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가는 안성의 공예 1 – 안성공예에 대하여
사라져가는 안성의 공예 1 – 안성공예에 대하여
  • 시사안성
  • 승인 2021.01.20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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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 “안성맞춤 유기이야기”와 “안성 남사당과 조선명창 바우덕이”, “전조선 안성3대장”으로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홍원의의 안성민속이야기”가 “사라져 가는 안성공예”를을 주제로 연재를 재개한다. 독자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기대한다.

사라져가는 안성의 공예 1

 

 

유기도부장사(기산풍속도)
유기도부장사(기산풍속도)

 

안성 공예에 대하여

 

안성은 대구·전주와 더불어 조선 3대 시장이라고 했을 만큼 큰 시장을 이루었는데 이는 교통망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한양에서 해남으로 이르는 삼남길과 한양에서 동래에 이르는 영남길이 만나는 지점에 있어, 옛 사람들이 목구멍[인후:咽喉]’이라고 표현한 곳에 위치한 것이 바로 안성이다.

연암 박지원은 허생전에서 안성은 경상도·전라도·충청도 삼남의 교차하는 입구이며, 주인공 허생은 서울 부자 변씨에게 1만 냥을 빌려 모든 물건이 서울로 가는 길목인 안성장에서 과일을 매점매석하여 큰돈을 벌었다고 묘사하였다.

이는 안성장이 조선시대부터 물류와 교통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중요한 이야기이다.

물류와 교통의 중심지인 안성에서는 다양한 공예문화가 발달하였는데 1936<동아일보> 기사에 안성에서는 유기뿐만 아니라 옛날부터 까신(옛날 조선 가죽신)과 담뱃대와 조히()와 갓() 등이 많이 생산되어 안성이 옛날부터 상업지인 동시에 공산지로 이름이 높았던 터인데 이제 와서 이 모든 공산품이 거의 다 없어져 버린다 함은이라고 실려 있어 당시 유기와 더불어 가죽신, 담뱃대, 한지, 갓이 안성의 주요 공산품이었으나 점차 사라지는 추세 였음을 알 수 있다.

안성에 전해오는 속요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경기안성 큰아기 유기장사로 나간다 한닙팔고 두닙팔어 파는 것이 자미라

경기안성 아기 숟가락장사로 나간다 은동걸이 반수저에 깩기숟갈이 격이라

안성유기 반복자 연엽주발은 시집가는 새아씨의 선물감이라

안성가신 반저름(반유혜)은 시집가는 새아씨발에 마침이다

안성유지는 시집가는 새아씨의 빗집(梳入)감에 마침이라

 

1925년에 김태영 선생이 쓴 안성기략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와 거의 같은 속요가 192030년대 동아일보 기사에는 여러 번 나온다. 그리고 이 속요는 안성사람들이 지은 것이 아니라는 설명도 부가하였다.

따라서 반드시 안성에서만 불려지던 것이 아니라 안성이외의 지역에서도 어느 정도는 통용되는 노래였었던 것 같다. 여기에 언급된 안성의 중요한 공예품이 바로 유기와 가죽신, 그리고 한지이다.

안성의 유기는 새삼 거론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지금도 유명하지만, 이 속요를 통하여 안성가죽신도 시집가는 새아씨가 혼수로 준비할 정도로 유명한 물품이었음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빗집은 한지로 만들었기 때문에 보개면 기좌리의 한지가 아주 유명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빗집 같은 경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전혀 전해지지 않고 가죽신 한 켤레와 속요만이 남아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안성에서는 다양한 공예문화가 발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안성 공예문화에 대한 연구는 주로 유기를 대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를 종합하여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에 따라 본고에서는 안성지역 공예사에 대해 역사적 문헌을 중심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천년의 기술 안성유기

장명사지 탑지석 및 청동원통사리함
장명사지 탑지석 및 청동원통사리함

2004년 경기도박물관에서 실시한 죽산면 봉업사지(奉業寺址)에 대한 발굴 조사 결과 동종을 주조했던 주형(鑄型) 시설로 추정되는 터가 발견되었다. 이로 보아 안성지역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 사이에 이미 청동제품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안성에서 유기를 언제부터 만들기 시작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문헌자료는 아직 없다. 안성유기와 관련하여 지금까지 밝혀진 가장 오래된 기록은 죽산의 장명사지오층석탑(長命寺地五層石塔)에서 출토된 탑지석에 나타난다.

장명사지오층석탑 탑지석은 1972년 사리장치와 함께 출토되었다. 이 탑지석은 고려시대 탑지석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이를 통해 이곳이 장명사(長命寺)’라는 절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탑지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統和十五年四月二十七日國泰人

安願以長命寺五層石塔造立香

徒姓名女後○○○○○○○○

棟梁大行明係佳校慰戶長安帝京金正崔

○○博士禮靈○○○金位等

料色光師玄肯 鍮匠 只未知

 

통화 15(997) 427일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편안하기를 염원하면서 장명사 오층석탑을 세웠다.

향도의 성명은 다음과 같다. ○○○○○○○○

동량 대행명계가교위 호장 안제경, 김정,

○○ 박사예령○○○김위등

요색광사 현긍 유장 지미지

 

글자의 마모가 심하여 전체 문구를 해독할 수는 없으나 마지막의 유장 지미지라는 글자는 명확히 보인다. 이 내용으로 보아, 고려 초기인 997년에 이미 안성 죽산 지역에는 유기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유장이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유장이 당시 무엇을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함께 출토된 청동원형사리함을 만들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동종과 같은 불구류를 만들었을 수도 있다.

안성유기와 관련된 기록은 조선 중기 문신인 택당(澤堂) 이식(李植) 선생의 택당집(澤堂集)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택당집
택당집

택당집을 살펴보면 1614년에 이식 선생이 천장(遷葬)과 관련하여 전라도에서 올라와 직산과 안성에 하루씩 머물고 양평 쪽으로 이동을 하였는데, 이때 안성에서는 유점(鍮店)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의 유점은 유기를 만들기도 하고 판매도 하는 곳이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당시 안성에서는 이미 유기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마을이 형성될 정도로 유기 제작이 성행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15세기 후반 성종대의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경기도에서는 수원과 광주, 양주에 외공장 소속 유기장이 각 1명씩 있었다고 나와 있다. 이 말은 국가에서 운영하는 유기 공방은 안성에 없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안성의 유기장들은 관청 소속이 아닌 개인적으로 상업 활동을 하는 장인들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에는 중앙 관청에서도 안성유기의 뛰어남을 인정하여 안성의 유기장을 징발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은 의궤(儀軌)에 잘 나타난다. 의궤는 조선시대에 왕실이나 국가에 큰 행사가 있을 때 후세에 참고할 수 있도록 일체의 관련 사실을 그림과 글자로 정리한 책이다. 1744년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혼례식을 정리한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에는 안성에 뛰어난 유기장이 많이 있다는 기록과 함께 김태강’, ‘김가노미등 구체적인 장인의 이름까지 나온다.

1857년 순조의 비인 순헌왕후의 장례식을 정리한 국장도감의궤(國葬都監儀軌)에도 안성 유기장의 이름이 나온다. 1863년 철종의 국장도감의궤에도 이노성’, ‘이억철’, ‘이계근’, ‘엄득천’, ‘강사홍’, ‘김종록등의 이름이 안성의 유기장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는 안성의 유기장들이 국가의 중요한 행사에 불려갈 정도로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쳤다고 볼 수 있다.

안성낙원역사공원 내 군수 정만교 영세불망비
안성낙원역사공원 내 군수 정만교 영세불망비

안성유기에 대한 기록은 문헌뿐만 아니라 비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안성 시내에 있는 안성낙원역사공원에는 일제 강점기부터 많은 비석들을 모아 놓았는데 그중에는 1841년 안성군수를 지낸 정만교(鄭晩敎)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있다.

이 비석의 뒷면에는 유점(鍮店), 주물점(鑄店), 수저점(匙店), 갓점(笠店), 연죽점(烟竹店), 대장간(冶店), 목수점(木手店), 가죽점(皮店), 갖신점(鞋店), 마록점(馬鹿店) 10여종의 수공업자 명단이 등장한다. 방짜유기를 뜻하는 유점(鍮店)과 주물유기를 뜻하는 주점(鑄店)이 같이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안성에서 방짜유기와 주물유기 두 종류 모두 만든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1886년 안성군수를 지낸 심헌지(沈憲之)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는 마모가 심하여 비석의 전반적인 내용을 판독하기는 어렵지만 유주(鍮鑄)”라는 글씨가 보여 안성의 유기장이 이 비석을 세우는 데 어떠한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그 당시 안성에서는 군수의 불망비를 세워줄 정도로 수공업자들의 영향력이 컸었고, 그 중에서도 유기점의 영향력이 더욱 강성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으로 보아 안성에서는 이미 고려시대에 유기장이 존재했고 17세기 초반 유기를 전문으로 만드는 마을이 형성될 정도로 유기 산업이 발달하였다. 18세기 중반에는 국가에서도 인정하는 유기장들이 다수 거주하는 유기 산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성유기가 유명하게 된 이유는 높은 품질 때문이다. 1934<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안성 유기는 옛날부터 견고하고 미려하며 정교한 특색이 있는 까닭에 전국적으로 환영을 받아 왔다고 하였다. 즉 안성유기의 특징은 황해도 등 다른 지역의 유기보다 가공을 한층 더하여 모양이 미려하고 정교하며 견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로는 안성장을 통해 판로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고 지리적으로 가까운 서울의 반가에서 사용할 그릇을 주문받아 제작할 수 있었던 유통 부분에 있다.

그리고 상인을 천시하지 않고 장인들을 존중해 주는 안성 특유의 문화 역시 안성유기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안성의 유기 장인들 중에는 농업에 종사했던 평민들뿐만 아니라 실권한 양반들도 있었다. 이처럼 양반 계급에 속한 사람들이 상업이나 공업에 종사하는 경우는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현상이다.

조선시대 안성 유기상은 직접 등짐을 지고 전국의 시장뿐만 아니라 가정마다 방문 판매를 하였는데, 여기에는 여성 유기상도 존재하였다.

1925년 정관해 선생이 쓴 관란재일기(觀瀾齋日記)에는 유기 파는 여자가 집에까지 와서 판매한다고 기록되어있다. 당시 정관해의 집은 용인이었기 때문에 기록 속의 유기상은 안성 유기상일 가능성이 높다. 경기민요 <건드렁타령>에는 경기 안성 처녀는 유기 장사로 나간다지, 주발대접 방짜대야 놋요강을 사시래요.”라고 하여 처녀들이 다른 지역으로 유기 장사를 나가서 주물유기와 방짜유기를 판매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1928년 일제 강점기에 간행된 잡지 별건곤팔도여자 살림살이 평판기에서 안성 유기상에 대해 말하길, “안성 여자들은 대개 유기를 남자 보부상과 같이 짊어지고 각지로 돌아다니며 파는데 그 행상인 중에는 종종 미인도 있어 이 세상에 향그러운 이야기 거리를 끼치는 일도 많다.”라고 기록했다.

이렇듯 안성유기 판매상에 여성들이 많았던 것도 안성유기의 명성에 일조를 한 것으로 보인다. 보부상, 장돌뱅이 등 전국을 대상으로 이동 판매하는 사람이 대부분 남성들임에 반하여 유기상들은 여성들이 같이 다니기 때문에 주방용품인 유기의 주된 고객인 주부들에게 더욱 잘 다가갈 수 있었을 것이다.

현재 안성유기의 맥을 잇고 있는 사람은 국가무형문화재 제77호 김수영, 안성시 향토무형문화재 제2호 이종문, 안성시 명장 제1호 이종오 등 3인이다. 이들 장인들을 보살펴주고 새로운 안성유기장이 더욱 많이 나오도록 만드는 것이 다시금 안성맞춤이라는 안성유기의 명성을 높이고 안성이 발전하는 길일 것이다.

홍원의(안성맞춤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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