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 국유지 소작권을 인정한 일제 - 매일신보 1911년 9월 기사
죽산 국유지 소작권을 인정한 일제 - 매일신보 1911년 9월 기사
  • 봉원학 기자
  • 승인 2018.06.2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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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1910년~1945년) 안성관련 신문읽기 – 9

이번에는 지난 기사에 대한 보충 설명부터 하고 시작해야 겠다.

지난 번 기사에서  매일신보 1911년 6월7일 3면 1단 기사와 관련해 가산면(加山面) 내동(內洞)”에 대해 어느 마을인지 알기 어렵다는 기자의 판단에 대해 안성의 향토사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임영일 선생께서 설득력 있는 의견을 제시했다.

가사면(加士面) 내동(內洞)”이었을 것이라는 견해다. 1911년 당시 행정구역상 안성에는 가사면 내동마을이 있었다. 이마을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내동유방(流芳) 두 마을을 합해 현재의 내방리’(內芳里)‘가 된다.

내동은 마을 사람들이 안골이라고 부르는 마을로 진천임씨(鎭川林氏)의 집성촌이다. 이에 임영일 선생은 기사에 등장하는 임봉희(林鳳熙)‘()가 돌림자로 가산면 내동은 당시의 가사면 내동, 현재의 보개면 내방리 안골마을로 추정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기자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사실 일제강점기 신문읽기는 기자의 식견이 부족해 이렇듯 여러 독자와 전문가의 참여로 풍부해 질 수 있다. 연재를 시작하면서 밝혔듯이 안성시민, 그리고 각계 전문가의 많은 참여와 지도편달을 간절히 소망하며 임영일 선생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매일신보 1911년 9월 7일 2면 6단
매일신보 1911년 9월 7일 2면 6단

19119726- 竹山 小作人喜悅

경기도 죽산군청에셔는 거 827일 오후 2시부터 국유지 소작인 약 7백인에 대하야 국유지 소작 인허장 수여식을 거행하얏는대 소작인은 종래로 소작권의 불확실함으로 면장 등의 방해점이 불소하더니 금에 인허장을 수하야 소작권이 확실한 고로 희열을 불이한다더라.

조선말에 이어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농민, 특히 소작농의 고통중 하나였던 불확실한 국유지 소작권에 대해 인허장을 통해 소작권을 확실하게 보장해주었다는 기사다.

이 기사를 통해 죽산지역에서 농민항쟁과 동학농민운동이 활발했던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다.

황성신문이나 대한매일신보 등 사료를 보면 안성 그중에서도 죽산지역 농민들의 저항은 대단한 것이었고 동학농민군의 활약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이러한 전통이 의병운동 나아가 일제강점기 일제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난다. 이 기사를 통해 죽산지역에서 농민들이 저항했던 이유 중 하나가 면장 등 당시 지배층의 수탈이 심해 이에 대해 소작인 등 농민들의 불만이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제는 그러한 점을 간파하고 소작권을 확실하게 하는 조치를 취함으로 민심을 얻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매일신보 1911년 9월 12일 3면 1단 - 광고

191191231- 광고

선고 장경숙이 본년 4월에 동양생명보험주식회사 경성지점과 생명보험의 계약을 체결한바 불행히 본년 6월에 별세하셧는대 보험계약에 기인하야 보험금액 일천원을 정히 영수하얏사오며 겸하야 동사의 정확함을 피보험인 첨언에게 품고함. 안성 장윤근

19119123면에는 광고기사가 등장한다. 내용을 보면 보험회사를 선전하는 내용인 듯 한데 기자의 식견이 짧아 전후 맥락과 배경을 이야기하지는 못한다.

다만 당시 이미 생명보험회사가 영업을 하고 있었고 신문광고를 통해 영업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광고에 안성사람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안성사람이 등장하는 것은 역시 당시 안성이 상업도시로서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던 사실이 적용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매일신보 1911년 9월 20일 2면 6단
매일신보 1911년 9월 20일 2면 6단

191192026陽智蠶業傳習 근황

양지군 은사수산소에서는 본년도에 조선 부녀의 잠업전습생을 양성하야 명년도부터 실행을 계속한다는대 금회에 전습소명을 양지군 여자잠업전습소라 개칭하고 잠업을 장려할터이라더라

기사에 등장하는 양지군은 안성의 고삼면을 비롯해 용인시의 백암면, 원삼면, 양지면을 포괄해 1899년 발행된 양지군읍지에 의하면 11개면 63개 마을이 있었다.

용인에서 1963년 안성으로 편입된 고삼면(古三面)은 양지군(陽智郡)에 속해 있던 고동면(古東面), 고서면(古西面), 고북면(古北面) 등 세 개의 면이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합해져 생긴 면()이다.

기사에 등장하는 잠업전습소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파악하지 못했다. 현재의 용인시 행정구역일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기사를 통해 양지군에서는 일제가 준 은사금을 잠업전습소를 만드는데 사용해 잠업을 장려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매일신보 1911년 9월 22일 2면  6단
매일신보 1911년 9월 22일 2면 6단

191192226- 安城 陰竹間 道路

경기도청에서관하 안성으로 기점야 죽산 급 음죽 양군에 개통하는 도로를 확장차 축하기로 결정하얏다는대 인부는 기 부근 인민으로 하야곰 교체 응역케 한다더라

죽산과 음죽간 도로를 확장하는데 그 인부는 인근 주민으로 하여금 하게 한다는 기사다.

현재의 죽산면과 광혜원을 연결하는 도로가 아닌가 생각된다. 기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 노동력을 주변 주민들에게 전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 이러한 노역은 댓가가 따르지 않는 것으로 강제노역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가 능력이 되지 않으면 고생하는 것은 주민이다. 오늘날도 이러한 행태가 이름만 바꾸어 횡행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매일신보 1911년 9월 24일 2면 5단
매일신보 1911년 9월 24일 2면 5단

191192425柳參與官 시찰

경기도 참여관 유혁노씨는 양평, 여주, 이천, 음죽, 안성, 죽산, 양성, 진위, 과천 등 각군의 사무를 시찰하기 위하야 서기 임익상씨를 대동하고 일간 발정할 터이라더라

기사에 등장하는 유혁노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개화파인 박영효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다녀오기도 했으나, 명성황후 시해사건때 일본군을 이끌고 왕궁에 침범하는 등 이후 행적은 친일행보를 걸었고, 결국 일제치하에서 경기도 참여관, 충북지사 등을 역임했고 퇴임후에는 경제분야에서 친일활동을 했다.

107년전의 신문기사를 통해 우리는 유혁노라는 친일파 인물에 대해 알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다.

매일신보 1911년 9월 24일 2면 6단
매일신보 1911년 9월 24일 2면 6단

191192426村田分隊長 시찰

촌전 경성 제이헌병 분대장은 작 22일부터 5일간 예정으로 수원 급 안성방면을 시찰하기위하야 작일에 출장하얏다더라

 

당시 치안을 담당했던 헌병 분대장이 경성 즉 지금의 서울에서 수원과 안성방면을 시찰하기 위해 출장하였다는 기사인데 후속기사가 없어 단순한 시찰인지 당시 수원이나 안성쪽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일제의 다른 기록에 혹시 무슨 단서가 남아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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