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당패란 남자들로 이루어진 사당패를 말한다.
사당패는 조선 중기에 생겨나 주로 사찰 주변을 근거지로 삼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하는데, 여자인 사당들이 전면에 나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남자인 거사들은 소고 장단을 두드리는 유랑예인 집단이다.
사당이라고 하면 여자들을 지칭하는 말이므로 특별히 접두사 ‘여’자를 붙이지 않아도 당연히 여자를 지칭하는 말인데, 개화기 즈음에 남자들로만 구성된 남사당이 생겨나자 이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여사당이라고도 불렀다.
조선 후기 사당패들의 근거지로 알려진 곳은 안성 청룡사 외에도 하동 목골, 함열 성불암, 창평 대주암, 담양, 옥천, 정읍, 동복, 함평 월량사, 강진군 사당리, 남해 화방사, 황해도 은율 구월산 등 여러 군데가 있다.
그런데 안성과 은율을 제외하면 모두 전라도와 경상도에 속하는 남쪽 지역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사당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는 않지만, 기록상 보이는 표기는 시기와 문헌에 따라 다양하다.
사당에 대한 표기에 대하여 일제강점기 민속학자인 송석하 선생은 「사당고」라는 글에서 사당(社堂), 사당(舍堂), 사당(捨堂), 사정(舍正), 사당(社黨), 사당(舍黨) 등으로 부른다고 다양한 명칭을 제시 하였다.
이보다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신재효의 판소리 사설집 「변강쇠가」에서는 가리내패, 아기네들 및 사당(寺黨)이라는 명칭이 나타나고, 개화기의 신문 및 문집에는 사당(沙當), 사당(沙㜭), 사당(師黨) 등의 명칭이 확인된다. 심지어 조선시대 민화에는 간사할 사자를 쓰는 사당(耶黨)이라는 표기까지 있을 정도로 다양하다.
이렇게 통일되지 않고 다양한 표기를 한다는 점은 한문을 아는 양반은 관심이 없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오히려 한발 더 나아가 일부러 외면한 것으로도 보인다.
지금은 1968년 심우성 선생이 쓴 남사당-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제40호에 따라 문화재청에서 남사당(男寺黨)이라고 한자를 붙여 자연스럽게 사당(寺黨)으로 통일 되었다.
이 사당에 대한 어원을 살펴보면, 18세기 말에 저술된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비구승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는 ‘사중(四衆)’이라고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우바새를 ‘거사’, 우바이를 ‘사당’이라고 한다” 하였다.(한자 발음상 優婆塞는 ‘우파새’, 優婆夷는 ‘우파이’이나, 불교에서는 이를 ‘우바새’, ‘우바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夷와 尼는 혼용하여 쓰기도 한다)
또 19세기 초반에 저술된 정약용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보면 “걸사는 머리를 깎지 않은 승려로 우리말에 거사라 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비구는 걸사인데 위로는 법을 구걸하고 아래로는 음식을 구걸하며, 그 처를 우바니라고 하는데 방언에 사당이라 한다”고 하였다.
즉 남자승려는 비구승, 여자승려는 비구니, 절에 살지만 승려가 아닌 남자는 거사, 절에 살지만 승려가 아닌 여자를 사당이라고 불렀고 이를 절에 기거하는 4가지 부류라고 사중(四衆)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거사는 승려는 아니지만 절에 살면서 법이나 음식을 구걸하는 남자이며, 사당은 절에 살지만 승려가 아닌 여자인데 그들은 부부관계를 맺고 사찰에서 특수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홍원의(안성시청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