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안성 지명에 남아 있는 일제 잔재
(특집) 안성 지명에 남아 있는 일제 잔재
  • 봉원학 기자
  • 승인 2021.04.01 07: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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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 안성은 일제에 맞서 2일간의 해방을 이루어낸 고장이며, 많은 독립운동가와 독립운동의 역사를 간직한 고장이다. 그러한 자랑스러운 역사에 대한 흔적과 기억은 안성 곳곳에 남아 있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그에 못지않게 곳곳에 알게 모르게 일제강점기의 잔재도 남아 있다.
단지 남아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지와 망각속에서 그 존재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와 합의 없이 남아 있는 것이 문제라 할 것이다.
이에 시사안성에서는 일제강점기 전국 3대실력항쟁의 하나로 평가받은 안성의 4.1만세항쟁이 있었던 4월1일을 맞이하여 민족문제연구소로부터 자료 협조를 받아 안성의 지명에 남아 있는 일제 잔재에 대한 내용을 소개한다.
1943년 안성읍내 지명변경 사실을 알리고 있는 당시 관보
1943년 안성읍내 지명변경 사실을 알리고 있는 당시 관보

일제 강점기 안성은 여러차례에 걸친 행정구역 개편 혹은 명칭변경이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오늘날 안성의 모태가 된 1914년 행정구역 개편과, 1937년 안성읍승격, 그리고 1943년 안성읍내 리()를 일본식 명칭인 정() 으로 바꾼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안성 각 마을의 고유한 지명이 행정편의에 의해 바뀐 사례는 열거하기 힘들정도로 많다.

대표적인 것이 일죽면(一竹面), 이죽면(二竹面), 삼죽면(三竹面)이라는 면이름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이전에 이곳이 죽산군(竹山郡)에 속한 지역이어서 죽()이라는 글자를 넣고 편의적으로 숫자를 넣어 만든 지명인 것이다.(이죽면은 이후 죽산면으로 바뀌어 오늘날까지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안성에 남아 있는 일제잔재 지명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연구가 있었는데 민족문제연구소가 경기도의 의뢰를 받아 지난 해 4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 연구용역 결과보고서”(이하 결과보고서)가 나왔다.

시사안성에서 민족문제연구소로부터 제공받은 결과보고서 중 안성과 관련된 내용에 의하면 현재 안성1동에 속해있는 영동(榮洞)과 동본동(東本洞)은 대표적인 일본식 지명이 잔존한 사례다.

결과보고서에 의하면 일제는 중일전쟁 개전이 임박해진 1936년 무렵, 조선총독부는 동화주의(同化主義) 정책의 일환으로 경성부, 인천부, 개성부 등 주요 도시의 동명을 일본식으로 고쳤고 이후 일본식 명칭인 ()’이 도입되었다.

안성의 경우 1943925경기도고시268호에 의해 1943101일부터 당시 안성읍에 속해 있던 10개 리()25개 정()으로 바뀌었다.

이 때 일부는 기존에 쓰던 마을 이름에 단순히 ()’을 붙인 경우도 있었지만 기존 지명을 무시하고 일본식 지명을 도입한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명치정(明治町),대화정(大和町), 소화정(昭和町), 영정(榮町), 동본정(東本町) 등이다.

해방후 1947년이 되어서야 이러한 일본식 동명인 정(), 정목(丁目)을 다시 동()으로 고쳤는데, 이 과정에서 1943년에 새로 만들어진 명치정(明治町),대화정(大和町), 소화정(昭和町) 등은 명치동이나 대화동, 소화동으로 바뀐 것이 아니고 창전동, 낙원동, 신흥동, 인지동 등으로 새롭게 바뀌었다.

그런데 영정(榮町)과 동본정(東本町) 1정목은 각 각 영동(榮洞)과 동본동(東本洞)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결과보고서영정은 사카에마치또는 사카에쵸라고 해서 서울에도 있었고 일본인 밀집 거주도시에는 혼마치(本町)’만큼이나 흔하게 붙여서 사용하던 지명이고 동본정도 일본식 발음으로는 히가시혼마치로 되는데 그와 같은 현상으로 보인다고 밝히고 있다.

참고로 수원시 팔달구에도 영동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데 이 역시 안성의 사례와 같다는 것이 민족문제연구소의 설명이다.

결과보고서에서도 인용하고 있지만 안성군지(1990)에 의하면 1914년 행정구역 변경 이전에는 안성읍이 동리(東里)와 서리(西里)로 나뉘어 있었는데 영동(榮洞)은 이곳이 동리와 서리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이라 하여 본말이라 불렀던 곳이다. 또 영동의 동쪽에 인접한 동본동(東本洞)은 본래 동리면 지역으로 동네 중앙을 통하는 작은 골목이 있어 안골목이라 했던 곳이다.

결과보고서이 두 지명은 아무런 역사적 근거가 없이 1943년 일제 당국에 의해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1947년 일본식 동명 변경에 따라 정을 동으로 고친 것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결과보고서는 이외에도 읍내 이외 지역으로 금광면(金光面) 소재 삼흥리(三興里)사흥리(四興里)오흥리(五興里), 일죽면(一竹面) 신흥리(新興里)와 서운면(瑞雲面) 신흥리(新興里)새로 일어나라는 뜻으로 1914년 편의상 만든 지명인데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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