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구르는 돌멩이로 살다 - 금은돌傳
평생 구르는 돌멩이로 살다 - 금은돌傳
  • 시사안성
  • 승인 2021.04.19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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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천호의 단상 그리고 시인 금은돌 – 23

1. 일천구백칠십년 안성에서 태어났다.

전생에 아마 고구려나 몽골 어느 부족장의 딸이였을 것이다.

몽골 초원에서 말 타기를 좋아했고 세계 여행 다니기를 좋아하던 여인이었다.

 

2. 스물 다섯살 나이에 나와 함께 인도를 여행하고 네팔 여행에서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달빛 푸르던 칠흑같은 밤 걷다 춤추고 춤추다 걷고 걸었던 여인이었다. 산악용 등산화도 없이 민짜 운동화로 그 험한 산을 다녔던 용감한 여인. 얼마나 안나푸르나를 좋아했던지 한때 이메일과 별명을 안나푸르나 했던 여인이었다.

 

3. 산사 도량에서 3주간 깨달음의 장 마치고 내려와 내게 처음으로 결혼합시다 그리고 도합 세 번 결혼합시다 말한 당찬 여인이었다. 스물 여섯살 결혼식을 온양 민속박물관에서 전통혼례로 치루며 대금소리와 장닭의 꼬끼요 하늘에 울려퍼질 때 우리는 맞절을 했다. 폼과 멋 좀 아는 그런 여인이었다.

 

4. 결혼 후 안성에서 터를 잡고 1998125일 여인의 품에서 아들 원효가 태어났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미륵이듯이 아들도 미륵이며 저 먼별에서 내 품으로 여행 온 고마운 아들 미륵이라고 여겼던 참 좋은 엄마 여인이었다.

 

5. 알콩달콩 모자간의 이야기를 <엄마와 함께 크는 원효일기> 글을 통해 안성신문8년여간 투고하였고 대안교육에 대한 실천과 단상을 생각쟁이에 지속적으로 투고하였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모자간의 사랑 이야기와 바람직한 교육이 무엇인지 실천하려 했던 자애로운 엄마 여인이었다.

 

6. 아들 원효가 두 돌이 채 되기 전 사랑하는 천호씨 편지 한 장 남겨두고 집을 잠시 떠나 대안학교 현장교육 과정 자신의 꿈 찾아 훌쩍 길을 나선 여인이었다. 그런 아들을 포대와 멜빵으로 싸안고 나는 시민운동을 하러 다녔다. 안성천살리기시민모임 푸른안성맞춤21추진협의회 일과 함께 안성기적의도서관도 관여하여 3만명 시민어린이청소년들의 힘으로 그렇게 이루어냈다. 그런 나를 멋진 남편이라고 좋아했던 사랑스런 여인이었다.

 

7. 오학년 소년과 함께 가족 백두산 여행기로 원효가족신문을 함께 만들었다. 원효가 편집장으로 참여하여 여행기 전부를 자신의 글로 채웠다. 남한의 한라산 비롯한 명산들과 금강산을 함께 다녀오고 이제 백두산 다녀왔으니 부모 노릇 다했다는 후기에 적은 엄마의 말에 아들이 동의했다. 이후 아들의 입에서 명산을 다니자는 말이 없었다. 당신은 그런 유머러스한 여인이었다.

 

8. 어린 육학년 소년의 첫 시집 라스트 유치출간은 아들 원효에게 작가의식과 시인에 대한 꿈을 심어준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자신의 첫 시집을 묶어준 걸 아들은 평생 자랑스러워했다. 오늘의 나를 만들어준 건 엄마라고...그리고 또 길을 나섰다. 시 쓰고 그림 그리러 토지문학관으로 연희창작촌으로...당신은 그렇게 길을 나서는 멋진 여인이었다.

당신의 아들 원효 이천십칠년 19살 등단 사진, 금은돌 당신의 최고 작품입니다.
당신의 아들 원효 이천십칠년 19살 등단 사진, 금은돌 당신의 최고 작품입니다.

 

9. 검정고시의 시간을 주고 몽실몽실 시 쓰고 놀러다니는 시간을 주고 자유를 맘껏 즐기는 시간을 출가소년 아들에게 준 엄마이자 여인이었다. 아들 원효는 종종 출가소년이 되었고 중졸 고졸 졸업장이 없는 대학생이 되었지만 자식에게 부모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시간이란다그런 말을 한 엄마 여인이었다. (지금도 원효는 부모가 주는 최고의 선물은 시간이라는 그말이 엄마에게서 들은 가장 감명 깊었던 말이었다고 기억한다)

 

10. 안성 천주교 공원 묘지에 기형도 시인의 묘지가 있다. 아내 따라서 일가족이 가끔 가기도 하였다. 기형도 기일 전후에 혼자 묘지를 다녀오고 나면 더 다부지게 시를 써야 한다고 말했던 여인. 기형도 문학연구로 1호 박사학위를 받은 건 안성 땅에 묻힌 기형도 시인과의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인연으로 기형도 문학관 개관과 운영을 위해 혼신을 다했던 당신의 선한 영혼을 기억한다. 2013427일 안성도서관에서 기형도 시를 읽는 오후전시회 그림 전시를 도와준 류연복 화백을 잊을 수 없고 낭송회에서는 정진규 시인이 당신의 손을 잡고 웃음짓던 장면을 잊지 못한다. 당신은 그런 시인이자 화가 여인이었다.

 

11. 터키 여행하다 자신의 이름처럼 어느날 돌을 만났다. 그 돌들과 함께 가져온 쓸모있다 여긴 주방용 돌도마. 그러나 무겁긴 좀 무거운 돌을 이역만리 가방에 넣어온 여인이었다. 아들과 나는 빵 웃음을 터트렸지만 지금도 그 돌도마 사용하면서 가끔 그 여인은 지금도 하늘나라에서 엉뚱한 시와 그림 그리고 있겠지 생각한다. 아들과 나에겐 가끔 엉뚱한 여인이었다.

 

12. 인도 네루대학으로 국제학술대회 나갈 때 여러날 몹시 설레어하던 당신에 대한 기억 지울 수 없다. 순전히 한글로 표기된 자신의 시와 그림으로만 낭송하는데 그럴 때 외국 문인들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소통이 될 것인가? 못내 궁금해했던 여인이 인도에서 카뚝 카뚝거리며 짧게 돼요 돼 ㅎㅎㅎ!” 그러면서 활짝 웃는 이모티콘 보낸 날을 기억한다. 그날의 영상을 KBS 뉴스에서 보고 나두 까뚝 까뚝거렸다. “치마가 잘 어울려서 이쁘오 ㅎㅎㅎ 외국 문인들이 박수치는 걸 보니 기쁘오 ㅎㅎㅎ그랬다. 그렇게 예술하는 여인이었다.

 

13. 몽골 여행에서 자신과 닮은 고집스런 말을 발견한 여인이었다. 몽골의 고집장이 이 말은 먼 과거에서 온 자신의 주인을 알아본 거였다고 말을 했다. 처음은 히힝거리며 전혀 갈 생각을 안하고 모든 말들이 떠난 뒤에도 꼼짝않고 빙빙 제자리 걸음만 하더란다. 여인이 이제 가자 하는 말 한마디와 함께 박차를 가해 달리더니 앞서가는 말들을 하나둘 제치고 마지막까지 쾌속질주 끝내는 일등으로 달리는 고집스럽고 호쾌무비한 성품을 지닌 말이었다. 함께 국제학술대회 겸 여행 온 시인들과 소설가들이 둘 모두 똑같이 닮았다고 박장대소했다는 그 이야기 듣고 그 고집쟁이 말과 아내 때문에 나도 눈물 흘리며 박장대소했던 좀 웃기던 여인이었다.

 

14. 세월호 관련 광화문 304 낭독회에서 시낭송하고 안산추모 전시회에 그림 출품하고 사월동인 활동하면서 많이 힘들고 우울해했다. 감성이 예민한 시인에겐 그럴만한 사건이었으니까. 우리도 마음이 계속 아픈데 말이다. 시와 그림을 통해 신문지면 산문을 통해 여러번 등장하는 주제일 수 밖에 없는 거였다. 그런 여인이었다. 공통어 마음 아파하고 슬퍼하는 엄마라는 여인이었다.

 

15. 칠팔년전 쯤 종로쪽 노숙자쉼터에서 노숙인 대상 행복한 글쓰기를 한다고 하길래 나도 몹시 궁금했다. 노숙자 아저씨들도 애들과 다름없다고 글이 안써지면 성질부리고 잘 쓰는 사람 질투한다고 다 똑같다고 그런 아저씨들 첫날 이름 대신 파아란 구름 춤추는 돌 이런 식으로 호명하니 두눈이 초롱초롱 너무 좋아하더란다. 그날 이후 그렇게 차분하게 자신의 이야기들을 시로 쓰더니 마지막 수업날 제본이 된 공동시집 나눠주는 날, 모두 다 어디에서 양복을 빌려입고 나왔는지 아니면 감춰둔 자신의 양복을 다 갖춰입고 나왔는지 그렇게 삐까번쩍 나왔더란다. 자신도 감동이었다고 멋진 아저씨들이었다고 했다. 수료식이 끝나고 다 돌아간 뒤에 파아란 구름이라고 호명하는 어느 노숙인이 쭈뼛거리며 선생님한테 커피 한잔 사드리고 싶다는 말을 하길래 같이 커피숍에 갔더랜다. 그랬더니 아메리카노 커피 한잔만 딱 시키더란다. 그러면서 선생님 고맙습니다 내 인생을 되돌아보게 해주셔서...” 감사의 말을 하더란다. 그때 그 커피 한잔 값은 그 노숙인 주머니 탈탈 턴 커피 한잔 값이었다고. 두 잔도 시킬 수 없는 전 재산을 탈탈 턴 커피 값이었다고. 그 커피를 마시며 둘이 함께 눈물 흘렸다고 내게 말해주는데 나도 감동스러워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런 노숙인 이야기를 전해주는 당신은 참 선한 여인이었다.

 

16. 중학교 2학년부터 꿈이 군자였다. 군자처럼 시서화하면서 자신의 꿈을 평생 잊지 않고 용맹전진하며 살았던 삶으로 아내를 기억한다. 당신이 죽은 다음날 장례식장에 나타난 시 쓰는 대학원생 제자들 학부 제자들 대안학교 옛날 제자들 내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쏟으며 어쩔 줄 몰라하는 제자들을 둔 군자와 같은 선생 여인이었다. 사람은 죽은 다음에야 평가가 이루어지는, 그런 여인이었다.

 

17. 이제 2020415일 이후 일년이 지나간다. 내일이면 당신의 일주기다. 나도 모르게 나오는 눈물 흘리며 일년을 보냈다. 전생에 아마 시간을 달리는 고구려나 몽골 어느 부족장의 딸이였을지도 모를 여인. 힘차게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던 여인. 문학 속에서 그녀그로 자신을 호명하며 자유인으로 살았던 여인. 평생 구르는 돌멩이로 살다 간 여인. 잘 지내시라 하늘나라에서. 그러니 이제 웃어요 함박 크게 웃어요 하하하.

 

18. 당신의 작품인 아들, 조원효 시인의 당신의 유작 금은돌의 예술산책서문으로 이제 금은돌의 이야기마칩니다 굿바이.

 

금은돌이 오고 있다. 나에게. 하얀 국화꽃을 들고. 아니. 내가 가고 있다. 파란 바지를 입고. 안성의 어느 공설운동장을 지나며. “엄마 설렘이 뭐야? 설렘은 왜 또 와?” “그건 죽어가는 태양이니까라고 답하던 엄마이자 시인 금은돌이. 가고 있다. 그곳으로. 고통 없이. 죽음 없이. 고삼저수지를 지나며. 먼저 가지마, 같이 좀 걷자. 라고 중얼거릴 것만 같은데. 가고 있다. 몽골과 터키 여행에 대해 자랑하며 촌스러운 목걸이를 꺼내 보일 것만 같은데. 가고 있다. 그녀가. 세상에 없는 문장을 향해. 가고 있다. 그녀가 가고 있다.

 

조천호(안성 국가철도 범시민유치위원회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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