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우리 안의 차별을 생각한다. - 아파트 경비노동자의 안타까운 죽음. 그리고 촛불!
(기고)우리 안의 차별을 생각한다. - 아파트 경비노동자의 안타까운 죽음. 그리고 촛불!
  • 시사안성
  • 승인 2020.05.29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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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차별을 생각한다.

  • 경비노동자의 안타까운 죽음. 그리고 촛불!

 

필자 윤종군
필자 윤종군

가정의 달5, 한 가정의 아버지가 목숨을 끊었다. 그는 선량한 우리의 이웃, 아파트 경비노동자였다. 그는 자기 일에 너무나 충실했다. 하지 않아도 되었을 일... 아파트의 협소한 주차 공간 확보를 위해 이중주차 되어있던 입주민의 차를 밀었던 것이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서로 얼굴도 알 수 없는 대규모 아파트에서 발생한 일이 아니다. 오다가다 얼굴이 친숙해질 수밖에 없는, 불과 두 동짜리 260여 세대의 작은 아파트에서 일어난 일이라 더욱 충격이 크다.

경비 주제에 우리가 돈 주는 걸로 먹고 살면서 하지 말라는 일을 왜 하느냐?”

당장 그만 둬라, 너 갈 데가 없느냐? 우리 회사에 꽂아줄까?”

그를 죽음으로 내몬 사람이 내뱉었다는 말이다. 그는 말로는 성이 풀리지 않았는지 CCTV 없는 좁은 화장실로 경비노동자를 끌고 가 코뼈가 부러지도록 폭행을 가했다고도 한다. 물리적인 폭력도 폭력이지만 한 인간의 자존감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저 무자비한 언어 폭력 앞에서 무너지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그는 일주일 후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했으나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사람들도 그를 외면하지 않았다. 상황을 알게된 아파트 주민들도 긴급 대책회의를 열고 그를 돕기 위해 나섰다.

그러나 가해자의 언어폭력, 갑질은 계속되었다. 쌍방폭행을 주장하며 다른 교통사고 진단서로 고소하며 그를 압박했다.

결국 아는 변호사 한 명조차 없던 사회적 약자인 그는 저 억울해요. 제 결백 밝힐게요라는 말과 함께 주민들을 향해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유서를 남긴 채 생을 마감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을 두 딸의 존재조차 그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정확히 50년 전인 1970, 그 때도 그랬다. 근로기준법이 지켜지지 않는 현실에 분노하며, ‘법을 좀 아는 대학생 친구 한 명이 없음을 한탄했던 청년 전태일도 의지할 곳 없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스스로 자신의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야 했다.

세상이 떠들썩하다.

5G시대가 열렸고, AI, 사물 인터넷으로 모든 것이 통합되고 연결될 것이라고 한다. 곧 모든 사람들이 동등하게 막대한 정보의 혜택을 누리는 시대가 개막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찬란한 시대에서조차 변변한 법률적 자문을 구하지 못한채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한 시대,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면서도 서로 다른 자기 만의 세계에 빠져 산다.

마치 화성인, 금성인처럼 이쪽의 삶을 저쪽에서는 가늠조차 하지 못한다. 그것이 갑을관계로 규정되는 사회적 신분의 차이에 이르면 때로 적대적인 관계로 악화되기도 한다. 그래서 최근 뜨거운 화두가 되고 있는 갑질 적폐는 우리 공동체를 파괴하는 사회악이다.

내 세계만이 아닌 타인의 세계에 대한 관심과 연대가 필요한 이유이다. 그래야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온전히 지킬 수 있다. 다행히 이번 우이동 경비노동자 사건에서도 공동체를 생각하는 이웃들의 촛불이 있었다.

저의 임신을 당신 일처럼 좋아해 주셨는데 안타깝습니다

항상 웃으며 인사해주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우리가 한 번만 더 응원의 말을 건넸다면”...

경비실 앞에 차려진 분향소에 나붙은 연대의 마음을 담은 문구들이다.

아파트 주민들뿐만 아니라 수십만의 국민도 청와대 청원으로 마음을 함께 했다.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촛불들의 관심과 연대를 보며 우리 사회의 희망을 본다.

우리 안성도 아파트 인구가 절반을 넘어선 지 오래다. 아파트가 안성 주거형태의 주류가 되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아파트 안에서 혹시라도 갑질성 차별은 없는지 생각해 본다. 분향소에 붙은 문구처럼 아마도 우리가 한 번만 더 응원의 말을 건넸다면”... 그의 극단적인 선택을 막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것은 옳지 않다. 우리 또한 이러한 갑질을 방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본다.

아파트 경비노동자도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이웃이다.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함께 웃고, 함께 행복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우리 모두 아파트 경비노동자에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바라보는 따뜻한 눈길과 관심을 보내주면 좋겠다. 감사하고, 수고하신다는 한 마디 말이 이 분들의 자존감을 높이고 삶의 활력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아파트 경비노동자의 안타까운 죽음이 없었으면 좋겠다.

윤종군(전 청와대 행정관, 동아방송예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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