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의 흥망과 함께한 안성 유기
안성의 흥망과 함께한 안성 유기
  • 시사안성
  • 승인 2018.06.05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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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맞춤 유기 이야기 - 8

본래 安城鍮器하고 烟竹으로 하야 窯業製品으로는 朝鮮이엿든 바

近年하야는 倭砂鉢이니 胡砂鉢이니 그 따위 外來品優勢함에서

安城鍮器는 그만 타격을 당하고 所謂 專賣品이니 烟草사용嚴禁이니 하야 葉烟을 못 먹게 되니

따러 安城 烟竹賣路하고 말엇고 安城乾油鞋가 유명하얏스나

근래 所謂 洋靴고무신이니 그 따위로 하야 그만 쑥 드러가고 마랏다.

-개벽 제47(192451)

유기로 만든 제기세트
유기로 만든 제기세트

개화기를 기점으로 일본산 도자기에 밀리게 된 우리나라의 유기산업은 급격한 쇠퇴일로에 접어든다. 1924년 개벽 47호에 보면 일본산이나 중국산 사발이 인기를 끌게 되면서 안성유기가 타격을 당했다고 한다.

대량생산한 도자기에 밀려 값비싼 유기의 경쟁력을 잃고 만 것이다. 이에 일제 강점기에는 안성 유기가 안성에서 차지하는 경제적 그리고 상징적인 비중이 상당히 크다는 점을 인식하고 안성 유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시작한다.

안성 사람들은 안성 유기의 쇠퇴는 곧 안성의 쇠퇴라고 인식하고 개선점을 모색하다가 192873일 안성유기제조주식회사를 창립한다.

당시 안성 최고 유력자였던 박주병이 창립위원장을 맡고 김상덕, 윤상은, 박성재, 이익훈, 윤철주, 박용문, 서상준, 박필병, 김태영, 임준재, 임성상, 정재창 등이 발기하여 회사를 설립하고 박주병이 사장을 맡았다.

이들 발기인 가운데 윤상은, 윤철주 등은 당시 안성에서 유기 제조업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다. 기존에 유기 제조업에 종사하던 사람들마저 새로운 회사 창립에 가담할 정도로 당시 아주 절박한 상태였던 것이다.

안성유기제조주식회사를 창립하고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1934<동아일보> 기사에는 안성유기제조주식회사가 설립되고 생활도구의 유기화를 목표로 현대식 필요품으로 가일층 견고정밀하게 제조할 뿐 아니라 화학적으로 만드는 까닭에 산액이 매년 증가되어 가고 있다라고 소개했다.

또 조선 각지의 산업, 금융, 기타 각 단체에서 기념품으로 많이 쓰이게 되고 점차 세계 시장으로 진출하여 일본, 중국은 물론이고 근년에는 서양 각지로도 수출된다고 기록했다.

1916년경 안성에는 유기 공장이 20호 가량 있었으나 1926년에는 대폭 줄어 45곳밖에 남아있지 않았으며 이마저도 주로 촛대와 교회에서 쓰이는 십자가를 만들어 외국에 수출하여 살아남았다.

유기로 만든 "작"
유기로 만든 "작"

1925년 연간 생산액은 12000원 가량이었으며, 1929년도 연간 생산액은 13000원 정도였다. 1930년 안성의 유기 공장은 34곳이었는데, 그중 안성유기제주주식회사만이 큰 공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1936년은 연간 생산액이 6만 원 가량이 되어 안성유기제조주식회사가 설립되고 일단 성공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36<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지금은 유기보다 값싼 도자기가 많이 쓰인다 할지라도 쉽게 깨지는 것에 비교하면 안성 유기는 그 튼튼한 맛이 하늘과 땅 차이므로 중류 이상의 가정에서는 값이 비싼 안성 유기를 많이 쓰게 되어 수요액이 해마다 증가된다고 하였다.

또 같은 기사에 옛날에는 유기에다 글씨나 그림을 조각하기가 매우 힘이 들었으나 지금은 화학 작용을 응용하여 아무리 어려운 그림이나 글씨라도 붓으로 그린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고 또 용이하게 미술적으로 그려서 만들게 되었으므로 전 조선 각 지방의 각 단체나 개인의 기념품으로 유기를 많이 쓰고 있다고 하였다.

1936년에는 유기에 청록이 돋아 식중독이 많이 발생한다고 음식점에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한 적도 있다. 또 일제 강점기 착취가 가장 절정에 이르던 1940년경에는 유기 공출이라는 이름 아래 집집마다 거의 모든 놋 제품을 전쟁 물자로 강탈해 갔다.

유기로 만든 "정병"
유기로 만든 "정병"

이에 따라 유기 공장에서는 원료를 구하지 못해 공장의 문을 닫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때 유기장들은 일제에 의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전직을 하게 되고, 전직한 유기장들은 조선총독부에서 다른 직종으로의 전업 자금을 지원받았다.

그 후 한국 전쟁 시 또 한 번 유기 공장이 문을 닫았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자 그동안 밀렸던 수요가 한꺼번에 몰려 안성에 유기공장이 약 30호로 늘어나는 호황을 맞이하였다. 공방이 전부 가동해도 수요에 맞춰 물건을 대지 못했던 몇 년의 전성기가 있었다. 이때는 한국 전쟁 때 사용하던 탄피가 흔하여 탄피를 녹여 재생산을 하였는데 사실 탄피를 녹여서 쓰는 재생산품은 제품의 질이 좋지 않았다. 좋은 물건은 구리와 동을 78 : 22% 합금하여 사용하여야 하는데 재생산품은 합금비율을 맞출 수 없기 때문이다.

1955년경에는 19개 유기 공장에서 80여 명의 직공들이 활황을 이뤘지만 스테인리스와 양은 그리고 플라스틱 제품이 등장하여 유기 사용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한다. 여기에는 품질이 좋지 못한 탄피 재생산품의 여파가 나타나기 시작한 영향도 있다. 그리고 1960년대에 들어서 가정의 연료가 연탄으로 바뀌면서 연탄가스에 취약한 유기가 급속히 사라지게 된다.

1963년에는 안성에 4개의 유기 공장이 있었으나 실질적으로 가동하는 공장은 김근수 선생이 운영하는 안성 유기하나만이 남아 있었다. 이곳에서는 직공 13명을 두고 공장을 운영했으나 유기 제품이 팔리지 않아 서울에서 외국인 기념품 등을 주문받아 만들 뿐이었다.

이마저도 제한된 생산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한 달에 보름은 쉬었다. 유기 판매점은 안성 시장에 4개소 있었다. 이것도 잡화상 구석에 초라하게 진열되어 있었고, 장날에도 유기그릇 한 개 팔기가 어려웠으며, 가을철에야 겨우 혼수용 놋그릇이 조금 팔릴 정도였다고 한다.

김근수 선생은 당시 이처럼 대를 이어 오던 유기 공장의 문을 닫게 될 날도 멀지 않았다면서 한숨 쉬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불과 10여 년이 지난 1972년 김근수 선생의 말에 의하면 유기를 식기로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졌지만 최근 사람들의 생활에 여유가 생기고 옛것을 찾는 풍조 때문에 다시 수요가 늘었다고 했다. 제기나 반상기는 주문이 끊임없이 들어온다고 하며, 앞으로 전처럼 심한 퇴조 현상은 없을 것으로 낙관했다.

과연 그 말은 틀리지 않아 건강에 좋고 고급스러운 유기에 대한 수요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지금은 김근수 선생의 아들 김수영 선생이 국가에서 인정한 중요 무형문화재 제77호로 가업을 이어 받아 유기를 생산하고 있다.

그 외에도 안성명장 제1호 이종오 선생, 안성무형문화재 제2호 이종문 선생 형제가 안성 유기의 맥을 잇고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 다시 유기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많이 생겼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유기의 좋은 점으로 인해 개인들의 수요도 많이 증가했고 특히 식당에서 전통성과 품위를 높이기 위해 식기 세트를 구입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좋은 품질과 명성을 가지고 있는 안성 유기는 안성의 발전과 더불어 앞으로 그 전망이 밝을 것으로 보인다.

유기로 만든 "촛대와 향로"
유기로 만든 "촛대와 향로"

 

 

"안성맞춤 유기 이야기" <참고문헌>

 

"개벽" 47, 1920. 6. 燈下不明近畿 情形

"별건곤" 16, 17, 1928. 八道女子 살님사리 評判記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동아일보>

1926. 7. 2 安城名物 鍮器來歷;十字架四海에 일홈 떨쳐, 싀집가는 새앗씨의 유명 한 선물 튼튼하고 마음에 맛는 안성유긔

1930. 12. 2 내고장 名産; 安城맛침밧는 安城鍮器

1934. 8. 18 안성마침! 安城鍮器 世界市場進出

1936. 1. 1 “安城마침鍮器 年産六萬圓;品質조코 튼튼한게 特色

 

경기도박물관·안성시, "고려왕실사찰 봉업사", 2005.

김영호 , 안성유기산업에 관한 조사연구, "아세아연구" 20, 1965.

김태영, "안성기략", 1925.

서영보·심상규, "만기요람(萬機要覽)", 1808.

서유구,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안귀숙, "유기장" 화산문화, 2002 .

안성군지편찬위원회, "안성군지", 1990.

이규경, "오주서종박물고변(五洲書種博物考辨)",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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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원의, "안성맞춤박물관 소장품도록", 안성맞춤박물관, 2007.

홍원의, "전조선삼대시장 안셩쟝", 안성맞춤박물관, 2009.

 

홍원의(안성시청 학예연구사)

 

* 편집자주 :  지난 417일을 시작으로 이번까지 8회에 걸쳐 연재된 홍원의 학예연구사의 안성맞춤 유기 이야기는 이번회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좋은 글로 안성시민들에게 안성유기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해 주신 홍원의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다음주부터는 역시 홍원의 학예연구사가 안성남사당과 바우덕이라는 주제로 연재를 시작합니다. 독자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구독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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