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 전조선 3대시장 안성장 8
마지막으로 – 전조선 3대시장 안성장 8
  • 시사안성
  • 승인 2020.08.27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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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원의의 안성민속이야기
1924년 안성시내 전경
1924년 안성시내 전경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안성장이 급성장한 것은 조선 중엽 이후이며, 가장 전성기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이다. 안성은 삼남지방(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가는 교통의 요지였고 천안이나 진천으로부터도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시장이 번성하였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에다 안성맞춤이라고 하는 유기, 그리고 각종 공예생산지라는 전통이 만나 독특한 지역적 문화를 이루었다.

안성장의 번성은 경기도에 시장을 금하는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안성은 현재는 경기도이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충청도와 경기도를 오가는 등 사실상 서울에서는 꽤 멀리 떨어진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서울의 시전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시장을 금할 때에도 서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은 사실상 눈감아 주었는데, 이때 교통이 좋은 안성시장이 급격히 발전하게 된 것이다.

안성낙원역사공원
일제강점기 안성낙원역사공원

공예품의 발달도 안성장과 함께 발전하여 왔다. 유기를 비롯한 백동연죽, 한지, 갖신 등 안성에서 생산 하는 품질 좋은 공예품이 각광을 받을수록 안성장은 점점 커져갔다. 그리고 안성인의 상인기질도 빼 놓을 수 없다. 며느리나 딸들을 유기장사로 내보내고 한 닢, 두 닢 파는 것을 재미로 느끼고, 양반 계층에서도 장사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중상주의적 사고방식이 안성장을 더욱 번성하게 만든 것이다.

안성장은 18세기에 들어오면서 가장 번성을 하였으나, 18세기 후반에 들어와 쇠퇴를 하기 시작 한다. 그 이유는 역설적이지만 안성장이 번성한 반대의 이유이다. 우선 경기도에 시장 금지령이 내려 졌을 때 서울에서 가장 먼 안성이 먼저 발전했지만, 시장 금지령이 느슨해지면서 주변에 점차 경쟁이 되는 큰 시장이 들어선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위협은 수원시장의 등장이다.

정조는 화성을 건설하고 수도를 옮기려고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화성을 대 도시로 만들려고 그곳에 정착할 주민들의 집단이주 정책과 더불어, 화성상인에게 인삼 판매권을 주었다. 그리고 안성의 한지장인 등 여러 장인들에게 대출까지 해주며 이주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수원시장은 점점 확대되어 가는 동시에 반대로 안성의 시장은 축소되어 왔다.

우전 대장간
우전 대장간

둘째 인천 등 개항장 통하며 물류를 직접 이송 하였다. 전라도에서 나는 쌀 등 대규모의 운반은 육로를 거치지 않고 서해를 통한 인천항을 지나 서울로의 직접 이송이 가능해 짐에 따라 삼남으로 가는 인후(목구멍)로서의 지리적 이점이 감소하였다.

셋째 안성유기 및 공예품의 몰락이다. 일본이나 중국산 도자기가 들어와서 유기가 타격을 입고, 전매제 시행으로 엽연초(잎담배)를 피우지 않게 되면서 더 이상 백동연죽이 팔리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고무신이나 서양신발이 들어오면서 갖신(가죽신)이 없어졌다. 또 한지 생산도 대폭 줄어 보개면 기좌리에서는 일제강점기에 들어서자 방각본 생산으로 겨우 그 명맥을 이어가며 한지 대신 마분지 같은 것으로 대체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경부철도에서 빗겨감으로서 가장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지금도 안성에서는 안성발전이 안 되는 이유를 말할 때 첫 번째로 1905년 경부철도 계획 시 안성시민들이 반대하여 평택으로 노선이 바뀐 때문이라고 많이 아쉬워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당시 일본에서 조선 침략을 목적으로 만든 경부철도주식회사 입장에서는 안성처럼 땅값이 비싼 곳이 아닌 평택역처럼 인구가 적어 보상금이 적게 나가는 곳을 원하였다. 따라서 최초 설계 당시부터 안성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고 평택에서 천안, 대전을 거쳐 바로 부산으로 가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는 경부철도가 우리나라 국민들을 위하여 만든 것이 아니라 일본의 침략과 수탈을 원활이 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중앙정미소
중앙정미소

1924년 잡지 개벽에서는 안성장이 조선 3대시장이라고는 하지만 1929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의 시장경제에는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는 3대 시장으로 대구전주평양 혹은 대구김천강경 혹은 대구공주전주를 칭한다고 하며 안성장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다. 어쨌든 조선 3대 시장이라는 개념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와서 나온 말이고 조선시대에는 어느 문헌에도 나와 있지 않은 구전에 의한 개념이다.

따라서 조선 3대 시장이 어디인가를 한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어느 나라 역사를 막론하고 흥망성쇠가 있기 마련이거니와 한 국가 내에서도 시군의 흥망성쇠는 계속 있어 왔기 때문이다. 시장도 크게 흥하였다가 축소되기도 하였고 다시 홍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안성장이 조선 3대 시장이라는 말은 조선시대 600년간에 걸쳐서 대시장이었다기 보다는 1819세기에 가장 번성한 대시장이었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안성 낙원역사공원과 안성최초의 도서관
일제강점기 안성 낙원역사공원과 안성최초의 도서관

다시 안성장의 부흥을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제언하고자 한다.

첫째 안성유기를 되살려야 한다. 두원공고, 두원공대, 폴리텍대학교, 중앙대학교 등 관내에서 금속을 다루는 대학교와 산학협력으로 유기반을 만들고 장학금을 지급하여 양질의 유기인력을 배출한다. 그리고 현재 있는 유기점과 연결하여 취업 및 창업을 주선한다. 다음으로 안성유기연구소를 설치하여 디자인연구와 금속연구 그리고 효용성에 대한 연구를 하여 유기수요를 진작시켜야 한다. 이러한 사업이 마무리 되면 안성장에 유기를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유기전거리를 조성하여야 한다. 이는 전국에서 유일한 안성장만의 경쟁우위 요소로서 드라마, 영화, UCC, SNS 등 기업과 개인에서 촬영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방문할 것이다. 방문객이 많아지면 다시금 옛날과 같은 번성을 누리게 될 것이다.

둘째 군산이나 목포와 같은 근대 문화유산거리를 만들어야 한다. 2018년 필자가 구안성군청’(현 안성2동사무소, 등록문화재 제709)를 문화재로 만들 때 문화재청 문화재위원들이 안성에 내려와서 안성은 군산이나 목포에는 못미치지만 경기도에서는 가장 근대문화재가 많다는 증언을 한 바 있다. 안성 구도심에 몇 개 남은 근대 건축물을 문화재로 지정하고 사적 536호안 안성 도기동 산성까지 연결시킨다면 구도심을 관광지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홍원의 안성시청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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