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헌에 나타난 사당패 Ⅲ
고문헌에 나타난 사당패 Ⅲ
  • 시사안성
  • 승인 2018.07.03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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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남사당과 조선명창 바우덕이 - 4
송석하 촬영 외줄타기.1938년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송석하 촬영 외줄타기.1938년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사당은 표면상 노름꾼 및 하층계급(당시의 사회관습상의) 남자들의 술자리에서 가무를 하여 흥을 돋구는 것이지만 사싷은 그들을 상대로 매춘을 하는 것이며 매춘부 중에서도 최하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들 사당은 거사라 칭하는 남자와 부부관계를 맺고 의복 화장품 기타 일체를 거사로부터 지급받는 대신에 표객(嫖客:매춘 고객)으로 부터 받는 해우채(花代)는 몽땅 거사 의 소득 이 된다. 사당배 라는 한 단체를 조직함에 있어 그 기획자 이며 통솔자를 모갑(某甲)이라 하고 그 모갑이 조직한 단체에 각지로부터 사당 거사가 모여 그것이 한무리가 되어 마을에서 마을로 절에서 절로 유랑의 여행을 하면서 마을의 광장이나 절의 근처에서 노래나 춤을 추면 그것을 보고 표객은 모갑에게 한 사당을 지정하여 하룻밤 지내기를 청한다. 이때 표객으로부터 사당에게 준 해우채는 그대로 거사에게 돌아가고 또 거사는 얼마간을 모갑에게 주는 것이다.

 

송석하, 사당고, 조선민속 3, 1940

 

송석하는 1940사당고에서 위와 같이 사당은 거사라 칭하는 남자와 부부관계를 맺고, 기본적으로 남자들의 술자리에서 가무를 하여 흥을 돋우며 그것을 기회로 매춘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또 마을광장이나 절 근처에서 노래를 하고 춤을 추는데 그것도 또한 매춘을 하는 기회가 되며, 그 수입은 모두 부부관계를 맺고 있는 거사와 통솔자 격인 모갑에게 가는 구조로 그들의 일상생활은 상식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기이한 집단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글에는 사당패들의 구성에 관한 중요한 단서가 하나 들어 있다. 사당패라는 단체를 조직함에 있어 그 기획자이며 통솔자를 모갑이라 하는데 그 모갑이 조직한 단체에 각지로부터 사당, 거사의 한 조가 참석하여 그것이 한 무리가 된다고 하였다.

1930년대 꼭두각시 인형 박첨지
1930년대 꼭두각시 인형 박첨지

즉 한 무리의 사당패라고 하더라도 항상 고정된 구성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독립된 1쌍의 사당거사들이 목적에 따라 수시로 모여 패를 이룬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모갑이를 기획자라고 하는 부분에서 이들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구성원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갑이 특별한 공연기획을 했을 때 선택을 받은 사당·거사만이 모여서 패를 꾸리는 방식으로 보인다.

이는 해방 이후 전문 걸립패들의 구성방식과 비슷한데, 화주가 특별한 목적을 정해 놓고 거기에 맞추어 전국에서 마음에 드는 기예자들을 모집하여 공연을 하다가 목적이 달성되면 해체를 하는 방식이다. 사당패의 구성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아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들은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여러 쌍의 사당거사들이 수시로 이합집산을 하는 조직일 가능성이 엿보인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는 사당을 여거사(女居士)’라고 표기한 기사도 있다. 이 기사만 가지고는 유랑예인집단을 지칭하는 말인지 단지 거사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여거사라는 말을 쓴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여자 거사란 의미로 여거사란 말을 쓴 것임은 확인할 수 있다.

남훈태평가
남훈태평가

남훈태평가같은 잡가에서는 암거사란 명칭을 썼는데 이 역시 여거사와 같은 말로 볼 수 있다. 사당에 대한 반대어로 남사당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면 거사에 대한 반대어로는 여거사 또는 암거사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어법상 사용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분화로 보인다.

 

홍원의(안성시청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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