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앙사(景仰祠)
경앙사(景仰祠)
  • 시사안성
  • 승인 2018.07.11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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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환일의 해주오씨 정무공파 이야기 – 덕뫼에서 세거 500년 – 10
경앙사(안성시 향토유적 36호)
경앙사(안성시 향토유적 36호)

이곳은 조선 후기의 거유(巨儒) 오희상, 전우, 오진영 세 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1964년에 오진영의 제자들이 스승의 학덕을 기리고 매년 춘제(음력 310)를 드리기 위하여 양성면 덕봉리 해주오씨 종산에 세웠다.

노주 오희상(老洲吳熙常, 1763년 영조 39 ~ 1833년순조 33)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대제학 오재순의 아들로 예조판서 오재소에게 입양되었다. 어려서부터 형 오윤상에게 수학하였으며, 노주의 학문의 방법은 자수자득(自修自得)을 주로 하여 성리학의 깊은 뜻에 정통하였다.

노주는 1800(정조 24)에 천거로 세자익위사세마가 되고 계속하여 정릉참봉, 돈녕부참봉, 한성부주부, 황해도도사 사어등을 역임하고 그 후 경연관, 지평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광주 징악산에 은거하였다.

조정에서 계속하여 지평,장령, 집의, 승지 및 이조, 형조, 공조의 참의, 세손부 찬선 등에 임명했으나 모두 사퇴하고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그의 학문은 이황과 이이의 양설 중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절충적 태도를 취하였으나 주리설과 주기설에 있어서는 주리설을 옹호하는 편이었다. 70세로 사망하자 조정에서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시호로 문원(文元)을 내렸다. 저서로는 독서수기, 노주집등이 있다.

간재 전우(艮齋田愚, 1841년 헌종 7 ~ 1922)는 조선후기의 거유로 전주에서 태어났으나 부친을 따라 상경하여 임헌회(任憲晦)를 만나 사제의 의를 맺고 그가 죽을 때까지 여러 곳으로 함께 따라다니며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의 학문적 명성이 알려지자 1882(고종 19)부터 조정에서는 선공감가감역, 강원도사, 순흥부사, 중추원찬의 등을 제수했으나 모두 사퇴하고 산림에 묻혀 오직 학문 연구와 후학 교육에만 힘썼다.

그는 철저한 보수적 성리학자로 당시 개화파들에게는 못마땅한 존재였다. 1895년에 박영효가 개화를 하려면 전우를 죽여야 한다고 여러 차례 청했으나 고종이 승낙하지 않아 참변을 모면했다.

간재는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침탈당하자 1908년 그가 68세 때부터 일제를 피해 서해의 고도(왕등도, 고군산도 등)를 옮겨 다니며 학문을 폈고, 191272세부터 계화도에 정착하여 82세로 죽을 때까지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6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간재는 노론계의 학풍을 계승하여 김창협 이재 김원행 박윤원 홍직필 - 임헌회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학통을 이었다. 그는 이이와 송시열의 사상을 계승하는 데 힘썼다.

특히 이이의 학설에 치중했다. 그러나 주리주기론에 있어서는 공평하게 양설의 절충적 견해를 취하였다.

간재 전우는 도덕원리에 입각한 도학정신의 실천과 의리정신을 강조하였다. 의병운동이나 31운동 때도 그는 도학 정신을 주창하며 무모한 저항으로 헛되이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도학 부흥에 힘써 후일을 기약할 것을 강조하며, 나라를 찾는 방법을 학문 습득과 도학 중흥에서 찾으려 했다. 이 때문에 한말 국난기에 화서계 유학자들과는 달리 의병운동에 가담하지 않고, <파리장서>에 서명을 거부해 그들로부터 죽기가 무서워 의병을 일으키지 못했고, 화가 두려워 외세를 배척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간재는 “500년 종사도 중요하나 3000년의 도통을 잇는 것이 더욱 중요하니 무지하게 목숨을 버리지 말고 학문을 익혀 도()로써 나라를 찾아야 한다고 하면서 도학을 강조하고 도학운동으로 국권회복을 역설했다.

당시의 상황에서는 적극적인 투쟁도 필요한 것이나 간재와 같은 후학 양성을 통한 도의를 회복하여 국력을 길러 국권 회복을 추구하는 것 또한 필요한 것이니 이 두 측면은 서로 대립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국권 회복을 위한 상호 보완적 역할로 모두 필요한 것이라 하겠다.

석농 오진영(石農吳震泳)은 외가인 진천 백곡면에서 출생하여 양성에서 살다가 죽산, 진천, 충주, 음성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일찍이 조부 어은공 오치성은 석농의 자질을 발견하여 그가 열여덟 살 때 충주 백치에 있는 진사 강태희에게 보내 과거 준비를 시켰다.

석농 오진영은 열아홉 살 때 간재를 처음 칠장사에서 만난 후 서른 살 때에 사제의 의를 맺고 그 이후부터 스승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학문을 계승하며 실천한 대표적 제자이다.

간재의 사상은 기절과 의리를 중시하여 엄격한 도학적 태도를 지켜나가는 데 있었다. 석농도 스승 간재와 같이 도학 실천에 힘썼다.

석농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생애를 편의상 세 시기로 나누어 그 특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기는 1868(고종 5)~1894(고종 31)까지로 출생해서 27세까지이다. 이 기간에 그는 가학에 몰두하여 주로 조부 어은공의 훈도를 받으며 과거에 뜻을 두고 정진했으나 갑오개혁(1894년 고종 31)을 목격한 후 친일양이화(洋夷化)되어 가는 현실, 속에서 과거를 단념하고 고향에 돌아와 칩거하였다.

2기는 1894(고종 31)~1922년까지로 그가 27세에 서 57세까지의 기간이다. 이 기간은 한말 격동기로 마침내는 국권을 상실하였고, 31독립운동이 발발하는 시기이다.

석농은 이 시기에 특히 갑오개혁과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에 큰 충격을 받고 수구 보수의 뜻을 굳히게 되었다. 목숨은버릴지라도 머리는 깎을 수 없다고 결심하고 간재를 스승으로 섬기며 학문을 닦고 단발령에 반대하며 이를 실천하였다.

석농은 젊은 강기를 앞세워 을사늑약(1905)의 부당함과 일본의 죄상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포고천하문>, <여각관고함>,<여각국외부서>를 발표하여 일본을 통렬히 규탄했고, 31운동이 발발했을 때는 일제가 양민을 학살한 각지의 실례를 열거하여 만행을 규탄하는 <기분>을 공표하여 일제의 잔학상을 규탄하였다.

그러나 국제사회에 일제의 부당성을 규탄하는 <파리장서>에는 서명하지 않았다. 이는 스승 간재가만류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화서 이항로(華西李恒老)계의 유학자들로부터 소극적 항일이라고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간재와 함께 정도를 지키며, 오랑캐의 도움을 받으려 하면 먼저 우리가 오랑캐가 되니, 오랑캐를 불러들일 수는 없어 취한 고육지책이라 하겠다. 이 때문에 간재의 문인들은 독립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길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되었다.

3기는 1922~ 1944년까지로 그가 77세로 망향재에서 사망할 때까지 이다. 이 시기는 일제가 마지막으로 발악하던 때이다. 석농은 이때 스승의 문집 간행문제로 간재 문하가 분열되는 아픔을 겪으며 마침내 스승의 문집을 간행하고, 중국 상해에서 추담별집도 간행하였다.

석농의 사상적 특징은 유교를 보위하려는 위정사상, 스승 간재의 성사심제설을 골자로 하는 성존사상을 따라 주리설과 주기설을 절충하는 경향, 춘추대의를 표방하고 행동하려는 의욕을 보이나 급진보다는 점진을 택한 점이라 하겠다.

경앙사는 1987년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었는데 현판의 액자는 석농의 제자 월헌 이보림이 썼다. 산은 사람이 우러러 보고, 길은 사람이 많이 다니므로 천하 만인에게 존경을 받는다(高山仰止景行行止, 論語小甫車)는 말에 근원을 둔 것이다.

경앙사에 봉안된 세 분의 학문과 사상을 살펴보면서 한말 국난기부터 일제시대 성리학자들의 처신의 방법과 성리학 이념 계승을 위해 고심했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오환일(해주오씨 정무공파 종중회장, 유한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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