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가는 안성의 공예 2 – 백동연죽과 갖신
사라져가는 안성의 공예 2 – 백동연죽과 갖신
  • 시사안성
  • 승인 2021.02.03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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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원의의 안성 민속 이야기

3. 백동연죽으로 유명한 안성

백동연죽(안성맞춤박물관 소장)
백동연죽(안성맞춤박물관 소장)

연죽은 담배통, 설대, 물부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담배통은 대통, 대꼬바리, 꼬불통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대나무로 만든 것을 통칭하여 연죽이라 하는데 설대가 없거나 짧은 것을 단죽또는 곰방대’, 긴 것을 장죽이라고 부른다.

연죽이 발달한 것은 영·정조 시대이며, 1819세기에는 금, , 백동, 오동, 칠보 등의 고급 귀금속으로 장식한 호화로운 제품이 만들어졌다.

그 후 일반인들까지 담배를 피울 수 있게 되자 연죽의 수요와 공급이 급격히 늘었고 조선 말엽과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전쟁 이전까지 전국적으로 널리 쓰였다.

안성은 백동연죽으로 유명한 지방이었다. 백동은 유기 제조기술의 하나로 구리에 니켈을 합금한 제품이다.

유기 공업이 발달한 안성에서는 공정이 가장 어려운 담배통과 물부리를 제작할 수가 있었고, 죽산지역에는 대나무가 나기 때문에 모든 재료들을 조달하기 쉬워 백동연죽 제작 기술이 발달할 수 있었다.

1912<매일신보>에 따르면 경기도에서 연초 재배가 가장 많은 곳을 양지군, 장단군, 안성군, 개성군, 용인군으로 나열해 안성을 경기도 3위의 연초 재배 도시로 꼽고 있다.

연초 재배가 많은 것과 백동연죽과의 인과 관계를 명확히 밝힐 수는 없지만 두 가지가 더불어 발달한 것은 사실이다.

담배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직후인 17세기 초라고 하니 백동연죽의 전래는 당연히 그 이후일 것이다. 한말 이래 백동연죽의 명산지는 동래·김천·남원·안성 등지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전통공예 대부분이 그렇듯이 이 중 어느 곳에도 그 유래가 명확히 알려져 있는 곳은 없다.

그러나 안성에서는 앞서 살펴본 군수 정만교 영세불망비의 후원자 명단에 연죽점(烟竹店)’이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1841년경에는 백동연죽이 이미 대표 공산품 중에 하나였으며 이를 생산하는 연죽점이 상당한 인력과 재력을 갖출 정도로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담배침(안성맞춤박물관 소장)

일제강점기 안성의 군지(郡誌)안성기략에는 연죽점이 안성유기 다음으로 중요한 공산품이라고 하였고, 1924년도 읍내면 동리(東里)에는 공장이 4개소 있다고 하였다.

백동연죽은 1921년 담배의 전매제가 실시되면서 잎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됨으로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는데, 전매제 실시 3년 후인 1924년에도 공장은 4개나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들의 실상은 상당히 어려웠던 듯하다. 19254동아일보에는 안성의 연죽공장 20호가 전부 실업상태에 들어있다고 하였다.

안성기략에서 19244개의 공장에 종업원수 15인이 남아있다고 한 것과 1925동아일보에 연죽제조공장 20호가 전부 실업상태에 있다고 한 것과는 상당한 괴리가 있다.

아마도 동아일보20호라고 한 것은 백동연죽이 가내 수공업이라는 특성상 백동연죽장 개인이 20명이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잎담배를 피우지 않고 필터가 달린 담배를 피우게 됨으로써 사실상 백동연죽의 실용성은 사라졌고 그때부터는 장식품으로 남아 지금껏 명맥을 잇게 되었다.

안성의 백동연죽은 양인석 선생이 1989년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면서 그 명맥을 이어갔지만 2008년 사망 이후 누구도 기술을 이어 받지 않아 무형문화재는 지정 해제가 되고 전승은 단절되고 말았다.

 

4. 시집가는 새아씨 발에 맞침인 갖신

갖신(안성맞춤박물관 소장), 신발바닥에 '안성'이란 낙인이 보인다
갖신(안성맞춤박물관 소장), 신발 바닥에 '안성'이란 낙인이 보인다

갖신은 가죽신의 다른 말로 꽃신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신발은 형태상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라고 하여 지금의 부츠처럼 목이 긴 신발을 말하는데 주로 관리들이 의례용으로 착용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 또는 ()’라고 하는 목이 없는 단화 형태의 신발을 말한다.

갖신은 가죽을 기름에 절여 제작되기에 유혜(油鞋)’라고도 한다. 보통 신발의 안쪽에는 한지와 가죽으로 넣고, 겉은 가죽에 비단을 싸서 만들고 앞의 코에 여러 가지 문양을 넣는다.

안성은 오래전부터 갖신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벽초 홍명희 선생이 19281939년까지 <조선일보>에 연재한 소설 임꺽정을 보면 칠장사 주지스님인 병해대사를 갖신 만드는 사람으로 묘사하였다. 갖신 만드는 사람은 갖바치라고 하여 천시하였는데 스님을 갖바치로 묘사한 것은 역시 안성이 가죽신의 본고장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안성의 갖신은 안성기략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속요에서도 알 수 있다.

 

안성갖신 반저름(半油鞋)은 시집가는 새아씨발에 마침이다

 

이 속요로 보아 당시 안성갖신의 주 종목은 기름에 절여 만든 유혜(油鞋)였으며 이는 시집가는 새아씨의 혼수품으로 사용할 만큼 유명한 제품이었음을 알 수 있으나, 일제강점기에 고무신이 들어온 후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안성에서 갖신을 언제부터 만들고, 언제까지 만들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어 정확한 제작 시기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안성낙원역사공원에 있는 1841년 군수 정만교 영세불망비 후원자 명단에 혜점(鞋店)이 나와 있는 것으로 볼 때, 당시 갖신 역시 이미 대표 공산품 중에 하나였으며 상당한 인력과 재력을 갖출 정도로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24년 발간된 잡지개벽에 따르면 안성유기와 백동연죽, 안성갖신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품목임에 틀림없다.

안성기략에 나타난 1924년 당시 공장에 대한 공장표(工場表)에 따르면 조선혜점(朝鮮鞋店)’이 읍내면 서리(西里)2곳이 있으며, 한 곳의 공장의 건평은 4, 자본금 550원이며 종업원수 3, 생산품 가격 300, 다른 한 곳의 건평은 5, 자본금 630, 종업원수 4인으로 나와 있다.

그리고 같은 책의 공산물(工産物)에 따르면 생산수량은 조선화(朝鮮靴) 6,240켤레, 가격은 9,850원으로 되어있다. 공장표와 공산물간 괴리가 있으나 그 이유는 설명하지 않고 있다.

어쨌든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안성갖신을 생산하는 곳이 남아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에 대한 구체적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

 

홍원의(안성맞춤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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