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선재(慕先齋)와 시묘정(侍墓井)
모선재(慕先齋)와 시묘정(侍墓井)
  • 시사안성
  • 승인 2018.06.06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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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환일의 해주오씨 정무공파 이야기 – 덕뫼에서 세거 500년 – 6
모선재
모선재

모선재는 본래 정무공 오정방(吳定邦), 전부공 오사겸(吳士謙), 천파공 오숙(吳䎘), 숙헌공 오빈(吳䎙), 백봉공 오상(吳翔), 백천당 오핵(吳翮), 충정공 오두인(吳斗寅), 해창위 오태주(吳泰周) 공이 대를 이어 여묘(廬墓: 상제가 무덤 옆에 여막을 짓고 무덤을 돌보는 것) 살던 곳이다.

1586(선조 19)에 생부 호군공 오수천(吳壽千)이 돌아가시자 정무공이 처음으로 여막을 짓고 시묘하기 시작하여 5100여 년 동안 대대로 시묘 살던 곳이다.

그 후에는 경향 각지에서 모인 제족들이 음 10월에 묘소에서 시제를 드린 후 음복하고 종사(宗事)에 관한 의견도 나누고, 환담을 나누는 장소로 쓰였다.

지금은 경모재(敬慕齋) 2010년 준공되어 음복 장소로 쓰이지 않고 시제날(10월 초하루와 사흗날) 제물을 잠시 보관, 분배하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모선재라는 명칭은 주자가 선대묘소를 생각해서 지은 시에 가르침을 머금고 선조의 빛을 사모한다는 구절에서 취한 것인데 지금은 흔히 제청방(祭廳房)이라 하고 이것이 발음상 변하여 지청방이라 부른다.

모선재는 본래 초막에 불과하였으나 감히 헐어낼 수 없어 보존해 오며 제족들의 모임에 이용했으나 비좁고 낡아 1937년에 새로 4칸 초가집을 신축하여 여러 종인(宗人)들이한 자리에 앉을 수 있게 되었다.

모선재를 신축할 때 모든 후손들이 힘을 모았으나 특히 재정을 후원한 참판 오정근(吳正根 천파공 9세손), 종재 관리와 이재에 힘쓴 오성환(吳晟煥, 숙헌공 10세손), 공사 감독을 수행한 오선근(吳先根, 숙헌공 9세손), 오준근(吳準根, 숙헌공 9세손)이 헌신적으로 노력하였다.

종인들은 모두 고마움을 표하고 있다.

모선재가 신축된지 20여 년이 지난 1961년에 오세목(吳世穆, 숙헌공 11세손)이 초가지붕을 함석으로 개량하여 지금에 이른다.

시묘살이 때 사용하던 우물 시묘정은 시제시 식수로 이용 하였으나 몇 년 전 옆 개천 하상을 정비하면서 물이 줄어 현재는 이용할 수 없게 됐다.

 

참고문헌

농재집, 모선재기단기 4331, 1982

선비마을 안성 덕봉리2008

 

오환일(해주오씨 정무공파 종중회장, 유한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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