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사의 어원과 사당과의 관계 Ⅰ
거사의 어원과 사당과의 관계 Ⅰ
  • 시사안성
  • 승인 2018.07.10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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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남사당과 조선명창 바우덕이 - 5
거사걸전(기산풍속도)
거사걸전(기산풍속도)

사당은 여자들끼리 다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남자인 거사와 짝을 이루어 다닌다. 이들 사당과 거사는 부부관계를 맺고 전국에 공연을 다니기 때문에 남편격인 거사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들 조직에 대하여 한층 더 깊이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 근일에 경외의 남녀노소가 사장이라고 칭하고 혹은 거사라고 칭하니, 이것은 또한 도사에 비교되는 것으로서 중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데, 그 생업을 폐하고서 차역을 피할 것만을 엿보고 있습니다. 외방에서는 천만 명이 무리를 이루고서 절에 올라가 향을 불사르고, 경중에서는 마을에서 밤낮으로 남녀가 섞여 거처하고 징과 북을 시끄럽게 두들기면서 이르지 않는 바가 없습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중종 8(1513) 103

 

 

. 염불하는 자들이 거사라 호칭하고 남녀가 떼로 모여, 혹은 사찰에서 혹은 여염에서 황건·소복으로 징을 올리고 북을 칩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중종 4(1509) 321

 

 

. 지난해 거사로 일컫는 부류들이 사현의 도로를 수리하였는데 그 일을 끝마친 다음 이어 이 수륙회를 베푼 것이며, 회장의 근처에는 소림굴이 있고 새로 초막을 지었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선조 39(1606) 61

 

 

. 이달 8일 밤에 화주·거사 무리들이 교량을 개수한답시고 중들을 불러 모아 종묘 대문 밖 매우 가까운 곳에서 불사를 설행하면서 심지어 장막을 치고 꽃을 꽂아두고 경쇠·꽹과리·북을 울리며 법문을 외우기까지 하였다는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현종 4(1663) 1011

 

 

. 동당 동당 동당 호남 퇴기 해서 창녀

한 불당에 내 사당 네 사당 무어 다투랴

아무데나 인산인해 이룬 곳에 엉큼하게 손 집어넣어 치마 속 더듬는다

너는 일전에 몸을 허락하는 계집이요 나는 팔도에 거친데 없는 한량이다

아침엔 김서방 저녁엔 박서방 물결치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일반 보시 술 한 잔 굴 한 사발

- 이학규(李學逵;1770~1835), ‘걸사행(乞士行)’, 습유(拾遺), 낙하생집(洛下生集)

 

 

. 고려사에 충렬왕 6년 왕이 승려비평을 내렸는데, 중들이 비단으로 측근에게 뇌물을 써 직책을 얻으니 사람들이 비단선사, 비단수좌라고 부른다. 아내를 두고 집에 머무르거나 절반의 뜻을 둔 사람들을 요즘 소위 거사라 부르는데 사당패의 종류이다. 또한 처자식을 둔 도사들을 중국에서는 화거도사라고 부른다.

- 이학규(李學逵;1770~1835), ‘유발승(有髮僧)’, 동사일지(東事日知), 낙하생집(洛下生集)

 

자료 의 자료로 보아 당시 거사는 사장으로도 불렀으며 도사와 비교 되는 사람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중도 아니고 속인도 아니라고 신분을 정의 하였고, 천만 명이나 모인다고 과장되게 기록하여 그들의 무리가 상당히 많았으며 이로 인하여 경계를 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또 남녀가 섞여 거처하고 징과 북을 두드린다는 것으로 보아 사당거사는 같이 기거하며 공연 활동을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자료 에서는 염불하는 자들이 거사라고 칭하고 남녀가 떼로 모여서 북과 징을 친다고 하여 이들은 사당패와 비슷한 집단임을 알 수 있다. 거사들이 염불을 한다고 하였는데 여기서의 염불은 중의 염불인지, 사당패들의 소리를 칭하는 판염불을 말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자료 는 거사들이 걸립을 한 기록이다. 도로를 수리하고, 다리를 놓기 위하여 공연을 한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현대적 의미의 걸립패들과 아주 유사하다. 장막을 치고 꽹과리와 징을 쳤다는 기록으로 보아 공연장이나 무대를 만들어 아무나 볼 수 없도록 가리고 특정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유료 공연을 한 것으로 보인다.

자료 걸사행이라는 제목의 시()이지만 이 구절의 내용은 사당들의 출신과 행태에 대하여 담고 있다. 따라서 걸사사당들은 구분 없이 통용되는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자료 는 거사를 일컬어 아내를 두고 집에 머무르거나 절반의 뜻을 둔 사람이라고 하여 사찰과 민간의 가운데에 있는 사람이라 하였고, 이 거사들은 사당의 한 종류라고 하였다. 아내를 두고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부부관계를 맺는 사당과는 별도로 집에는 본부인을 두고 있는 사람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사당의 한 종류라고 하여, ‘사당거사로 거사를 사당패의 구성원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사당이라는 말은 사당패라는 무리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전신재는 걸사(乞士)’는 곧 거사(居士)’이지만 19세기 후반에 무기력해지고 초라해진 거사의 모습이라고 하여 거사들이 구걸을 하는 상황을 걸사라는 의미로, 거사보다 걸사가 낮은 상황인 것처럼 묘사 하였다. 그러나 사실 걸사는 단지 거사의 다른 말일 뿐이다. 정약용이 걸사는 머리를 깎지 않은 승려로 우리말에 거사라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말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걸사를 거사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기는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렇게 사용하고 있었다는 알 수 있다.

또한 이학규의 걸사행(乞士行)이라는 시는 그 내용으로 봐서는 거사행(居士行)이 맞지만 제목이 걸사행(乞士行)이라고 한 점에서 볼 때, 당시 거사 및 걸사의 용어는 큰 구별 없이 사용됐던 것으로 보인다. 서거정은 "동문선"에서 서역의 제도에 머리를 깎고 괴색의 옷을 입은 자는 비구라 호칭하며, 소위 걸사라 이른다고 하여 비구는 걸사와 동일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19세기 후반 기산 김준근이 그린 기산풍속도 거사걸전(居寺乞錢)’을 보면 소고를 든 거사들도 걸전을 하였으며, 걸전 자체가 낮은 의미로 사용하는 말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만약 걸전이 낮은 의미였다면 제목이 거사걸전이 아니라 걸사걸전이어야 옳을 것이다.

홍원의(안성시청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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