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조선 3대시장 안성장 - 안성장의 발달2
전조선 3대시장 안성장 - 안성장의 발달2
  • 시사안성
  • 승인 2020.06.04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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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원의의 안성민속이야기
가죽신, 바닥면에 '안성혜점'이라는 낙인이 보인다. 안성에서 만든 가죽신 중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현재 안성맞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가죽신, 바닥면에 '안성혜점'이라는 낙인이 보인다. 안성에서 만든 가죽신 중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현재 안성맞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고문헌에 나오는 안성의 특산물 및 안성장에서 매매하는 물목은 다음과 같다. 다만 안성기략의 자료는 물목이 아니라 당시 상점을 말하는 것이나 안성 시장의 면모를 살펴보는 자료로 중요한 내용이므로 같이 수록한다.

제 목

발행년도

품 목

세종실록지리지

1454

오곡, 잡곡, 뽕나무, , 대추, 모과, , 느타리, 지초, 낙석(洛石), 연밥, 삿갓나물

신증동국여지승람

1530

(), , 자기, 안식향, 지황

임원십육지

1800년대 중반

안식향, 지황, 종이, , 가죽제품, 자기, 유기

대동지지

1864

붕어, , 종이 자기

여재촬요

1890년대

, , 도기, 지황, 자기, 안식향, 유기 연초, 연관, 한지, 쌀 사금

조선의 시장

1924

, , 가죽제품, , 미나리아 제비, , 해산물, 사탕, 잡화 등

안성기략

1925

포목점, 잡화점, 도자기점, 식료품점, 금은점, 재목점(材木店), 해산물점, 유기점, 건재약국, 미곡점 등

조선의 시장경제

1929

, , , 보리, 참깨, 석잠풀(水蘇), 삼베, 소금, 대추, , , , 유기, 철물, 사기, 버들고리, 목물, , 도롱이. 가죽신, , 돗자리, 맷돌, 다듬이돌, 나무절구, 밥상, 송아지

이러한 자료로 볼 때 안성장의 특징은 안식향이나 지황 같은 약재가 많이 나고, 유기공업이 발달한 지역답게 유기가 나오며, 보개면 기좌리 일원애서 만드는 한지가 보이며, 갖신 등으로 유명한 가죽제품이 보인다.

특히 세종실록지리지에서 보이는 뽕나무와 삼(), 조선 초기 권근의 양촌집(陽村集)에서도 등장하는 종목으로, 안성에서 이들을 재배한 역사는 상당히 오래되었으며, 안성장에서 판매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안식향, 지초, 낙석 같은 약재들이 재배된 역사는 상당히 오래되었음도 문헌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안성 낙원역사공원에는 역대 군수들의 선정비를 포함한 여러 기의 비석들이 세워져 있는데 여기에 안성장과 관련되는 내용이 담겨져 있는 자료들이 있다.

1841년 정만교 군수의 영세불망비(郡守鄭候晩敎永世不忘碑)에는 공장들이 특히 많은 은혜를 입었다는 글과 함께 비를 세운 장인들을 열거 하였다. 거기에 나열된 장인은 유기점(鍮店), 주물점(鑄物店), 숟가락점(匙店), 갓점(笠店), 백동연죽점(煙竹店), 대장간(冶店), 목수점(木手店), 가죽제품점(皮店), 가죽신점(鞋店), 말제품점(馬鹿店) 10여 종의 수공업 명단이다.

이 비석으로 알 수 있는 것은 1841년에는 이미 안성이 수공업 중심도시였다는 것과 지금까지도 유명한 유기뿐만 아니라 갓백동연죽가죽신 등이 당시에 이미 상당히 번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7호 백동연죽장 고 양인석 선생 작품 

백동연죽이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전국적으로 전혀 없는데 이 비석으로 1841년에는 왕성하게 만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갓점과 가죽제품, 말제품, 가죽신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백동연죽도 그 맥을 잇고 계시던 경기도무형문화재 제7호 백동연죽장 양인석 선생이 2008년 돌아가시고 난 이후에 누구도 기술을 이어 받지 않아 문화재 지정이 해제되고 전승은 단절되고 말았다.

 

말과 관련된 제품을 만드는 마록점(馬鹿店)이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아직 학계에서 밝혀지지 않았다. 정약용 선생이 쓴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마록의 가죽은 말가죽이라고 한다.(馬鹿皮曰馬皮)’라고 한 것으로 보아 마록이란 말은 말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마록점은 말가죽으로 무엇인가를 만드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다. 옛 양성면 지역이었던 현 평택시 포승읍 원정리는 괘태길곶 봉수가 있었고 이곳에는 국가에서 말을 키우던 말목장이 있었다. 따라서 안성장에서는 이곳에서 나는 폐사된 말을 구하기가 쉬었을 것이다.

야점(버선칼) 경기도무형문화재 제60호 야장 신인영선생 제작

1886년경의 심헌지 군수 영세불망비(郡守沈憲之永世不忘碑)에는 마모가 심해 전체적인 비석의 내용을 정확히 판독하기는 어렵지만 유주(鍮鑄)라는 글자가 보여 안성의 장인들이 비석을 세우는데 어떠한 영항을 끼친 것을 알 수 있다.

1871년의 임태준 군수 영세불망비(郡守任候泰準永世不忘碑)에는 당시 군수가 저자를 보수하고 부세를 가볍게 하였다고 적혀 있다.

안성공원에 있는 1872년의 임태준 군수 애민선정비(郡守任候泰準愛民善政碑)에는 저자의 세금을 패거하고, 호포를 윤택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보아 1872년경 일시적으로 장세를 없애고 시장을 보수하고가구 단위로 면포나 저포를 징수하던 세제를 감면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주점(경복궁소주방 재현 솥) 경기도무형문화재 제45호 주물장 김종훈선생 제작

 

1879년 홍순긍 군수의 청덕선정비(郡守洪候淳肯淸德善政碑)에는 장기(場基)'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이 비를 안성의 장기리에 사는 시장사람들이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다른 내용은 없이 장기라는 설립주체만 새겨져 있어 어떤 연유로 세운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안성군수가 시장 상인이나 장인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낙원역사공원의 자료로 볼 때 19세기 안성의 장인과 상인들은 상당한 부의 축척과 함께 안성군수와 원활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낙원공원의 40여기의 선정비 중 설립주체가 누구란 것을 짐작케 해 주는 비석은 거의 위에 열거한 자료들이다. 후임군수 또는 안성의 주민들이 세운 것으로 짐작되는 설립주체가 없는 비석들을 빼면, 명확한 주체가 보이는 비석은 장인이나 상인들에 의하여 세워졌다. 그만큼 안성 상공인들이 경제력이 있고 지역사회의 영향력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홍원의 안성시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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