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15해방 후의 안성 초등교육(1)
1945년 8.15해방 후의 안성 초등교육(1)
  • 시사안성
  • 승인 2018.07.0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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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권의 사진에 담긴 이야기 - 12
1948년 안성공립국민학교 전경사진/출처;안성초등학교 100년사(2003. 2) 사진자료/원내는 2대 장호선 교장/해방을 맞은 지 2년이 지났지만 교정에 휘날리는 태극기는 광복의 감회를 새삼 느끼게 한다
1948년 안성공립국민학교 전경사진/출처;안성초등학교 100년사(2003. 2) 사진자료/원내는 2대 장호선 교장/해방을 맞은 지 2년이 지났지만 교정에 휘날리는 태극기는 광복의 감회를 새삼 느끼게 한다

1945815일 해방 이후 1950년대에 이르는 1940년대 후반기에 정부수립으로 인하여 이 기간에 교육정책에 역점을 둔 분야는 초등교육이었다.

미 군정기에 군정청 학무당국에서는 우선 종전의 국민학교를 6년제의 초등교육기관으로 개편 존속시키는 한편, 조선교육심의회를 통하여 학제를 새로 제정하여 국민학교를 새로운 초등교육기관으로 제도화하였다.

이에 맞추어 국민학교의 교육내용으로 교수요목이 새로 마련되고 이에 근거하여 교과서를 새로 편찬하고 민주주의 교육론에 입각한 새로운 교육방법으로 아동중심주의 교육방법이 도입되었다.

해방 이후의 혼란기에 문교당국은 교원의 학보를 위해, 우선 국민학교에 남아있는 한국인 교원들을 새로운 교육실시에 적합하도록 재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사범학교를 개편하여 새로운 초등교육을 실시할 수 있는 초등교원을 양성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교육방침에 따라 안성지역에서는 1945101안성공립국민학교라는 명칭으로 다시 개교하게 된다.

그리고 동년 1030일 광복 후 한국인 초대교장으로 김용기(金鎔起)와 한국인 교사들이 인사 발령을 받음으로써 초등학교의 면모는 점차 한국식 교육의 장으로 갖춰지게 되었다.

1946830일 제2대 장호선(張浩善)교장이 취임하였는데 이 때에는 문교부 중심의 새 교육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경험중심의 교육과정과 생활중심의 교육과정이 도입되었던 시기로, 본교에서도 이러한 시대적 조류에 맞춰 획일적, 억압적인 교육법을 지양하고 학생들의 개성과 창의성을 존중하는 자유로운 교육 분위기를 조성하였다(안성초등학교 개교 100주년, 百年史/1902~2002, 20032월 발행 참조).

 

1940년생인 필자는 지난 6월 초 사담기에서 전술한바와 같이 개인사정으로 취학 적령기를 놓치고 9살인 194891일 안성공립국민학교 1학년에 입학하게 되었다(학기제는 지금과는 달리 제 1학기 개학이 91일에 시작되었다).

우리 나이로 아홉 살의 초등학교 1학년생이던 필자가 그때 그 당시의 초등학교 시절의 이야기를 지면에 소개하기에는 기억력에서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연유로 이번 사담기에서는 그 때 찍은 사진이나 통신표, 수료장, 임명장, 상장 양식을 토대로 설명하는 방식으로 전개하여 나갈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다.

지난 3시사안성발행인으로부터 사담기 기고를 의뢰받고 망설였던 기억이 떠오른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사진을 통하여 연재해 나가게 되면 자연스럽게 성장 당시의 개인정보가 노출될 뿐 만 아니라 혹시 살아온 과정에 대한 자랑거리나 늘어놓는 것 아니냐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번 주 원고의 주제에서 소개하게 되는 사담기에서는 초등학교 시절에 받은 성적표, 상장, 임명장, 신체검사 결과 등이 불가피하게 노출될 것인데 그에 따른 심적 부담도 크기 때문이기도 하다.

 

필자는 지난 416박종권의 사진에 담긴 이야기첫 번째 원고인<연재에 앞서> 기고문에서 개인이 가지고 있던 자료(사진, 서적, 문서류, 역사자료 등) 400여점을 안성시(안성맞춤박물관)에 기증하고 안성시장으로부터 기증문화재 수납서를 받은 바 있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 후 기증 자료는 안성맞춤박물관 기획 출판물인 안성 근현대 사진첩(1) ‘근현대 안성인의 삶’(200312)23, 기증유물 전시회 기획품인 안성의 근현대를 가다’(200612)28, 기증문화재 기획전시(201112) 책자에 10점 도합 61점이 소개 된바가 있다.

그러면서 개인이 소장하고 있던 하찮은 사진들을 근대, 현대 유물 등록문화재로 발굴하면서 안성시 근현대문화재 보존에 앞장서고 있는 박물관 담당 공무원들에게 감사하다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오늘 기고에 나오는 초등학교 1, 3학년 성적표(2학년 성적표는 지면관계로 생략함), 반장 임명장, 우등상장 등은 안성맞춤박물관 기증유물전시회에서 이미 노출된 자료들이기 때문에 다소 안심하는 마음으로 게재하게 됨을 너그럽게 이해해 주기 바란다.

안성공립국민학교 1학년 3반 단체사진/1948년/11x7.7cm/담임 박용찬 선생님과 교정에서 함께 찍은 사진/맨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필자(안성맞춤박물관 기증)
안성공립국민학교 1학년 3반 단체사진/1948년/11x7.7cm/담임 박용찬 선생님과 교정에서 함께 찍은 사진/맨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필자(안성맞춤박물관 기증)

-박용찬 담임선생님에 대한 추억-

입학당시엔 모두 어리어리했고 코흘리개가 많아서인지 콧수건을 왼쪽 가슴에 찼던 것으로 어렴풋이 생각이 난다.

운동장에서는 마주보고 선생님들이 서계셨고 아동들은 한 줄씩 여러 줄로 죽 늘어섰는데 나는 대열에서 맨 뒤에 섰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아마 키순으로 세웠는지 키 작은 꼬마들을 맨 앞으로 해서 차례로 세웠던 것 같다.

그때 찍은 학급 단체사진을 지금 보니 꼬마들을 맨 앞자리에 앉혀서 찍은 것이 확인된다.

생전 처음 학교에 들어가서 첫 번째로 만나 뵙게 된 1학년3반 담임 박용찬(朴容讚)선생님은 미남 총각으로 잘 생기셨고 자상하고 인자한 모습으로 가르쳐 주셨으며 초등학교 1학년, 2학년 연속해서 2년간 담임선생님으로 계셨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인이 되셨지만 항상 옆에 계신 것 같이 느껴지면서 지금도 뵙고 싶은 은사님이다.

대개 초등학교에서 학년 초 학급담임을 정할 때에는 노련한 교사들에게 1학년생 담임을 마낀다. 새로 들어온 학생들을 학교생활에 적응시키기 위해 한 사람 한 사람 이끌면서 지도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증거이다.

박용찬 선생님은 생활지도도 어려웠겠지만 교무 업무도 상당히 복잡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당시 우리 반은 인원이 68명이나 되니 지금보다 많았고 그 당시에 성적통지표 작성만 하더라도 68명 어린이 한명 한명의 이름, 과목 점수와 석차 합계란까지 9군데에 걸쳐 일일이 펜으로 썼다면 680차례 이상 손이 갔을 것으로 상상이 된다.

그러나 점수를 보며 한 글자 한 글자 쓴 것이 아니라 맡고 있는 어린이들의 얼굴, 즉 사람을 보고 통신표 한 장 한 장을 소중하게 다루지 않았을 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당시의 소중한 가르침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필자가 교사시절인 1980년대엔 은사님이 안성교육청에 장학사로 계셨고 초등교사에서 중등교사로 전직하시어 안성고등학교 교감으로 재직하셨던 분이다.

필자는 최근 매주 화요일마다 안성시실버합창단 연습 때 우연히 70년 전 1학년 3반이었던 심o, o, o3명의 여자동창과 만나서 고마우신 박용찬 선생님을 떠올리며 추억을 되살린 적이 있다.

 

-사진 속에 비친 남녀공학 1학년 아동들의 모습-

1학년 3반이 되어 교실에 들어가 보니 여학생들과 함께 혼성으로 학급편성이 되어 있었다.

한 반 친구들은 7살도 있고 8살도 있는 데 늦은 9살에 학교에 들어갔으니 자신 있게 앞장서서 나갈 수 있는 점은 좋았으나 여학생과 짝을 지어 앉으려니 조숙(?)해서인지 얼굴이 빨개졌던 것으로 생각이 된다. 당시 놀림도 받은 기억이 난다.

남녀공학인 학생들 복장은 모두 여름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여름철에 찍은듯 하다. 담임선생님을 가운데 두고 왼편에는 남학생들, 오른편에는 여학생들이 모두 두 손을 공손하게 무릎위에 올려놓고 다소곳하며 얌전한 모습이다.

학급 인원을 세어보니 남학생 35, 여학생 30명 모두 65명이나 된다. 통신표 성적 란을 보니 재적 학생은 68명으로 적혀있으니 당일 사진 찍을 때 3명이 아파서 결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현행법상 초등학교 학급당 정원은 25명이다/그런데 지난 번 교육감선거에서 당선된 모 교육감후보는 25명 인원이 과밀하다며 당선되면 20명 이하로 낮추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이 공약을 달성하려면 대략 2000여명의 교사 증원이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정부는 대선 공약에서 내세운 초등학교 ‘1교실 2담임제를 추진한다는 사실을 언급하기도 하였다. 앞으로 교사 간 갈등이 예상된다. 지금 25명 인원이 과밀학급이라면 1948년 당시 학급인원의 3배가 훨씬 넘는 68명의 교실은 얼마나 복잡한 콩나물 교실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1학년 통신표(앞면)/1948년/17.4x15.3cm/위에는 1949년 7월 30일자로 수업장(수료증)이 인쇄되어 있다(안성맞춤박물관 기증)
1학년 통신표(앞면)/1948년/17.4x15.3cm/위에는 1949년 7월 30일자로 수업장(수료증)이 인쇄되어 있다(안성맞춤박물관 기증)
1학년 우등상장/1949년/26.5x18.5cm(안성맞춤박물관 기증)
1학년 우등상장/1949년/26.5x18.5cm(안성맞춤박물관 기증)

당시 학교 명칭은 안성공립국민학교이며 1학년 과정을 마친 학년말인 단기4282(1949) 730일자로 수업장통신표’(입학년도 4281)가 한 장에 아래위로 되어있는 양식의 수료증이 수여되었다.

수업장에는 학생의 생년월일과 함께 초등학교 제 1학년의 과정을 수업하였음을 증함이라는 내용의 수료증이 번호 제 5호가 부여되어 안성공립국민학교 직인과 함께 기록되어 있다.

수업장 확인란에는 학교장, 담임교사의 한자 이름이 고무인으로 찍혀있고 보호자, 아동 란에는 담임교사가 펜으로 적은 한자 이름이 적혀져 있다.

1학년 통신표(뒷면)1948년/17.4x15.3cm/양식 위에는 수업성적이 1학기, 학년말로 구분해서 기록되어 있고 아래에는 출석상황과 신체상황이 기록되어 있다(2006년 12월 안성맞춤박물관 기증 유물전시회 ‘안성의 근현대를 가다’ 책자에 게재)
1학년 통신표(뒷면)1948년/17.4x15.3cm/양식 위에는 수업성적이 1학기, 학년말로 구분해서 기록되어 있고 아래에는 출석상황과 신체상황이 기록되어 있다(2006년 12월 안성맞춤박물관 기증 유물전시회 ‘안성의 근현대를 가다’ 책자에 게재)

인쇄된 통신표 양식 안 쪽 상단에는 수업성적이 일학기, 학년말 두 번에 걸쳐 과목별로 국어, 사회생활, 산수, 보건, 음악, 미술 과목 점수와 합계, 평균, 학급석차가 펜으로 적혀있고 확인으로 학교장인() 교사인, 보호자인이 붉은 인주로 찍혀있다.

하단에는 출석상황 란과 신체상황 란으로 구분되어 기록되어 있다. 출석상황은 방학기간을 제외한 월별(9, 10, 11, 12, 2, 3, 4, 5, 6, 7)로 출석, 결석, 지각, 조퇴로 구분되어 적혀 있다. 신체상황 란에는 연령(9) 조사연월일(4281. 9.30)이 적혀있고 키(119.5cm) 가슴둘레(58.8cm) 몸무게(21.3kg)는 측정하였으나 시력과 충치 란엔 공란으로 처리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당시의 신체검사 도구가 미흡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의 학기제도는 1학기가 91일부터~익년 2월 말까지이고 2학기는 31일부터~8월 말까지로 되어 있어서 3, 9월로 시작하는 현행 학기제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월별 수업일수를 합계 내 보니 235(당시 연간 법정 총 수업일수는 230일 이상/현행 총 수업일수는 220)로 기록되어 있다.

 

<2학년 3반 소풍 사진(10.5x7cm)/안성맞춤박물관 기증>

2학년 3반 단체사진/1949년/10.5x7cm/1949년 가을 안성공립국민학교 2학년 3반 소풍 사진/박용찬 담임선생님을 모시고 함께찍은 기념사진이다/맨 뒷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필자(안성맞춤박물관 기증)
2학년 3반 단체사진/1949년/10.5x7cm/1949년 가을 안성공립국민학교 2학년 3반 소풍 사진/박용찬 담임선생님을 모시고 함께찍은 기념사진이다/맨 뒷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필자(안성맞춤박물관 기증)

1949년 안성초등학교 2학년 3반 학생들이 담임 박용찬 선생님 인솔 하에 가을 소풍을 갔던 사진이다. 장소는 필자 기억으로는 학교 뒷산인 비봉산은 확실히 아니고 약간 멀리 걸어간 근방에 있는 절이 아닌가 싶다. 박용찬 선생님은 1학년 3반 때 담임이었는데 2학년 때도 담임을 맡았기 때문에 두 번이나 사진에 나온다.

1학년 때는 남녀공학이었는데 2학년 때는 남녀를 구분해서 학급 편성이 이루어진 것 같다. 소풍 간 학생 수를 세어보니 49명이다. 아마 집안 사정이 어려워서 소풍을 못간 아동들이 꽤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사진 역시 안성맞춤 박물관 기증유물전시회 안성의 근현대를 가다박종권 기증유물편(27쪽부터 36쪽까지) 28쪽에 게재되어 있다.

박물관에서 기록한 사진설명에서는 <안성초등학교 단체사진/1948/10.5x7cm, 1948년 안성초등학교 1학년 3반 소풍기념 사진/ 박용찬 담임선생님을 모시고 함께 찍은 소풍 기념사진. 뒷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박종권씨>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을 재론하는 이유는 상기 박물관 책자 28쪽에 게재되어 있는 <년도 1948년을 1949년으로, 1학년 3반을 2학년 3반으로 정정>하기 위해서다.

필자가 20061222일 안성맞춤박물관에 사진자료를 기증하던 당시에는 박용찬 담임선생님이 사진에 또 나와서 1학년 3반 때 찍은 사진으로 착각했고 관계자에게 년도 역시 1948년으로 진술했기 때문이다.

담임선생님은 같으나 1학년 때는 남녀공학이었고 2학년 때는 남학생만으로 학급편성이 되어있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시사안성지면을 통해서정정하고자 한다.

 

<19503학년 통지표와 임명장 양식(안성맞춤박물관 기증)>

안성국민학교 3학년 통지표(안성맞춤박물관 기증)/1950년 6.25한국전쟁 당시 사정이 있었는지 통지표 양식도 간단하고 용지의 질도 떨어지고 통지표양식은 등사용지를 철판에 대고 철필로 긁어서 등사판에 대고 밀어서 만들었다
안성국민학교 3학년 통지표(안성맞춤박물관 기증)/1950년 6.25한국전쟁 당시 사정이 있었는지 통지표 양식도 간단하고 용지의 질도 떨어지고 통지표양식은 등사용지를 철판에 대고 철필로 긁어서 등사판에 대고 밀어서 만들었다

학교 명칭은 안성공립국민학교에서 공립 자가 빠진 안성국민학교로 바뀌었고 가정으로 보내는 성적표 이름도 통신표에서 통지표로 바뀌었다.

또한 앞에 제시한 1948년 초등학교 1학년 때의 통신표, 상장과는 달리 19503학년 때의 통지표와 임명장은 우선 용지의 질이 좋지 않고 인쇄상태가 조잡해 보인다.

아마 1950625일에 일어났던 한국전쟁 중이라서 예산상태도 열악했고 물자부족 등 학교운영상 혼란을 겪고 있는 듯이 보인다.

1950년 6월 7일자로 수여된 반장 임명장(안성맞춤박물관 기증) 6.25한국전쟁 전인데도 임명장 양식을 인쇄해 놓지 못하고 등사용지를 철판에 대고 굵은 글씨를 그려서 등사판에 대고 지질이 낮은 용지에 밀어서 제작하였다
1950년 6월 7일자로 수여된 반장 임명장(안성맞춤박물관 기증) 6.25한국전쟁 전인데도 임명장 양식을 인쇄해 놓지 못하고 등사용지를 철판에 대고 굵은 글씨를 그려서 등사판에 대고 지질이 낮은 용지에 밀어서 제작하였다

안성초등학교 100년사에 보면 “1950년대는 6.25전쟁을 치르고 휴전 후의 복구에 총력을 기울이던 시기로 교육에 있어서는 전쟁 중에 전시교육 체제하에서 교육이 실시되고, 휴전 후에는 교육재건에 힘을 쓰지 않으면 안되었던 시기이다. 전쟁의 와중에도 우리는 나름대로 교육을 실시하였고, 휴전 후에는 교육재건에 힘쓰는 한편, 교육발전을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선 통지표와 임명장의 인쇄상태를 보면 등사판에 대고 밀어낸 것이다. 등사판(騰寫板)은 철필로 쓴 원지를 붙인 망판위에 잉크 묻은 롤러를 밀어 굴려 박아내는 수제(手製)의 등사기를 말한다.

한 동안 학교에서는 시험지나 교재를 만들 때에는 일일이 인쇄소에 넘기지 않고 교사들이 각자 등사원지(등사판에 찍어낼 원고를 쓰는 기름종이)를 철판에 대고 철필로 원고를 직접 그리거나 긁어 써서 만들곤 하였다. 그러나 상장이나 임명장은 인쇄소에 넘겨 그럴듯하게 제작하곤 하였었다(다음호엔 1950년도 후반기 4, 5, 6학년 때의 모습이 소개될 예정이다).

 

박종권(교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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