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조선 3대시장 안성장 4 - 안성장과 같이 발전한 안성맞춤유기
전조선 3대시장 안성장 4 - 안성장과 같이 발전한 안성맞춤유기
  • 시사안성
  • 승인 2020.06.18 0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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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원의의 안성민속이야기
장명사지 탑지석 3D 스캔

안성시장의 발전에는 유기, 백동연죽, 제지, 피혁제품 등을 담당하는 각종 장인들의 물품생산이 큰 기여를 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안성유기가 가장 큰 역할을 하였다. 전통시대 대부분의 공업이 가내수공업이었던 비하여 유기공업은 상당한 대량생산체계를 갖춘 기업형 공업이었으며, 전국적으로도 가장 유명한 상품이기 때문이다.

장명사지 석불좌상
장명사지 석불좌상

안성에서 유기의 역사에 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으며, 그 중 언제 시작되었다고 하는 시원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아직까지 밝힐 수 없으나 가장 오래된 것은 죽산 장명사지 관련 기록이다. 장명사지는 관음당이라고 하는 옛날 절터를 말하는데 죽산면의 주택가에 위치하며, 이곳에는 파손된 불상이 남아 있다.

현재는 안성시에서 토지를 매입하여 문화유적지로 관리하고 있다. 1972년 이곳에서 나온 탑지석과 청동원형사리함으로 인하여 장명사지임이 밝혀졌다. 이곳에서 나온 탑지석은 현전하는 고려시대 탑지석 중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탑지석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統和十五年四月二十七日國泰人

安願以長命寺五層石塔造立香

徒姓名女後○○○○○○○○

棟梁大行明係佳校慰戶長安帝京金正崔

○○博士禮靈○○○金位等

料色光師玄肯 鍮匠 只未知

 

통화 15(997) 427일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편안하기를 염원하면서 장명사 오층석탑을 세웠다.

향도의 성명은 다음과 같다. ○○○○○○○○

동량 대행명계가교위 호장 안제경, 김정,

○○ 박사예령○○○김위등

요색광사 현긍 유장 지미지

 

1000년 이상 지난 탑지석이라 마모가 심하여 전체 문구를 해독할 수는 없으나 마지막의 유장 지미지라는 글자는 명확히 보인다. 이 탑지석의 기록으로 보아 고려 초기인 997년에 이미 안성 죽산 지역에 유기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유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유장이 당시 무엇을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함께 출토된 청동원형사리함을 만들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동종과 같은 불구류를 만들었을 수도 있다.

장명사지 사리장
장명사지 사리장

그런데 성씨인 ()’는 다만 또는 어조사란 뜻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성씨로 사용하는 한자가 아니다. 그리고 이름인 只未知라는 말을 풀이하면 다만 알지 못한다란 뜻이 된다. 사람이름으로 쓰기에는 너무 어색한 이름이다. 즉 유기장이 있기는 있었지만 이 탑지석에 기록을 하였던 사람은 유기장의 이름을 몰라서 지미지라고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시대에는 1614년 택당(澤堂) 이식(李植) 선생이 천장과 관련하여 전라도에서 서울 쪽으로 올라오면서 안성의 유점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당시 안성에서는 이미 유기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마을이 형성될 정도로 유기 제작이 성행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유점이 어딘지 지금은 알 수가 없다.

택당집
택당집

15세기 후반 성종대의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나오는 외공장 소속 유기장을 살펴보면, 경기도에서는 수원과 광주, 양주에 각 1명씩 있지만 안성에는 없었다. 이 말은 관청소속 유기장이 없었다는 말이지 안성에 유기장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명종실록(明宗實錄)에는 관청의 장인이 모자랄 때는 일반 장인들을 불러 썼다고 기록돼 있으므로, 안성에는 관청 소속 장인은 없었지만 개인적인 상업 활동을 하는 유기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에는 중앙 관청에서도 안성 유기의 뛰어남을 인정하여 안성 유기장을 징발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의궤(儀軌)’에 잘 나타난다. 의궤는 조선 시대 왕실과 국가의 행사가 끝난 뒤에 논의, 준비 과정, 의식 절차, 진행, 행사, 논상 등을 기록한 책이다.

사도세자 가례도감의궤
사도세자 가례도감의궤
순원왕후국장도감의궤
순원왕후국장도감의궤

1744년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혼례식을 정리한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에 안성에 뛰어난 유기장이 많이 있다는 기록과 함께 김태강, 김가노미 등 구체적인 장인의 이름까지 나온다. 1857년 순조의 비인 순헌왕후의 장례식을 정리한 국장도감의궤(國葬都監儀軌)’에도 안성 유기장의 이름이 나온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안성에서는 17세기 초반에 이미 유기를 전문으로 만드는 마을이 형성될 정도로 유기산업이 발달해 있었으며, 18세기 중반에는 국가에서도 인정하는 유기장들이 다수 거주하는 유기산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들 유기장이 의궤에 등장하는 때는 안성장의 발전과 궤를 같이하므로, 결국 유기의 번성은 안성장의 번성으로 연결된다.

193611일 동아일보에는 안성유기에 대한 기사를 싣고 안성유기의 쇠퇴는 안성의 쇠퇴라고 하였다. 이는 그만큼 안성에서는 안성유기의 자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일제강점기에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도 안성의 발전을 위하여 다시금 안성유기의 명성을 되찾으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홍원의 안성시청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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