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원의의 안성민속이야기 - 전조선 3대시장 안성장
홍원의의 안성민속이야기 - 전조선 3대시장 안성장
  • 시사안성
  • 승인 2020.05.21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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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안성장의 발달

1925년 발행된 안성기략속 안성시장 모습
1925년 발행된 안성기략속 안성시장 모습

안성은 예로부터 시장가 발달하여 연암 박지원 선생은 18세기 후반 그의 대표 소설 허생전에서 경상, 전라, 충청도 3남의 물화가 모여 서울로 이송되는 길목이라 하였다.

소설에서 허생은 서울의 제일 부자 변씨에게 1만 냥을 빌려, 모든 물건이 서울로 가는 길목인 안성장에서 과일을 매점매석하여 큰돈을 벌었다. 그런데 그는 전국의 많은 시장 중에서 왜 하필 안성장을 모델로 한 것일까?

이는 박지원 선생이 당시 안성장이 실질적으로 조선에서 가장 큰 시장 중 하나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을 말하고, 안성장은 영남대로와 삼남대로 합쳐지는 길목에 위치하여 이곳에서 물건을 수집하면 남쪽지방에서 올라오는 물건을 모두 살 수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중환 선생은 1750년경의택리지에서 안성은 경기도와 호서지방 해협사이에 위치하여 화물이 수용되고 공인과 상인이 모여들어 한남의 도회가 되었다고 하여 당시 안성이 교통의 요지가 됨과 동시에 물류 집산지로서의 큰시장되고 나아가 큰 도시까지 됨을 말하였다.

안성우시장 축우매매상황 엽서
안성우시장 축우매매상황 엽서

안성장이 번성했음을 확인 할 수 있는 또 다른 문헌 자료는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승정원일기 등 정부의 공식 출판물이다.

비변사등록에 따르면 숙종 때인 1703년 도적들이 시장에 출몰하니 시장을 철폐시키자는 한성좌윤 윤치상에게 숙종은 시장을 모두 철폐시키면 무역하여 살아갈 길이 단절될 것이니 모두 철폐시키지 말고 신설된 시장만 철폐하라고 하며, 한편으로 경기도에는 도적 근심은 없는 곳이 없는데. 그 중에서도 안성의 일로는 삼남의 요충지로서 공장(工匠)과 장사꾼들이 모여 들어 도적의 소굴이 되어, 이를 바로잡기 위하여 안성군수는 무신으로서 병수사(兵水使)를 임명 한다고 하였다.

이 자료로 보아 1703년경에는 전국적으로 시장이 이미 많이 개설되어 있었으나 신설시장도 계속해서 열리는 시장의 중흥기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때의 안성장은 이미 경기도에서는 최고의 시장으로 번성하였고, 시장이 번창함에 따라 도적들에 대한 걱정은 크게 대두되었다.

1727년 조선왕조실록에는 안성장이 서울의 시장보다 크다고 하여 대시장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1747년 비변사등록에는 안성시장이 서소문 이외 시장 중에는 가장 크고, 이로 인하여 도적들이 모인다고 하였다. 이 무렵이 바로 전조선 3대시장의 하나라고 하는 안성시장의 최고 번성기였을 것이다.

1727년에는 안성군수 서종집이 장세를 혁파한 것에 대하여 논의 한 내용 중 장세로 능침을 보수하거나 칙사의 접대비용으로 사용한다고 하며, 황주, 전주, 은진 등에서 장세를 받는 관례가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당시 장세를 받는 곳은 전국에서 안성, 황주, 전주, 은진 4곳 밖에 없었으며, 이곳은 전국에서도 세금이 많이 거두는 큰 시장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안성의 옛모습들, 양잠공판매광경(1930년대)
안성의 옛모습들, 양잠공판매광경(1930년대)

장세액은 물건을 사람이 짊어지고 오는 사람(부판자;負販者)에게는 1(), 나귀나 소에 싣고 오는 사람(재화자;載貨者)에게는 2()을 징수하였다.1794년의 부역실총에 따르면 안성에서 거두는 장세는 경기도의 32개 군현 가운데 가장 많은 720냥이 징수 되었다 한다.

7,500문의 장세가 징수되었다면 부판자와 재화자가 절반씩이라고 가정하면 대략 판매인만 5,000명이 되는 큰 시장이다. 판매자가 이정도 인원이라면 물건을 사러오는 구매자는 얼마나 되었을까?

안성장은 파주 봉일천장과 함께 기로소(耆老所;조선 시대에 70세가 넘는 정이품 이상의 퇴직 관료들을 예우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구)에서 관할하는 시장이었다.

1902년 각사등록 자료에 보면 기로소의 감결(甘結;상급관청에서 하급관청으로 보내는 공문)에서 기로소 소관 파주 봉일천장과 안성장 두 곳의 푸줏간 비용을 운영경비로 사용한다고 하였다. 이는 그 두 곳에서 나오는 비용만 하더라도 당시 기로소의 운영경비를 댈 만큼 큰 가축시장을 운영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 안성장에 대하여 조선시대 대시장으로 표현한 자료들을 비교적 많이 찾을 수 있다. 1915년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경기도안내라는 책에는 안성시장에 대하여, 도내굴지의 시장으로서 매월 음력 2, 7일 개시하며, 미곡어채잡화소 등을 취급하며, 1개년간의 판매액은 7십만원 이상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인구는 약 7천명으로 주민은 반농업에 종사하며 기타 상업을 하거나 노동에 종사하며, 공예품으로는 유기식기, 백동연죽 등으로 유명하며, 1개년 약 1만원의 생산을 한다고 하였다.

개벽 47호
개벽 47호

 

19245월 개벽 제47호에는 등하불명의 근기 정형(燈下不明近畿 情形)’이라는 제호의 기사에 안성시장이라면 이야말로 중부 조선에서 유명한 시장이다. 바로 전조선 3대 시장(대구, 전주. 안성의 하나이다)”라고 설명하여 조선 굴지의 시장으로 설명하였다.

안성장이 대시장이기에 모이는 사람도 많아서 이곳에서 발생한 속담도 많이 있다. 안성장과 더불어 발생한 속담을 몇가지 소개한다.

 

안성맞춤이다 - 안성유기는 견고하고 정교하게 제조하여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아, 물품이 견고하든지, 일이 되어 가는 가장 중요한 고비가 확실하든지, 소홀히 하던 물건이 갑자기 필요에 딱 맞을 때 하는 말

안성 그릇이라면 배냇 자식도 알아 듣는다 - 안성유기가 좋다는 말

안성장 웃머리 - 보통 시장의 초입 부분인 윗머리는 번화하여 시끄럽기 마련인데 옛날 안성장은 대시장이었기 때문에 더욱 시끄러웠다. 이에 따라 말 많고 시끄러운 사람 또는 분위기를 가리켜 하는 말(이와는 달리 송파장 웃머리라는 말은 나이가 적으면서도 연장자인체 하는 사람을 비웃는 말이다.)
 

안성장 풋송아지처럼 -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왼통으로 쓰러져 넘어지는 사람을 이르는 말

안성 피나발(皮喇叭)이다 - 옛날 안성에서 말가죽으로 나발을 만들고 붉은 색을 칠한 오래된 물건이 있었는데 이것이 남자의 성기를 지칭하는 익살스러운 말로 쓰인데서 유래된 말

꽃신 하면 안성 가서 구입하라 - 안성의 꽃신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서 나온 말

도구머리 친구다 - 안성의 도기동 주민둘이 대단치 않은 일이라도 트집을 잘 잡음으로 트집 잘 잡는 사람을 지칭하던 말인데 원래는 도기동 갓수선에서 나온 말

서울보다 둘이 더 많이 난다 -안성시장에서 매매되는 물건이 많아서 서울의 시장보다 2종류(써레, )가 더 많이 난다는 뜻으로, 그만큼 안성장이 번성했음을 일컫는 말

안성은 제 2의 개성 - 상업에 능한 것이나 자기단속에 능한 것이나 경제에 능한 것이나, 외지상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되는 것이나, 자만풍이 있는 것 등 사람들의 성격이 개성 사람과 많이 닮았다는 말

27일 안성장에 팔도물화 벌열 - 안성장이 열리는 매 2일과 7일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많은 물건이 장에 벌려져 있다는 말

안성에는 본래 양반도 없고 상놈도 없다 - 안성에서는 출신에 상관없이 상업과 공업에 종사함을 이르는 말

홍원의(안성시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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