생겼다고 하고 있다. 공신부는 만주 좁쌀 70여 포대를 사다가 굶주린 시민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또한 부모 잃은 고아들을 거두어 친히 기르기도 하였고 신자 집에 위탁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빈민 구제와 고아 양육하는 사이 학교는 운영난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학교 설립에 후원했던 신자 박승육씨는 교사 1인분의 월급을 3년간이나 후원하였고 당시 교사로 있던 김태영(전 안청학원 설립자)씨와 동아일보 분국장 김중묵(마르꼬, 공신부 복사服事, 안성 3.1운동 지휘자)씨 등이 주도한 후원회에서 많은 성금을 모으기도 하는 바람에 숨통을 열게 되었다(육필원고 안성천주교회사, 윤정중, 1980).

1920년은 공신부 사제서품 20주년이 되는 해에 전 신자들이 모여서 기념식을 가졌으며 안성성당의 숙원 사업인 성당을 내 손으로 짖자는 신자운동이 일어나는 해이기도 하였다. 신자들은 박해시대에 쫓겨 다니며 신앙을 지켰던 추억을 되살려서 소를 팔자, 땅을 팔자, 성금을 내자, 성당을 짓자고 하면서 적극 지원에 나선 결과 19228월에 드디어 안성성당 준공을 갖게 되는 경사를 맞이하게 되었다.

공안국 신부 일시 귀국(사진; 안성성당 소장)/ 1926년 3월19일 안성 기차역에서 찍은 사진이다. 1년전 사제서품 25주년 은경축(銀慶祝) 휴가차 본국을 방문하였다가 안성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또한 분의 서양신부는 같은 해 은경축을 맞이한 동생 쥴리앙신부 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교직원 김태영선생 등이 맞이하러 간 모습이 보인다
공안국 신부 일시 귀국(사진; 안성성당 소장)/ 1926년 3월19일 안성 기차역에서 찍은 사진이다. 1년전 사제서품 25주년 은경축(銀慶祝) 휴가차 본국을 방문하였다가 안성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또한 분의 서양신부는 같은 해 은경축을 맞이한 동생 쥴리앙신부 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교직원 김태영선생 등이 맞이하러 간 모습이 보인다

공신부가 본국을 떠나 이곳에 온 지 26년이 지난 1926년에는 일시 귀국을 하기도 하였으며, 1927년엔 동아일보사로부터 교육공로 표창과 1929년 안성시민의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1932년에는 공신부 전근이라는 청천벽력이 안성성당 신자들에게 내려져 실로 단장(斷腸)의 이별을 하게 된다.

1936년 공신부 보좌로 있던 이복영(李福永 요셉)신부가 부임하면서 학교 교실을 즉시 근대식으로 신축하고 운영 설비도 충실하게 갖추게 되었다. 학교 확장 공사를 시작하여 지금 안법유치원 자리에 교실 두 칸(40)을 신축함으로써 공립학교와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되었으며, 이듬해 1937년에는 운동장 공사(현재 안성성당 광장 및 주차장 자리)를 완성하였으며 추가로 교실 세 칸(75)을 증축(현재 안법 유치원 자리)하면서 어엿한 보통학교(초등학교)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100년사 참조).

안법학교는 여러 차례 학제를 개편하면서 1938년에는 학교 명칭이 안법심상소학교1942년에는 안법국민학교로 바뀌게 된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정부 수립 과정에서 교육법이 만들어지고 학제가 6,3,3,4제로 바뀌면서 초등은 의무교육이 되자, 당시 주임신부로 부임한 김재근(金滓根 토마스)신부는 안성 지역사회의 요망에 따라 40여년 역사의 안법학교를 중학교로 개편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벽돌가마에서 일하는 신자들 모습(사진; 안성성당 소장)/ 1947년 안법중학교 건물을 짓기 위해 나선 안성성당 신자들이 지금의 당왕동(성요셉병원 자리) 언덕에 있던 벽돌가마에서 벽돌을 옮기고 있는 모습이다
벽돌가마에서 일하는 신자들 모습(사진; 안성성당 소장)/ 1947년 안법중학교 건물을 짓기 위해 나선 안성성당 신자들이 지금의 당왕동(성요셉병원 자리) 언덕에 있던 벽돌가마에서 벽돌을 옮기고 있는 모습이다

100년사에서는 194741일 천주교 서울교구(당시엔 안성성당이 서울교구 소속이었다)유지재단 명의로 4년제 6학급의 안법초급중학교’(교장 김재근 신부)로 인가를 받아 그해 8월에 첫 입학고사를 실시하여 첫 번 째 신입생 2학급 100명의 학생을 선발하였다. 95일에는 재단이사장인 노기남(盧基南)주교(후에 대주교 승격)와 지방 유지들 참석 하에 개교식 겸 입학식을 거행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안법중학교 승격으로 1946년 가을부터 신자들이 기금운동을 전개하여 쌀 백가마를 모았다. 신자 1500명이었던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상당히 많은 양을 모금한 것이다. 학교를 확장하기 위하여 토지를 매수하고 1947년 가을부터 운동장(현재 고등학교)을 닦기 시작하였으나 예상 이상의 난공사였다고 한다.

우리 교회 사업인 우리 학교 일은 우리가 하겠다는 정신으로 신자들이 분발하여 매일 현장에 나와 일을 했다. 그 때는 불도저도 없이 신자들이 일일이 흙을 퍼내어 레일을 깔고 트럭에 옮겨 실어냈다. 하고 또 일하고 밀고 또 밀어내며 공사를 추진했다. 특히 촌 공소에서 찬밥덩이를 싸가지고 와서 긴긴 봄날 온 종일 늦게까지 일함은 감격적인 장면이었다. 신자들은 실로 성당을 지은 후 처음으로 발휘한 열성이었다(동 천주교회사 참조).

1951년부터는 안법중.고등학교병설로 운영되었다. 1년 전부터 시작한 고등학교 신축공사는 6. 25전쟁이 일어나면서 재정적으로 더욱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박정남 원로교육자(안법 1)1950년 현 교정에 신축 중이던 벽돌 건물(1차분 4개 교실)은 기초에서 1m 이상도 올리지 못한 채 6. 25로 쑥대밭이 되었다고 당시의 어려움을 회고하였다. 현재의 성당자리 학교 건물인 칸막이 교실은 포화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학교 교실 증축이 시급했지만, 전쟁으로 물자와 장비는 고갈되었고 동력이라고는 사람의 노동력 즉 인력밖에는 없었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어린 학생들에게 등짐을 지게 했을까 의아했다고 한다.

학교는 지금 당왕동(성요셉 병원자리) 논바닥에 움막을 치고 흙벽돌을 찍어 구어 내, 5장씩 새끼줄로 묶어 쌓아놓으면 학생들이 체육, 교련시간에 10장씩 등짐으로 운반했다. 어느 땐 전교생이 개미 줄지어 가듯 벽돌을 나르기도 했는데, 양 어깨에 새 알 걸머지듯 메고 가다가 벽돌이 떨어져 발뒤꿈치를 찍기도 하고, 어떤 학생은 한번에 20장을 자전거에 싣고 가다가 펑크를 내기도 했다. 벽돌 한 장에 3kg씩 만 쳐도 60kg 되는 상당히 무거운 짐이었다. 아마 어린 학생 마음에 우리 학교를 우리 손으로 지어야겠다는 애교심의 발로가 아닌가 생각된다.”고 재학생 당시의 일을 증언하고 있다.

양손으로 벽돌 나르는 안법고등학교 학생들(사진; 안법고등학교 홈페이지)/ 1950년 전 후 안법고등학교 신축공사에 사용할 흙벽돌을 당왕동 벽돌가마에서 양손에 들고 학교로 옮기기에 나선 학생들의 이색적인 행렬이다. 기록을 보면 한 장에 약 3kg 정도 되는 벽돌이라, 애교심의 열정적인 마음 없이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된다
양손으로 벽돌 나르는 안법고등학교 학생들(사진; 안법고등학교 홈페이지)/ 1950년 전 후 안법고등학교 신축공사에 사용할 흙벽돌을 당왕동 벽돌가마에서 양손에 들고 학교로 옮기기에 나선 학생들의 이색적인 행렬이다. 기록을 보면 한 장에 약 3kg 정도 되는 벽돌이라, 애교심의 열정적인 마음 없이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된다

1954년에는 지금의 본관 자리에 학생들의 땀을 모아 신축교사를 준공하였고 1959년에는 지금의 신관 자리에 기다리던 강당을 준공하였다(그러나 후에 시설이 낙후되어 신축된 본관은 1995년에 철거되었고 어렵게 마련한 강당 역시 시설이 노후되어 2002년에 철거되고 말았다).

1956년부터 1970년까지에는 차차 중학교 학급 증설로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으나 중학교 무시험 진학제(1969), 고교 평준화 정책(1974)등 교육개혁으로 안법중.고등학교는 또다시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이유는 중학교를 학생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청에서 배정했기 때문이다. 1951년부터 중.고 병설로 운영해 오던 중등교육사업은 고등학교만의 내실화를 집중하기 위하여 중학교 폐교를 고민하게 되었다. 또한 1980년대에는 농.어촌 지역의 중학교가 의무교육으로 추진되면서 안법중학교는 사립 재단의 설립목적과 특성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이로써 안법중학교는 19852월 제 36회 졸업생까지 총 6,577명을 배출하고 결국 폐교하게 되었다(100년사 참조).

안법 중.고등학교 시기에 있었던 가장 주목할 점은 19604. 19혁명이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도보로 서울로 올라간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당시 1960723(토요일)자 경향신문에 게재된 기사를 옮겨보겠다.

 

<安城서 또다시 蹶起-登錄復舊決定興奮> 다수의 안법고교(安法高校)생들은 二十二日 낮 네시 三十분쯤 읍내 시장 한복판에 있는 화신약국 지붕위에 올라가서 우리가 죽든지 자유당이 죽든지 끝장을 내겠다고 시민들에게 호소했다. 이 학생들은 반혁명분자로 그들이 규탄하여 입후보를 사퇴한 오(吳在泳)씨의 등록취소가 무효라고 단정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결정에 극도로 분격했다. 학생들은 二十三日 아침 아홉시 三十분부터 안성공원에서 자유당 비판대회를 열기로 결의했는데 그들은 이제 오재영 개인보다도 자유당 전체를 쳐부수어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후속 기사를 보면, 안법중고생 628, 걱정이 되어 나선 학부형 146명은 도보로 24일 새벽 1시 서정리에 도착하자, 학생 5명이 졸도하여 중태에 빠지자 고1, 2학년 학생들은 기차를 이용하게 되었고 3학년 학생들은 도보로 수원에 도착하여 서울 농대학생들의 격려를 받는다.

3일간 신문에 계속 중계 되다시피 하면서 학부모들의 트럭 3(후에 1대는 부상학생을 싣고 안성으로 되돌아온다)와 안성도립병원 구호차가 따르는 가운데 결국 24일 오후 4시에 서울 중앙선관위 앞에서 비를 맞으며 연좌농성에 돌입하여 결국 오재영씨의 사퇴를 받아내어 승리하게 된다.

안법고등학교는 1987년부터 현재까지 남녀공학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천주교 수원교구 학교법인 광암학원(曠菴學園)’(‘광암은 이승훈, 정약용 등과 함께 1784년 한국천주교 창립 주역, 이벽(李壁, 세례자 요한, 1754~1786)의 호를 딴 것임)에 소속되어 있다.

1950년대 안법중고등학교 건물과 느티나무(사진; 안법고등학교 홈페이지)/ 1954년에 준공된 중고등학교 본관 건물과 1959년에 준공된 강당 모습이다. 운동장에는 100년 역사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우뚝 솟아 있는 느티나무의 우람한 모습이다. 노후 된 본관건물은 1995년에, 강당은 2002년도에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현대식 건물과 강당을 신축하여 현재 사용하고 있다. 느티나무는 현재 운동장 서편의 축대 아래에 있는 구포동 쉼터자리에  ‘650년(1981년 지정) 경기안성 나무 1호’로 보호되고 있으며 같은 종류의 느티나무는 현재 안성성당과 안성교육지원청 자리에 서서 힘겹게 안성을 지키고 있다
1950년대 안법중고등학교 건물과 느티나무(사진; 안법고등학교 홈페이지)/ 1954년에 준공된 중고등학교 본관 건물과 1959년에 준공된 강당 모습이다. 운동장에는 100년 역사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우뚝 솟아 있는 느티나무의 우람한 모습이다. 노후 된 본관건물은 1995년에, 강당은 2002년도에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현대식 건물과 강당을 신축하여 현재 사용하고 있다. 느티나무는 현재 운동장 서편의 축대 아래에 있는 구포동 쉼터자리에 ‘650년(1981년 지정) 경기안성 나무 1호’로 보호되고 있으며 같은 종류의 느티나무는 현재 안성성당과 안성교육지원청 자리에 서서 힘겹게 안성을 지키고 있다

올 해로 안법고등학교는 설립 109년을 맞이하게 된다. 조선 후기에 설립된 이래, 일본 식민지시대, 6. 25전쟁, 정부 수립 후 수차례의 교육개혁 속에서도 수능 전국 인문계 수석을 배출하는 등 명문 고등학교로서의 입지를 굳건히 다지고 있다. 이제 안법고등학교는 또다시 100년을 준비하는 원대한 꿈을 가져야 한다.

지금으로부터 118년 전 1900년에 저 멀리 프랑스에서 안성이라는 낯선 곳에 와서 인재 육성을 위해 교육의 장을 열었던 앙뚜안 공베르(Antoine Gombert, 孔安國) 신부를 가슴에 품고 다시 세상을 향해 비상(飛翔)해야 할 것이다.

 

박종권(교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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