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學門)으로 빛나는 가문
학문(學門)으로 빛나는 가문
  • 시사안성
  • 승인 2018.07.04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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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환일의 해주오씨 정무공파 이야기 – 덕뫼에서 세거 500년 – 9

해주오씨 정무공파 가문에서는 대제학 2, 부제학 2명을 비롯하여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대표적 인물은 다음과 같다.

 

(1) 오원(吳瑗1700년 숙종 26 ~ 1740년 영조 16)

공은 정랑공 오진주(吳晉周)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차중부 해창위 오태주(吳泰周)에 입양되었다. 호는 월곡(月谷)으로 문과에 장원하여 홍문관과 예문관 양관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증직으로 좌찬성을 제수받았으며 시호(諡號)는 문목(文穆)이다.

오원의 조부는 숙종 때 충신 충정공 양곡 오두인(吳斗寅)이고 외조가 농암 김창협이며 특히 조선시대 예학(禮學)의 대표적 학자인 도암 이재(1678년 숙종 4 ~ 1746년 영조22)의 처조카이자 그 문인으로 벌열지가(閥閱之家:국가에 공이 많고 높은 관직을 지낸 집안)에서 태어나 문학으로 명성을 떨쳐 영조때 대제학으로 당대 이천보, 남유용, 황경원과 더불어 문장 사대가의 일인으로 진정한 유신(儒臣)이란 평을 들었다.

오원의 학문관은 독서차제(讀書次第)를 강조하여 독서는 대학, 논어, 맹자의 순서로 하고, 소학을 읽을 때는 분발할 것을 촉구하며 경()을 중시하고 학문 방법으로는 성()을 강조하였다. 문집으로 월곡집147책이 있다.

 

문정공 순암 오재순
문정공 순암 오재순

 

(2) 오재순(吳載純1727년 영조 3 ~ 1792년 정조 16)

공은 정조 임금으로부터 순암(醇庵), 우불급재(愚不及齋)라는 호를 하사받는 등 정조 임금의 특별한 신임을 받아 전형(銓衡:인재를 시험하여 선발함)을 여러 차례 맡았고 문한(文翰: 문필과 관계된 업무)과 관계된 온갖 청직(淸職:주요업무 즉 홍문관,규장각, 예문관)을 두루 거쳐 이조판서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정(文靖)으로 당시 진정한 문신(文臣)이었다.

순암은 대제학 오원(吳瑗)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장인은 영의정으로 당대의 뛰어난 학자 이천보였으니 친가는 물론 처가까지도 명문거족(名門巨族)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과묵겸손하고 묵묵히 각고 공부(刻苦工夫:고생을 견디며 공부)에만 힘썼다.

순암의 학문관은 옛 성현의 학설을 자세히 탐구하여 밝히는 것을 중시하면서 학()은 알아 깨닫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라 설명하였다. 경전 중에서는 논어와 주역에 힘쓰고 주역에 더욱 주력하였다. 그의 강설(講說)은 옛 것을 추종하는데 역점을 두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을 좋아하지 말라고 강조하였다.

그의 문집 순암집(醇庵集)102책으로 1808(순조 8)에 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3) 오윤상(吳允常1746년 영조 22 ~ 1783년 정조 7)

공은 대학자 오재순의 장남으로 태어나 불행히 38세에 일찍 돌아가셨다. 증 이조참의로 호는 영재(寧齋)이다. 그는 품성이 화순, 온화, 겸손하고 효도, 우애하며 독실한 행실로 주위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고, 경전에 침잠하였다. 때문에 경술행의 명중사림(經術行誼名重士林: 경학과 바른 행동으로 명망이 두터운 유림)’이라고 칭송을 받았고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오윤상의 문학관은 시()에는 도연명과 두보를, ()은 한유와 구양순을 본받았고 학문하는 태도는 자수(自修)하면서 다독보다는 반복해 자주 보는 방법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절문근사(切問近思:간절히 묻고 생각함)하여 체득할 것을 또한 강조하였다. 경서 중에서 특히 논어를 좋아하고 대학과 중용에 깊이 침잠하였다.

오윤상 사상의 핵심은 경학에 있고 그의 경설(經說:대학 장구대전 중용장구 대전 소주(小註)까지 분석)은 조선 후기 경학 연구에 큰 보탬이 되었다. 문집으로 영재집(寧齋集)이 있다.

그의 배위 숙부인 광산김씨는 공이 돌아가신지 40여일만에 순절(殉節)하여 정려(旌閭)를 받은 열부(烈婦).

 

(4) 오희상(吳熙常1763년 영조 39 ~ 1833년 순조 33)

공은 정조 때의 대제학 순암 오재순(醇庵吳載純)의 차남으로 출생하여 숙부인 예조판서 오재소(吳載紹)에게 입양되었다.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로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노주(老洲)선생으로 일컬어진다. 특별한 사승(師承) 없이 공은 형 오윤상(吳允常)에게 수학하여 당시 김원행, 김양행 등에게 경학으로 촉망받는 학자로, 홍직필로부터는 노주의 학문은 4백년 유학의 결국(結局:일의 마무리)이라 칭송받았던 당시 대표적 학자였다.

노주의 학문관은 우선 경학(經學)을 공부하고 그다음 예학(禮學)을 공부할 것을 주장하였다. 경설(經說)은 주자설에 대하여도 이설을 제기하며 율곡 이이(李珥)의 학설도 비판, 수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성리학 범위 안에서 경서에 대한 해석의 차이였을 뿐 전적으로 성리학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공의 철학사상은 이기설(理氣說)의 범위 내에서 이()와 기()가 완전히 성격이 다른 이물(二物)이 아니라 하여 이기혼일적(理氣混一的)학설을 제시하면서 이()는 기()의 근본이고, ()는 이()의 재질이 된다는 이우위적견해(理優位的見解)를 표명하는 이기절충론자라 하겠다. 공의 저서로는 유자고(1816년 순조 16, 54)가 있다.

이것을 바탕으로 노주전집(4020)이 편찬되었고 이것은 한말에 노주의 증손 오준영(吳俊泳)2613책 목활자본으로 축소 편찬했다. 경앙사에 배향되었다.

 

(5) 오연상(吳淵常, 1765년 영조 41 ~ 1821년 순조 21)

공은 오재윤(吳載綸)의 아들로 생부(生父)는 오재순(吳載純)이다. 1811(순조 11) 영변부사로 재직할 때 홍경래난이 일어나자 민병을 이끌고 성을 수비하는 한편 태천을 탈환하고 적장 변태익(邊太益)을 주살하여 반란 진압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뒤 이조 참판과 부제학을 역임하고, 이조판서를 증직받았다. 호는 약암(約庵)이다.

 

(6) 오치우(吳致愚, 1789년 정조 13 ~ 1838년 헌종 4)

공은 연상의 아들로 관직은 통정대부 이조참의를 역임하고 헌종때 부제학에 올라 부자(父子)가 부제학이었다.

부자 대제학과 부자 부제학이 배출되어 가문의 영예가 더욱 빛났다.

 

(7) 오치익(吳致翼1790년 정조 14 ~ 1845년 헌종 11)

공은 노주 오희상(吳熙常)의 차남으로 관직은 통훈대부 합천군수를 역임하였다. 호는 경재(褧齋)로 가학(家學)을 계승하면서 경학(經學) 및 고증학(考證學)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경재는 부친 노주 오희상(吳熙常)이 당대 성리학의 대가였기 때문에 자연히 그 분위기에 훈도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노주와는 달리 성리학적 사변(思辨)보다는 고증학적인 학()에 치중하는 고증학자였다.

그의 학문관은 학문의 양대 지주를 경()과 사()로 파악하고 고거(古據)와 고증(考證)을 근거로 논설을 전개하였다.

이는 종전 성인과 주자 등 대가들의 경전 해석을 추종하던 성리학자와는 다른 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경재의 경서 해석방법은 종래 여러 설을 비판하며 고증적 방법으로 이를 비판시정하려고 노력한 것이라 하겠다.

경재의 학설은 조선후기 고증학과 경학 연구에 참고할 가치가 높다. 저술로는 시집,존고(문집형태), 경재잡고(만록형태)가 있다.

 

석농 오진영
석농 오진영

 

(8) 석농 오진영(石農吳 震泳1868년 고종 5 ~ 1944)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다. 가선대부 동지돈녕부사인 조부 어은공(漁隱公) 오치성(吳致性)이 이미 어린 공의 자질을 발견하여 과거 공부를 준비시켰다. 갑오개혁(1894년 고종31)으로 과거제가 폐지되고 사회가 양이화(洋夷化:서양오랑캐로 됨) 되어가는 현실 속에서 공은 과거를 단념하고 고향에 칩거하다가 간재 전우(艮齋田愚1841년 헌종 7 ~ 1922)와 사제의 의를 맺고 한 평생 스승을 적극 옹호하고 학문을 계승하며 실천한 대표적 제자이다.

호가 석농(石農)으로 세상에서는 석농선생이라 불렀다.

석농 사상의 특징은 유교를 보위하려는 위정사상, 스승 간재의 성사심제설을 골자로 하는 성존사상에 따라 주리설과 주기설을 절충하는 경향, 춘추대의를 표방하고 행동하려는 의욕을 보이나 급진보다는 점진을 택한 점이다.

해주오씨세보(2013)에 석농의 행적을 甲午以後陰居講學守義自靖受業干艮齋田公愚門이라 하였으니 갑오개혁이후 제자 들을 교육하며 의()를 수호하고 오랑캐에 물들지 않게 스스로를 다스렸다.

1964년에 석농의 제자들이 석농과 그의 스승 간재 그리고 노주 세 분을 모신 경앙사(景仰祠)를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에 건립하고 매년 음 310일 춘제를 드리며 세 분의 학덕을 기리고 있다.

 

오환일(해주오씨 정무공파 종중회장, 유한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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