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원의의 안성민속이야기-전조선 3대시장 안성장 1
홍원의의 안성민속이야기-전조선 3대시장 안성장 1
  • 시사안성
  • 승인 2020.05.0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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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 “안성맞춤 유기이야기”와 “안성 남사당과 조선명창 바우덕이”로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홍원의의 안성민속이야기”가 “안성장(安城場)”을 주제로 연재를 재개한다.

*필자주 : 안성장은 조선시대 대구, 전주와 더불어 전조선 3대 시장 중 하나라고 할 정도로 큰 시장이었다. 이에 따라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 무대이기도 하고,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의 무대이기도 하여 문학작품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번에는 우리 고장 안성을 알기위하여 안성장의 역사적 문화적 의미를 살펴 보고자 한다.

 

1. 안성의 역사지리적 환경

안성읍 시가지 평면도(=안성맞춤박물관 제공)
안성읍 시가지 평면도(=안성맞춤박물관 제공)

고구려시대 안성은 내혜홀, 죽산은 개차산군양성은 사복홀이었으나 신라 경덕왕 때 각각 백성현, 개산군, 적성현으로 개칭되었다. 또 고려 초기에 안성, 죽주, 양성으로 각각 이름을 바꾸어 내려오다가 191441일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시 3개 시군이 합하여져서 지금의 안성이 되었다

안성은 고려 초기에 현이었는데 고려 현종 9(1018)에 수주(水州 ; 현 수원)에 예속되었다가 뒤에 천안부에 이속되었고 명종 2(1172)에 감무를 두었다. 공민왕 10(1361) 홍건적이 송도에 침입하였을 때 임금이 남쪽으로 피난을 갔다. 이때 홍건적이 선봉을 보내니 수원을 필두로 양주, 광주 일대에 이르는 곳마다 모두 항복을 하였다. 그때 안성에서는 거짓으로 항복을 하는 체 하고 연회를 베풀어 적이 술에 취한 틈을 타 괴수 6명의 목을 베었다.

이 때문에 적이 감히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하였고, 그 공으로 안성은 이듬해 현에서 군으로 승격되고, 수주의 양량, 감미탄, 마전, 신곡 등 네 부곡을 할애 받았다. 후에 조선 태종 13년에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예속되는 등 경기도와 충청도의 접경에 있는 지역이다.

조선조의 교통망은 동래-대구-충주-용인-판교-한양으로 이어지는 영남대로와 영암-나주-정읍-공주-수원-한양으로 이어지는 삼남대로가 있었다. 안성은 바로 영남대로와 삼남대로가 합쳐지는 지점에 위치한 것이다. 이러한 지리적인 위치로 인하여 옛사람들은 안성을 삼남교통의 목구멍(인후 咽喉)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이는 안성이 상업활동을 운영할 수 있는 중요한 요건을 갖추게 된 것이다.

1872년 안성지도
1872년 안성지도

경기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안성은 죽산의 칠현산에서 시작하는 한남금북정백이 지나가고 안성천을 끼고 형성된 평야가 발달되어 있다, 안성천온 시내를 관통하여 흐르는데 이곳 안성사람들은 평택에서 소금이나 새우젓을 실은 배가 안성시내까지 왔다고 한다, 서해의 아산만에서 안성천으로 이어지고 그 지류의 형세로 자리잡은 안성은 조선시대에 왜구가 침략하는 뱃길로 이용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울산대학교 허영란 교수는 안성천은 읍내를 통과해 흐르지만 개항당시에는 수심이 낮아 배가 들어오지 못하는 상태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1908년 중추원조사자료에 의하면 안성천은 작은하천(細流)이라서 여객선이 다닐 수가 없고 여객은 도보로 다닌다고 하였다.

결국 안성천은 서해의 밀물이 하천까지 들어오는 감조하천으로, 공도를 지나 지금의 대덕면 인근까지는 바닷물이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재로 공도 부근의 안성천은 뻘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민들도 아산만 방조제를 막기 전까지는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미루어 보아 평택에서 안성에 이르는 전체 안성천 구간 중 배가 다닐 수 있는 구간은 제한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안성천과 한천이 만나 하천의 수위가 높아지는 대덕면 내리 지점으로 생각된다. 안성시내까지 배가 들어왔다면 그것은 연중 내내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천이 불어나는 아주 짧은 시간만 가능할 것이다.

 

2. 안성장의 개시(間市)

조선후기 양성지도
조선후기 양성지도

장시(場市)는 상인, 그리고 각 지방의 농민, 수공업자 등 생산자층에 의한 상품생산과 이들 서로간의 직접교역이 이루어지는 농촌의 정기 시장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논하는 장시란 5일장을 말한다. 조선시대 장시는 15세기 후반부터 개설되기 시작하였고, 16세기에 접어들면서 각 도로 확산되어 충청도에 이어, 경상도 지방에서 장시가 설립되었으며, 1520년경에는 전국 대부분의 도에 장시가 개설되었다.

1520년경 전국적으로 장시가 개설될 때에도 경기도는 가장 늦게 개설되었다. 그 이유는 원래 서울과 가까운 경기지역에는 개성을 제외하고는 장시 설립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이 소비도시이므로 외부에서 상품이 반입되어야 안정될 수 있다는 점과 더불어 서울의 상권을 장악한 시전상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기도의 장시설립 금지 방침을 내내 지속하기는 어려웠다. 16세기 중반에는 관서지방에 이르는 해로(海路)가 개통되어 서울과 직접 연결되어 경기 지역의 시장을 계속하여 묶어 둘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15세기에 강화되었던 관영수공업체계가 16세기에 이르러 장인匠人)들의 부역동원 기피와 이탈 등에 의하며 차츰 무너지면서 민영수공업체계로 전환되어 갔다. 이것은 민간 장인들이 관청수공업장에서 지급하는 급료에 의존하지 않고 민간수요의 수공업품을 제조하여 시장을 상대로 판매하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조선후기 죽산지도(광여도)
조선후기 죽산지도(광여도)

조선후기 상업을 발달시킨 또 하나의 요인으로 17세기 후반 이후 금속화폐의 전국적인 유통을 들 수 있다조선왕조는 금속화폐의 유통을 정책적으로 추진하여 왔지만 16세기경 까지는 쌀()과 포()가 화폐를 대신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7세기에 들어서면서 명목화폐인 동전을 법화로 유통시키기 위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즉 새로운 해로의 개척으로 경기도만을 소외지역으로 둘 수는 없고, 민영수공업체계의 발달로 장인들이 생산한 물건의 판로가 팔요했기 때문에 시장의 개설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이러한 정세속에서 경기도에서도 시장이 생기려는 움직임은 당연한 결과이다.

경기지역에서 시장이 개설되기 시작할 때 안성장이 가장 먼저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안성은 지리적으로 삼남의 교통 요지가 되어 물화의 집산이 용이하며. 고려시대에 천안에 속해 있다가 1413년에서야 경기도로 이속되었기 때문에 경기도라는 인식이 비교적 약했기 때문이다. 또 서울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어 당초 목적이던 서울의 상권에 미치는 영향이 적었기 때문에 안성장이 경기도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생겼고, 삼남 교통의 목구멍이라는 지리적 잇점으로 급격히 발달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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