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전당(退全堂)의 시원(始原)과 이건(移建)
퇴전당(退全堂)의 시원(始原)과 이건(移建)
  • 시사안성
  • 승인 2018.06.20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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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환일의 해주오씨 정무공파 이야기 – 덕뫼에서 세거 500년 – 7
퇴전당 현판(우암 송시열의 갈필)
퇴전당 현판(우암 송시열의 갈필)

 

퇴전당은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 246번지에 위치한 해주 오씨 정무공파 종택으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5호로 지정된 고택이다.

이 고택의 처음 위치와 건축자, 고택의 명칭 유래, 이건 시기와 건축한 인물, 중수 사실 등에 대하여 단편적인 기록만 있을 뿐 그 기록마저도 일치하지 않아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렵다.

다만 해주오씨 선조들의 문집, 연보, 족보, 고로(古老)의 증언 등 한정된 자료이지만 이를 분석, 검토한 후 인용하여 문제를 고찰하려고 한다.

이는 해주 오씨들이 덕봉리에 정착한 시기와 그 번성했던 현상을 이해하며 후손들의 자긍심을 북돋는데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특히 여기에서는 다음 세 가지 자료가 중심이 될 것이기에 여기에 제시하면서 검토하려고 한다.

 

자료 A 백천당집천덕산기(pp 5~6)

나의 맏형이 천계 을축(1625년 인조 3), 병인 (1626년 인조 4)년간에 관직을 떠나 고향에 돌아와 정락암을 독서하는 곳으로 삼고, 집허정, 소나무와 돌, 완주암을 산책하며 시를 읊조렸다.집허정 아래 동남쪽에 퇴전당이 있으니 나의 오대조가 처음 으로 지은 것인데 그 후 대대로 벼슬하며 제사도 드렸다. 지금부터 100여 년 되었다. [숭정 12(1639년 인조 17)] (백천당 25세시)

 

자료 B 농재집』 「퇴전당 중수기(pp 589~595)

양성 천덕산의 남쪽 덕뫼마을에 높직한 집으로 퇴전당이라는 액자를 걸은 것은 우리 선조 전생서 주부군이 건축한 것이다.주부군은 흉인의 화를 만나 물러 와서 보전하지 못하고 먼 땅에 유배되어 돌아갔으나 정명(正命 : 생각이나 언행이 바른 생활)을 잃지는 않았으니 그 또한 온전한 절개가 되는 것이다. 그 후에 정무공이 여기에서 출생하고, 여기에서 자랐고, 여기 에서 배워서, 조정에 나가 벼슬하고, 세상에 이름을 나타냈으니 세상에서는 드디어 정무공의 집이라 알게 되었다.그 집이 처음에는 농재공 덕파루의 서쪽에 있었는데 충정공이 지금의 터로 옮겨 세웠고 송우암 선생이 큰 붓으로 액자를 썼으니 이 또한 무게를 더하게 된 것이다. 농재공은 중국이 오랑캐 됨을 마음 아프게 여겨 우암 송선생과 천하사를 의논하면서 강개 분발하였다. 벼슬에서 뜻이 맞지 않으면 문득 질병을 핑계로 이곳으로 물러왔고 늘그막을 보내려 했으니 송선생의 글씨는 반드시 그때 쓰게 된 것이다.(1935년 농재공 8세손 진영 지음)

 

자료 C 천파문집』「연보(p 448)

천계 6년 병인년(1626년 인조 4) 공이 35세일 때 청주목사를 구하여 이에 임명되었다. 선산이 가까 워서 편안하였다.가을에 청주목사를 마치고 양성 으로 돌아왔다. 덕산 아래에 퇴전당을 짓고 백가의 서적을 쌓아두고 늙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읽으려 했고 스스로 천파거사라 호를 붙였다. ‘집허정백련정완주암호순대가 모두 공이 소요하고 독서 하던 곳이다(동생 핵이 삼가 씀).

 

1) ‘퇴전당의 시원

해주 오씨들이 양성 덕봉리에 정착하게 된 것은 11세 오현경 (吳賢卿: 전생서 주부) 때부터이다. 그 묘소가 양성 고성산 동쪽 기슭 소요곡에 있고 그의 부와 조부의 묘가 용인 만현에 있었고(두 분의 묘는 2006년 덕봉리로 이장), 증조의 묘가 용인 지곡에 있는 것과는 다르고 그 후손들의 묘도 양성 덕봉리에 집중되어 있다.

이로써 주부공이 용인 기흥 지역에서 양성 덕봉리로 이주한 것이라 추정된다.

해주 오씨들이 덕봉리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시기는 오경운 (직장공)이 풍산심씨와 결혼한 것으로 추측되는 1515년부터 유세창의 고변사건이 일어난 1525(중종 20)사이의 어느 해로 추정되며, 그때 지은 집에서 그의 후손들이 계속 거주 하였고 주부공의 증손 오정방(吳定邦)이 현달(顯達)하여 가선 대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었고 임진왜란 시 공훈으로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기록되는 등 세상에 명성을 떨쳤다.

정무공 오정방이 임진왜란, 인조반정 등 혼란기에 제족이 온전하게 보존되고 이제 은퇴하기에 이르렀다고 하여 이집을 퇴전당(退全堂)이라 불렀다.

그 후 숙헌공 오빈(吳賓羽) 생존시 임인년(1662)에 우암 송시열이 갈필로 쓴 퇴전당(退全堂)이란 현판을 선물하자 이를 내걸고 당호를 정식으로 퇴전당이라 불렀다.

숙헌공(吳賓羽)은 우암 송시열과 지우(知友:마음이 통하는 친한 벗)로 벼슬에 뜻이 맞지 않으면 질병을 핑계로 이곳으로 물러왔고 늘그막을 한가롭게 보내려고 했다.

이런 이유로 우암 송시열이 덕뫼 옛 고향집에 내려온 숙헌공에게 현판을 선물한 것이다.

 

2) 초기 퇴전당의 위치

초기 퇴전당의 위치는 명확하게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위에 제시한 자료 집허정 아래 동남쪽에 있었다.” “농재공 덕파루 서쪽에 있다는 기록을 유념해 볼 필요가 있다.

고로(古老)들의 증언에 의하면 집허정은 농재공(숙헌공) 산소 뒤편 현 숙헌공 10세손 오용환의 묘가 있는 곳이고, 덕파루는 성오문(省悟門) 앞 현 오세각씨 집터라고 한다.

집허정의 동남쪽은 덕봉리 251번지 일대이고 그 서쪽은 덕봉리 252번지 일대로 현재 공터가 있는 곳이다. 이를 정리하면 덕봉리 251번지와 252번지에 퇴전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퇴전당의 이건(移建)

퇴전당을 현 위치 덕봉리 246번지로 이건한 인물과 이건 시기에 대하여는 천파공이 천계 6년 병인(1626년 인조 4) 가을에 청주목사를 마치고 양성에 돌아와 천덕산 아래에 퇴 전당을 짓고라고 하는 기록(천파문집, 년보p 448 자료 C)과 충정공이 퇴전당을 이건했다는 기록 즉 퇴전 당은 덕파루의 서쪽에 있었는데 충정공이 지금 터로 이전하여 건축했다’(농재집』 「퇴전당 중수기pp 589~595 자료 B)는 서로 다른 설이 있다.

또한 건축한 시기는 충정공이 경신년(1680년 숙종 6)에 그 아들 태주가 명안공주와 결혼한 때부터 명안공주가 졸 ()하는 정묘년(1687년 숙종 13)사이의 어느 해로 추측할 수 있다.

충정공은 셋째 아들 오태주가 명안공주와 국혼하여 왕실과 인연을 맺게 된다. 때문에 고향 옛집 퇴전당은 비록 공주가 기거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너무 옹색하고 초라해 대외적으로 체면이 서지 않아 새로 집을 지으려고 하였을 것이다.

마침 1682(숙종 8)에 공이 경기관찰사를 제수받게 되었다. 이때 관할구역인 이곳에 건축에 필요한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때 퇴전당을 현 위치로 옮겨 지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우암이 써서 선물한 옛집의 현판을 이곳에 옮기고 당호를 옛날대로 퇴전당이라 한 것으로 추정된다.

 

퇴전당 전경(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5호)
퇴전당 전경(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5호)

4) ‘퇴전당의 중수(重修)

퇴전당이 이전 건축된 것은 1682(숙종 8)으로 추정할때 현재까지 330여 년이나 되니 여러 차례 수리했을 것으로 생각되나 중수 사실은 단지 250여 년이 지난 1935년에 중수한 기록과 최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후 부분적으로 수리한 기록만 있다.

1935년에는 퇴전당건물이 오래되어 재목이 썩고, 지붕이 새며, 건물이 기울어져 붕괴될 지경에 이르렀으나 걱정만 할 뿐 수리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이때 백천당 10세손 주사 오명환과 숙헌공 10세손 오성환이 중수하자고 발의하고 각각 재물을 내놓고 종중에서도 물건을 대어 공사를 착공하였다.

여러 일가들도 각각 힘닿는 대로 협조하여 공사는 반 년 만에 완료되었다. 이때 방과 마루 담장을 수리하여 보기 좋게 되었다.

이때 유사는 숙헌공 9세손 오선근으로 공사 일체를 담당 감독하였다.

그 후 60여 년이 지나 1999년에는 경기도에서 주관하여 기와, 서까래, 문짝 등을 수리하였고, 2007년에는 서까래 중방 기둥 일부를 교체수리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퇴전당은 해주오씨들이 긍지로 여기는 고택이며 이곳에 정착한 사실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건물이다. 문화재로 오래오래 보존되기를 기원한다.

 

참고문헌

 

덕봉집2009

농재집단기 4331, 1982

천파문집1989

백천당집

 

오환일(해주오씨 정무공파 종중회장, 유한대 명예교수)

*편집자주 : 지난주 "오환일 의 해주오씨 정무공파 이야기"가 사전예고없이 휴재되어 독자분들께 사과드립니다. 6.13지방선거와 관련 기사가 넘친 관계로 휴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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