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도에 월드컵 홍보 차 중국을 다녀오다(2)
2002년도에 월드컵 홍보 차 중국을 다녀오다(2)
  • 시사안성
  • 승인 2018.06.25 06: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종권의 사진에 담긴 이야기-10

< 2018 FIFA 러시아 월드컵, 한국대표팀 일정 계속 관심...... 오늘도 치맥 먹으면서 축구 볼 수 있을까? > 어느 신문 기사의 한 구절이다. 또 한 주간을 축구로 뜨겁게 달굴 것 같다.

한국은 내일 모레 27일 밤 11(현지시간 오후 5) 러시아의 카잔에서 전차군단독일과 경기를 끝으로 조별예선을 마무리한다.

히딩크의 마술(?)4강까지 올라갔던 지난 2002월드컵은 결코 잊혀 지지 않을 듯하지만 요즘 러시아 월드컵에 출전한 한국 대표 팀을 보는 국민들은 왠지 아슬아슬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손흥민 기성용 선수에게 기대를 걸어본다.

지난 2002 월드컵 4강전을 회고하면, 스페인의 우세 속에서 한국이 승부차기 끝에 스페인을 꺾은 열전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당시 62520;30분에 서울 월드컵 경기장에서 치룬 독일과 대한민국 전에서는 비록 1대 영으로 패했지만 박지성, 안정환이라는 스타를 만들어 냈다.

62920;00시에 가졌던 대한민국과 터키의 3, 4위전은 비록 23으로 역시 패했지만 한국 축구의 앞날은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지난 월드컵 대망의 결승전에서는 독일과 브라질이 겨룬 끝에 20으로 브라질이 우승하는 쾌거를 누렸다.

그렇지만 결승전을 일본에서 치루게 한 것은 한일 월드컵의 옥의 티라고나 할까, 결승전을 일본에 넘기는 대신 대회 공식 명칭은 Korea/Japan으로 표기하는 것으로 사전에 일본과 합의한 결과였다.

일본은 항상 한국의 속을 썩이고 있다. 지난번 남북 정상회담, 북미 정상회담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던 과정에서도 소위 일본 패싱을 면하려는 듯 독도를 할퀴며 미국을 붙들고 늘어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국민홍보위원 위촉장 사본(개인 소장)김대중 정부 시절 국정홍보처장 명의로 위촉된 2002년 2. 1일자 위촉장을 A4용지 크기로 축소 복사한 사본이다(양식 한 장이라도 그 때 그 시절의 시대상을 알 수 있는 근 현대 자료라고 생각한다)
국민홍보위원 위촉장 사본(개인 소장)김대중 정부 시절 국정홍보처장 명의로 위촉된 2002년 2. 1일자 위촉장을 A4용지 크기로 축소 복사한 사본이다(양식 한 장이라도 그 때 그 시절의 시대상을 알 수 있는 근 현대 자료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지난 호부터 국민홍보위원 자격을 띠고 16년 전인 2002 한국월드컵 홍보 목적으로 중국을 다녀왔던 기행문을 쓰고 있다.

말이 월드컵 홍보라고 하지만 정부 보조금으로 국외 출장을 기획해서 관광을 다녀온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역사는 역사이고, 공부는 공부다.

 

< 4일째 일정 > -만리장성(萬里長城) 견학-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만리장성은 6,377km(당시 제공된 자료)나 되는 장성으로 소위, 달에서도 보인다는 유일한 인조건물이다. “정상에 오르지 못하면 대장부가 아니다” “일생에 한번은 만리장성에 올라라는 모택동의 교시대로 대략 2억 명의 중국인들이 다녀갔다는 자랑거리처럼, 장성의 웅장함은 과히 경이로울 정도였다.

() 정상과 정상들을 연결하는 대역사의 뒤안길에 얼마나 많은 중국인들의 희생이 따랐을 까 하는 기우보다도 왜 이처럼 험난한 공역(公役)을 부과 해야만 했을까 에 의구심이 먼저 간다.

진시황(秦始皇) 시대로부터 1,000여 년 간의 긴 시간을 두고 시작한 장성, 학술지에 의하면 그 이전부터 축성이 시작되었고 북방 유목민족인 몽고족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해 대역사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만리장성의 축조목적은 의외로 군사적인 목적이 아니었다는 아이러니함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몽고족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등반(登攀)이라는 심리를 십분 이용한 전략이었고 이러한 대 공역을 통해 민심수습과 국력 과시용이라는 설명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부언하면 중국은 울타리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해석해보면 중원지구를 중심으로 동쪽은 바다, 서쪽은 3,000km의 진령(秦岺)산맥이 자리 잡고, 남쪽은 양자강이 있어서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로서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북쪽은 높은 산악지대로 낮은 준령의 계곡들이 많아서 북방의 오랑캐를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만리장성 정상의 이정표 사진(개인 소장)해발 888m 높은 산 꼭대기위에 더 높이 모셔진 영웅 모택동 사진과 함께 만리장성 이정표가 교시를 상징하듯 우뚝 서있다
만리장성 정상의 이정표 사진(개인 소장)해발 888m 높은 산 꼭대기위에 더 높이 모셔진 영웅 모택동 사진과 함께 만리장성 이정표가 교시를 상징하듯 우뚝 서있다

만리장성의 특징 중 하나는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돌무덤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만리장성의 축조에 사용된 벽돌 한 장 한 장에 사람 하나씩 희생을 함께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당시 보수작업을 시행하면서 나온 수많은 유골들의 형태를 분석한 결과 엄청난 희생이 따랐다는 것이다. 요즘 중국인들이 만리장성을 가리켜 중국인들의 영혼이 살아 숨 쉬는 곳라고 말하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옛말에 하룻밤을 자더라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라는 말이 있다. 그 옛날 만리장성을 쌓으러 부역(負役) 떠나는 장정들이 영원히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죽게 됨으로, 떠나기 하루 전날 까치장가를 보내 연정을 풀게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 말이 생겨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지금까지 만리장성을 완전히 탐사한 사람이 없다고 하니 그 유구함은 영원하리라 본다. 한번은 북경대학교 학생들이 탐사를 시도하다가 2/3정도 답사를 하고 중단하면서 남긴 말이 만리장성에 오르니 유가무가(有價無價)”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는 바둑에서 더 이상 수를 짚어 놓을 수 없을 경우에 사용되는 용어지만 그만큼 진퇴양난의 극한 상황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아마 대학생들이 만리장성 답사를 끝내 마칠 수 없었던 이유는 장성의 6,377km나 되는 길이 때문이 아니라 그 보존상태가 열악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일행이 찾은 곳은 잘 다듬어진 대리석으로 축조되어 상태가 양호하였으나 일부 구간의 경우는 벽돌 등으로 조성되어 있는 경우가 있어 그 훼손상태가 심각하고 아예 유실되어 흔적도 없는 부분들도 많았다.

정상에 오른 홍보위원 일행 사진“장성에 오르지 못하면 대장부가 아니다, 일생에 한번은 만리장성에 올라라”는 모택동 교시를 실천한 성취감에서인지 정상에 가장 먼저 오른 일행들은 모두 함박웃음이다(2002. 5. 24일 오전부터 오후 내내)
정상에 오른 홍보위원 일행 사진“장성에 오르지 못하면 대장부가 아니다, 일생에 한번은 만리장성에 올라라”는 모택동 교시를 실천한 성취감에서인지 정상에 가장 먼저 오른 일행들은 모두 함박웃음이다(2002. 5. 24일 오전부터 오후 내내)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 보는 만리장성은 확 트인 시계(視界)가 천하를 다 얻은 듯 하였고 육중한 대리석과 가지런하게 빈틈없이 깔려있는 벽돌들의 경사면이 너무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한시도 다른 생각이나 행동을 할 수 없도록 압도적이었다.

특히 도처에 벌거벗은 민둥산은 일부 조림사업이 시행되고 있었지만 아직도 붉은 속살을 드러내고 있어 끝내 아쉬움을 뒤로하고 하산해야만 했다. 그 옛날 모택동이 죽으라면 죽는 척이 아니라 그냥 이유도 없이 죽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니, 그가 모든 산을 개간하여 밭으로 만들라는 계시에 의하여 이처럼 중국의 산야가 황폐화된 이유라는 말이다(한편 가이드가 중국 영웅인 모택동을 비판하는 것을 보고 중국 공산주의도 언론의 자유가 많이 발전(?) 했는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궁전 십삼릉(十三陵) 견학-

연맥산맥 줄기 팔달령에 이어진 산기슭의 평원에 위치한 13릉은 명나라 3대 영락황제부터 말대 승정황제(1409~1644)까지 약 200여년을 거쳐 만들어졌다. 이곳에는 13개의 황제릉이 있고 전체면적이 40여 평방킬로미터나 된다. 이중 개봉된 능은 13대 황제의 정릉(定陵)으로 그의 두 황후와 함께 잠들어 있는 능이다. 6년간의 긴 공사 끝에 1957년에 지하궁전까지 발굴하였다.

13대 황제 명신종(明神宗)10살에 등극하여 48년간 통치를 하였지만 진시황 다음으로 유명한 폭군이었기에 능 앞에 세워진 비석은 공적비가 아니라 무자비로 보였다. 우리들이 보통 배려나 용서 없이 심한 구타를 당할 때 무자비하다는 말을 쓰는 것도 중국의 폭군 중 폭군인 명신종 황제를 일컫는 것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사신으로 간 송시열(宋時烈)이 중국의 지원군을 파견해달라고 자금성을 방문하여 수십 일 동안 단식으로 버티자 마지못해 나와서 사신을 배알하고 중국의 이여송(李如松) 장군을 파견하였다는 것이다. 지금도 우리나라 충북 괴산 화양동에 세워진 송시열선생의 공적비는 중국의 13대 황제와 관련된 공적이라는 이야기이다.

명신종(明神宗)의 지하궁전이 발굴 되었을 때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느 날 농부가 감 밭에서 일을 하다가 우연히 돌에 그려진 그림에 입구와 출구가 새겨져 있던 것을 계기로 발굴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때 발굴을 담당한 공산당의 행정 관료가 무지막지하게 작업을 해버리는 바람에 황제의 관 뚜껑과 유골들을 밭에다 방치해 버렸는데 인근 농민이 무엇인지 몰라서 주어다가 문짝으로 사용하였으며 그날 이후 그 가족들과 동네 사람들이 이상하게도 모두 죽어갔다고 한다.

그 후 새로운 학술조사에서 관 뚜껑으로 판명되어 회수되었고 그런 일이 있은 이후부터 명 3릉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에 대궐 문을 나서려면 13번의 박수를 치는 풍습이 생겨났다고 한다.

우리 일행도 액을 물리치고 황제처럼 부자가 되게 해 달라는 의미에서 13차례의 힘찬 박수를 치면서 다음 견학지로 발길을 재촉하였다.

이어서 우리 일행은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모처럼 고급 관광버스 안에서 중국을 공부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주용기(朱鎔基)가 경제개방정책을 시행하면서 인구가 8억만 됐어도 조국을 정치적으로 잘 할 수 있었을 텐데!”라는 말을 남기면서 그래도 13억 인구가 모두 먹고사는 것만 해도 기여한 것이 아닌 가라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중국에는 지금도 3천만 명에 달하는 <검은 아이>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 검은 아이는 호적 등록이 안 된 1~18세까지의 아이들이 학교를 전혀 다니지 못한 문맹자들로 그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한족(漢族)의 경우는 한 자녀만 호적등록이 가능하고 나머지 자녀는 무적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중국은 2016년부터 저출산, 고령화 현상을 해결하기 위하여 둘째 출산을 전면 허용하였다).

그에 비해 조선족은 2명까지 자식을 둘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소수민족에 대한 배려로 점차 줄어가는 소수민족들의 인구를 보전하려는 정책의 일환이다. 이처럼 중국은 검은 아이들의 경우처럼 문제의 심각성이 사회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이상 징후를 앓고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속칭 자식 3명만 키우면 집 한 채 지을 자재들을 모아 올 수 있다고 한다. 무적자일망정 아이들이 집에 들어올 때마다 절대 빈손으로는 들어오지 않게 하는 관습에 기인하는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중국 사람들의 집 안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깔끔한 정원에 잔뜩 쌓여있는 돌무더기와 가지런히 정돈된 나무더미를 볼 수 있었다.

북경에서 우리 방문단을 그렇게도 친절하게 안내하던 조선족 청년 이O, 그는 중국에서 태어나 북경대학까지 나온 엘리트였다. 우리는 요즘 중국을 방문하는 한국의 관광객들의 일부 추태(돈 뿌림, 유흥, 쾌락, 거들먹거림 등)에 대하여 좋지 않은 인식이 혹시 있을 까 해서 조국의 땅인 한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져보았다.

그는 한국이 없었다면 조선족이 없었을 것이고 조선족들의 배움의 기회는 물론 일자리까지 없었을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에게 취업의 기회가 많아 졌으며 앞으로 자라나는 우리 조선족의 미래는 한국의 성장과 번영에 달려있습니다. 저를 비롯한 모든 조선족들은 영원한 조국 한국을 사랑합니다. 잘 지켜봐주시고 우리에게도 많은 관심을 가져주십시오라는 그의 대답에 숙연함과 멀쑥함을 느꼈지만, 이내 편안하고 포근하며 같은 민족으로서의 열정적인 애정을 가지고 박수를 보냈다. 또 일일이 악수를 나누면서 고마움도 표시하였다.

이화원(頤和園)의 행랑에서 찍은 사진서태후가 해군 경비 은 1억 냥을 탕진하여 야심차게 지은 290만 평방m의 어마한 면적을 가진 청나라 황제의 가든 겸 행궁이다. 이화원에는 중국인 관광객들로도 들끓는 곳이다
이화원(頤和園)의 행랑에서 찍은 사진서태후가 해군 경비 은 1억 냥을 탕진하여 야심차게 지은 290만 평방m의 어마한 면적을 가진 청나라 황제의 가든 겸 행궁이다. 이화원에는 중국인 관광객들로도 들끓는 곳이다

 

< 5일째 일정 > -이화원(頤和園)과 곤명호(昆明湖) 방문-

1750년에 건조된 이화원은 건륭(乾隆)황제가 모친의 생신을 축하하기위해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원나라 3대왕 시절인 1293년에 지질학자 곽수리에 의해 설계되어 13세기말부터 서너 개의 늪지대로 되어있던 이 지역을 파기 시작하였다 한다. 명조와 청나라 6대까지 정권이 바뀌어도 450년간 변함없이 파낸 곳이 곤명호이고 이 일대를 중심으로 조성된 별장 겸 행궁이 이화원이다.

이화원과 관련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서태후(西太后)이다. 아편전쟁 때 이화원은 영국, 프랑스군에 의해 약탈당하고 훼손된 것을 서태후가 북해함대의 해군 경비 은 1억 냥을 남용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서태후가 탕진한 자금은 일본의 견제를 위하여 모아온 국방자금이었다. 이러한 한사람의 실수로 일./.러 전쟁이 일어났을 때 청은 무참하게 무너지게 되었고 일본은 대륙진출의 발판을 다지는 호기가 되었다.

서태후는 누루하치(天命帝)를 멸망시키기 위해 부패정치를 의도적으로 했다고는 하지만 결국 중국인들을 일본에 넘겨준 적대행위를 저지른 황후로 기억되고 있으며 엄밀히 따지자면 서태후는 아시아 전체의 공적(公敵)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서태후에 관하여 더 이야기하자면, 12살 때 궁녀로 들어가 갖은 술수를 다 써서 황제의 환심을 얻어 황태후가 되었고 아들 둘을 낳았으며, 정실인 동태후(정실 황후가 머무는 궁전이 동쪽에 있다고 하여 동태후라 불렀고 서태후는 서쪽에 있는 후실궁전에 있었으므로 서태후라 불렀다고 함)를 자기아들이 4살 되던 해에 초청하여 극약을 처방한 음식을 먹여 2주일 만에 죽게 한 후 정권을 장악하고 수렴청정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인수전(仁壽殿)은 서태후가 정무를 보던 곳으로 보관되어있는 유품들이나 흔적들을 유리문 안을 통해 관람할 수 있었다. 그 후 서태후는 1908년 자신이 유폐한 광서(光緖)황제가 죽자 이틀 후 부질없는 생의 멍에를 벗어던지고 세상을 하직하였다고 한다.

곤명호(昆明湖)를 뒤로하고 찍은 필자 사진서태후와 이화원의 사연을 고이 간직한 바다 같은 호수, ‘쿤밍호’를 뒤로하며 여행을 접으려니 왠지 아쉬움에 젖었다(2002. 5. 25일 오후)
곤명호(昆明湖)를 뒤로하고 찍은 필자 사진서태후와 이화원의 사연을 고이 간직한 바다 같은 호수, ‘쿤밍호’를 뒤로하며 여행을 접으려니 왠지 아쉬움에 젖었다(2002. 5. 25일 오후)

 

이화원 곳곳에서는 곤명호를 파면서 나온 기암괴석들이 정원에 잘 정리되어 있었고 사방에서 중국인들이 기체조하는 모습을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의 정연한 몸동작에는 여유와 정감이 담겨져 있는 모습이었다. 한마디로 중국인들의 일상생활 속에는 무질서 속에 질서가 숨 쉬는 자연의 진리가 배어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화원 전체면적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호수 곤명호에서 유람선을 타고 주변 경관을 둘러보면서 호수에 관한 신비스런 내력을 이해하려 했지만 미련한 인간들의 부질없는 욕심이 얼마나 많은 서민들을 괴롭혔을까하고 생각하니 그리 즐거운 구경거리는 아니라는 마음이 앞서게 된다.

서태후와 이화원의 사연을 고이 간직한 곤명호의 드넓은 호수, 아니 바다를 가로질러 달리는 유람선상의 시원한 바람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 없건 만 왠지 아쉬움 같은 서글픔에 한 번 더 뒤돌아보는 일과를 끝으로 중국 여행을 마무리하자는 듯 재촉하는 천진 공항행 버스에 몸을 넘기고 이내 펜을 접는다.

 

< 중국 여행의 기행문을 마치며 >

만만디(幔幔的)’ 그 옛날부터 내려오던 사고방식, 행동양식인 느긋함을 여러 곳에서 접할 수 있었던 여행이었다. 중국인들은 혹시 불만이 있어도 이를 털어놓지 않고 오히려 나라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민족성을 가지고 있다. 언젠가는 자기도 잘 살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이 팽배해있는 절대적 가치를 숭상하는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국가도 이를 활용하여 만만디 식 사회균형 유지정책을 펼치는 나라, 이곳이 중국이었다는 생각이다.

2001년 말 현재 은행에 예치된 예금 잔고가 1,220조원으로 소비가 없는 상태로 절약하여 모아두는 국민들의 근성 때문에 중국정부는 각종 소비촉진정책을 펴고 있지만 실효가 없다고 한다. 문제는 은행에서 잠자고 있는 예금만이 아니라 개개인들이 은행도 못 믿는 나머지 각자의 집에 감추고 있는 지폐가 예치금을 상회한다는 것이다. 화폐개혁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을 들어도 중국인들은 끄떡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최근 중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달러에 대한 무조건적인 선호와 함께 점점 반입량이 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중국이 WTO 가입 이후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는 개인들의 달러 사재기 현상이 있으며 이를 빌미로 진짜보다 더 정밀한 위조 달러 등의 유통이 향후 커다란 사회 이슈로 다가올 것이라는 전망이다.

무섭게 변화하는 중국의 미래는 결코 밝지만은 않다는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열강들의 중국진출은 머지않아서 악성 디플레이션의 본산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남아도는 제품들의 85%가 중국 곳곳에 쌓여있고 이는 측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방대한 빙산의 일각 같아서 만약 거품을 빼게 될 어느 시점에 가면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세기적 공항이 닥칠 수 있다는 염려의 목소리가 서서히 대두되고 있다.

우리는 중국의 실체를 냉정할 정도로 예의주시하여야 한다는 충고를 들었다. 경기도청 고위급 공무원 출신으로 우리 일행과 상당한 시간 동안 함께 행동한 중국 소재 동국제약의 김O배 이사가 한 말처럼 맹목적인 중국 진출은 화를 자초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경고를 마음속에 넣으면서 중국여행의 소감을 정리한다. 중국은 과연 자본주의국가로 변신하였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요즘 남북대화의 성공으로 예측되는 북한의 변화를 낙관하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게 되는 셈이다. 중국 지도부는 최근 들어 중화민족 대부흥이라는 구호를 자주 내세우고 있다. 개혁, 개방 이래 되찾은 민족적 자부심의 발로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이런 기류가 만리장성과 사합원(四合院)이란 주택구조에서 나타나듯 전통적 닫힘의 구조로 치달을 것인지, 아니면 개방을 기조로 하는 열림의 구조로 갈 것인지에 대하여는 중국을 들여다보는 많은 사람들이 예의 분석하게 될 것임을 예측하면서 중국 기행문을 닫는다.

 

손학규 경기도지사와 국민홍보위원 기념사진31대 지사 임기 중(2002. 7. 1~2006. 6. 30)에도 우리 홍보위원들을 대상으로 매년 경기도 정책 홍보를 겸한 연찬회를 가졌다. 2004년 1월 29일 신년인사회를 마치고 도청 현관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이다
손학규 경기도지사와 국민홍보위원 기념사진31대 지사 임기 중(2002. 7. 1~2006. 6. 30)에도 우리 홍보위원들을 대상으로 매년 경기도 정책 홍보를 겸한 연찬회를 가졌다. 2004년 1월 29일 신년인사회를 마치고 도청 현관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이다

(필자는 교직에서 몸에 배었던 메모 습관으로, 가는 곳 마다 관광 안내서와 함께 팜플렛을 챙기느라 정신없었던 60대 초반의 열정을 지금에서야 돋보기안경 너머로 회상하게 된다. 그러나 경기도에서 방문단에게 제공해주었던 중국역사, 방문지 개황과 중국지도 특히 공동 제작한 보고서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자세한 기행문을 쓰지 못했을 것이라고 털어 놓으면서 당시 중국 시찰을 주관한 경기도 문화관광과 관계자의 노고에 고마움과 찬사를 보낸다).

박종권(교육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