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헌에 나타난 사당패 Ⅱ
고문헌에 나타난 사당패 Ⅱ
  • 시사안성
  • 승인 2018.06.26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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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남사당과 조선명창 바우덕이 - 3

조선왕조실록에는 사당의 출신성분을 실행한 처녀들과 지아비를 저버린 사납고 모진 처들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정절을 잃어버린 사람들로 조선이라는 시대상에 적응하기 힘든 여자들이라는 특징이 있다. 남자를 거사라고 하고, 절에 머무르며 놀고 사는 여자들을 회사라고 하였는데 회사는 아마도 사당의 다른 말이거나 이와 비슷한 부류의 여자를 일컫는 말로 보인다. 이들은 농업에 종사하지 아니하고 음탕한 짓을 한다는 내용으로 보아 공연활동을 하고 다닌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남자는 거사여자는 사당이라고 하여, 사당과 거사의 의미가 남녀 성별로 명확히 구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청룡사의 역사를 알려주는 중수사적비의 기록에는, 불량답 시주자 명단에 김씨해왕과 심정이라는 두 명의 사당 명단이 나온다.

청룡사 사적비
청룡사 사적비

 

불량답은 부처에게 올리는 쌀을 생산하는 절에 딸린 논밭을 일컫는 말로서 사당들이 논밭을 시주할 정도의 재력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사당패의 원조격인 청룡사에서 舍堂이라는 한자를 썼다는 것도 중요한 점이다.

위백규의 존재집에는 비구니나 거사가 사당이 되는 것을 금한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모든 비구니와 거사가 사당이 되는 것은 아니며, 그들 중 일부 특별한 사람만이 사당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사당의 출신성분은 실행한 여자들뿐만 아니라 비구니도 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이들이 사당패에 들어가는 것을 사당이 된다고 표현하였는데, 이는 사당사당패라는 무리의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일성록에는 거사·사당과 같은 무리들이 삼남에 두루 있는데 1만 명에 가까워 작으면 명화적이 될 것이고, 크면 역모를 할 것이라고 하여 그 숫자가 매우 많으며, 정부에서는 그들을 경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거사와 사당은 승려도 아니고 속인도 아니지만, 도적질도 하고 시장에서 놀이도 한다고 하여 사당패가 놀이패라는 구체적인 표현이 나온다. 그리고 삼남이 더욱 심하며, 종전에 금지 하였으나 다시 전과 같다는 대목은 금지를 하면 없어졌다가 단속이 느슨해지면 다시 나오는 집단임을 암시한다.

비변사등록에는 사당과 거사가 중도 아니고 속인도 아니라고 하여 중은 아니지만 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여, 연려실기술에서 말하는 사당·거사의 개념과 같으며, 삼남에 주로 분포함을 알 수 있다.

이옥이 지은 사당이라는 글은 현재까지 밝혀진 사당패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묘사한 가장 이른 시기의 글이다. 그는 여기서 사당은 손에 부채 하나를 가지고 장터와 집집을 다니며 노래를 하는 집단이며, 거사는 사당의 우두머리를 일컫는다고 하였다. 따라서 사당이라는 말은 구성원 개인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집단을 의미하는 말로도 쓰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거사는 소고를 두드리며 염불을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심우성 선생이 사당패 조직에서 거사는 실제 연희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과는 배치된다. 그리고 사당은 가무를 행하고, 여기에 더하여 남자를 농락하는 사람으로 표현하여 매춘을 하는 사람임을 암시하였다.

목민심서에는 조창마을에서 금해야 할 무리에서 단연 첫 번째로 꼽히는 것이 바로 우바이인데, 이들을 방언에 사당이라 한다고 하여 우바이=사당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학규의 낙화생집에는 사당 구성원을 사당인이라고 불렀다는 점이 주목된다. 조선시대 기록에 사당패라고 하는 무리를 뜻하는 한자 기록이 거의 나오지 않는 상황으로 보아 라는 명칭 보다는 다른 말이 쓰였을 것이라 추정되는데, 이 글의 문맥으로 보아 사당이라고 하는 것은 사당패를 말하고, 그 구성원은 사당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교방가요
교방가요

교방가요에는 사당들은 <산타령>, <유령놀량>, <방아타령>, <화초타령> 등 타령류를 부르는데 그것을 잡요라고 한다는 것과 그러한 노래가 점점 일반에 까지 퍼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에 따라 사당패들은 주로 잡요라고 하는 노래를 잘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위의 자료들을 종합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 사당의 출신성분은 실행한 처녀와 지아비를 저버린 사람으로, 유교 사회라는 관점에서 보아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하기 힘든 정절을 잃은 아녀자 그리고 비구니이다. 사당과 거사들의 숫자는 정부에서도 경계를 할 정도로 상당히 많았으며, 이들은 금지를 하면 없어졌다가 단속이 느슨해지면 다시 나오는 집단이다. 사당패는 전국에 걸쳐 분포하지만 특히 삼남지방에 집중적으로 모여 있으며, 시장을 따라 다니며 공연을 한다.

사당이 된다는 말은 사당패가 된다는 무리의 개념으로 사용하였으며, 사당패의 구성원을 말할 때는 사당인이라고 하였다. 사찰을 근거로 하는 비구니나 거사가 사당패가 되는데, 정부에서는 사당이 되는 것을 영구히 금지하고 법을 위반한 자는 재산을 몰수하고 공노비로 삼을 정도로 철저히 단속을 하였다.

 

홍원의(안성시청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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