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장의 쇠퇴 – 전조선 3대시장 안성장 5
안성장의 쇠퇴 – 전조선 3대시장 안성장 5
  • 시사안성
  • 승인 2020.07.17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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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원의의 안성민속 이야기
옛 안성터미널
옛 안성터미널

그럼 조선 후기 이렇게 발전한 안성장이 왜 그리고 언제 지금과 같이 쇠퇴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바로 주변 시장의 번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특히 안성에서 지역적으로 가까운 수원장의 급성장은 반대로 안성장의 쇠퇴를 촉진 시킨 직접적인 연관이 된다. 정조는 수원에 화성을 건설하고 신도시를 만들어 수도를 옮길 계획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신읍에 사람들이 모이게 하고 활성화를 시킬 방책을 마련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1790년 채제공은 수원 화성 새 고을에 백성을 모집하는 방법에 대하여 정조와 논의하며 1달에 6번 시장을 열고 장세를 면해 주고 교역을 허가하면 상인이 구름같이 몰려와 전주나 안성에 못지않을 큰 장이 형성될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 당시까지 안성장은 전국에서 가장 이름난 시장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안성의 장인과 상인들이 수원으로 집단 이주를 하게 된다. 안성장을 번성토록 한 장인들이 국가 정책에 의하여 수원으로 빠져 나가게 되면서 반대로 안성장은 쇠퇴를 가져오게 된다.

화성이 착공되기도 전인 1791년 정조는 안성의 장인 등 수원의 신읍에 거주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2만냥을 대여해 주라고 하는 등 적극적인 이주정책을 사용하였다.

일제 강점기 안성시내 삼광자동차앞
일제 강점기 안성시내 삼광자동차앞

그 후로도 안성의 장인들을 이주시키는 정책은 계속하여 추진되었다. 1792년 이번에는 안성의 종이를 만드는 지장(紙匠)에게 전례에 따라 4천냥을 대여해 줄 것을 청하는 비변사의 상소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총 24천냥이라는 거금을 들여 안성의 장인들을 수원으로 이주시키면서 안성시장의 공예품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때의 장인들이 어떠한 장인이라는 내용은 없지만 안성의 유명한 유기장, 가죽신 만드는 혜장, 종이만드는 지장 등이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안성장은 공예품 산지라는 잇점은 점차 줄어들고, 반대로 수원시장이 급속하게 크는 계기가 된다.

19세기 초의 안성시장은 조선 15대 시장에 포함되어 있었다. 1808년정부 재정과 군정을 기록한 책 만기요람에는 경기의 송파장, 안성 읍내장, 교하 공릉장, 은진 강경장, 직산 덕평장, 전주 읍내장, 남원 읍내장, 평창 대화장, 황해도 토산 미천장, 황주 읍내장, 창원 마산포장, 평안도 박천 진두장, 함경도 덕원 원산장이 가장 큰 장이라고 하였다.

이는 안성장이 18세기에는 전국에서 이름난 시장이었던 것에 비하면 약간은 위축된 상태로 보인다. 안성장이 또 한 번 위축된 것은 개항 때이다. 조선에는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개항과 동시에 일본산 제품들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안성에서 주로 생산하던 유기, 건유혜, 백동연죽, 한지 등이 큰 타격올 입기 시작 하였다.

 

본래 安城鍮器하고 煙竹으로 하야窯業製品으로는 朝鮮이엿든 바 近年하야는 倭沙鉢이니 胡沙鉢이니 그 따위 外來品優勢함에서 安城鍮器는 그만 타격을 당하고 所謂 專賣品이니 煙草사용 嚴禁이니 하야 葉烟을 못먹게 되니 따러 安城 烟竹賣路하고 말엇고 安城乾油鞋가 유명 하얏스나 근래 所謂 洋靴고무신이니 그 따위로 하야 그만 쑥 드러가고 마랏다.

(본래 안성은 유기로 유명하고 연죽으로 유명하여 요업제품으로는 조선에 최고였으나 근년에 이르러는 왜사발이니 호사발이니 그 따위 외래품이 우세를 얻어 안성유기는 그만 타격을 당하고 소위 전매품이니 연초사용 엄금이니 하야 입담배를 못 피우게 됨에 따라 안성 연죽도 판매처가 끊기로 말았고 안성 가죽신이 유명 하였으나 근래 소위 양화니고무신이니 그 따위로 인하여 그만 쑥 들어가고 말았다.)

 

위 글은 19246월 개벽 47호에 나오는 기사이다. 산업화롤 먼저 시작한 일제에서 대량생산하는 값싼 물건들이 들어오면서 안성경제와 안성시장을 지탱하여 주는 공예품 생산이 급격히 위축된 것이다. 이렇게 점점 위축되어가던 안성시장온 20세기 초반에 들면서 또 한 번 위기를 맞게 된다. 육로로 운반하던 화물이 1905년 경부철도가 개통되고 나면서 철로를 통하여 운반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192574일자 동아일보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경기도 안성시장에서는 고래로 삼남화물이 집산되야 국내굴지의 대시장이 되었던바 경부철도가 개통됨에 따라 삼남물산은 직접 기차로 운반되고 안성시장에 집합되지 않음므로 시장이 점점 쇠퇴되었다.

 

그리고 1931211일자 동아일보 안성특별판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옛날부터 상공업이 번성하고 시장이 번창하여 국내삼대시장(대구, 전주, 안성1로치고 이틀 일해 安城장에 八道物貨 | 이라는 속요까지 진행하게 되었으니 이는 안성이 삼남교통의 인후로 地利를 어덧든 關係었으나 경부철도가 개통되자 모든 물화가 기차로 직접 운반되고 이곳에는 집산이 멸축되어 점차 시장이 쇠퇴하게 되었다.

(옛날부터 상공업이 번성하고 시장이 번창하여 국내삼대시장(대구, 전주, 안성의 하나로 치고 이틀(2) 이래(7) 안성장에 팔도물화가 벌여져 있다.| 라는 속요까지 진행하게 되었으니 이는 안성이 삼남교통의 목구멍과 같은 위치였던 관계였으나 경부철도가 개통되자 모든 물화가 기차로 직접 운반되고 이곳에는 집산이 멸축되어 점차 시장이 쇠퇴하게 되었다.)

안성우시장 축우매매상황
안성우시장 축우매매상황

1925년 안성기략에는 객주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경부철도 개통 이전에는 포목, 어물, 과일 기타 각종 물상객주가 있어 위탁매매, 어음인수, 할인, 대금 및 화폐의 교환 등을 하는 동시에 고용의 숙박 기타 상업상 알선을 행하더니 각지 물화가 직접 기차로 운반하게 된 후로는 물화의 집산이 소멸되고 상인의 판로가 축소되어 객주는 전폐되고 현재 몇 개가 남아있다고 하여, 경부철도 개통이 안성시장 몰락의 직접 원인으로 보고 있다.

경부선이 들어서면서 보부상의 도보에 의한 물화 운반에서 기차로 운반되는 일대 변혁이 일어나는데 안성은 경부선 노선이 지나가지 않아 조선시대 얻었던 지리적 잇점인 교동의 요지가 더 이상 통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우시장만은 일제강점기까지 상당한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이는 소는 철로로 수송 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안성장의 몰락은 수원 등 주변 대시장의 대두와 더불어 개항기 일본산 도자기 및 중국산 도자기 등의 수입품으로 인한 안성유기의 쇠퇴가 주요 원인이다. 그리고 전매제 실시로 연죽 등의 판로가 막혔고, 고무신 같은 서양 신발이 들어오면서 안성갖신의 판로가 막히는 등 안성에서 자랑하던 공산품의 수요가 더 이상 없어진 것이 중요한 원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경부선이 수원에서 평택을 거쳐 천안으로 지나가면서 안성은 물화의 집산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다.

 

홍원의 안성시청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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