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혼이 깃들었던 낙원공원
충혼이 깃들었던 낙원공원
  • 시사안성
  • 승인 2018.06.0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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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권의 사진에 담긴 이야기 - 7

66일은 제63회 현충일이다.

가슴에 대한민국이란 네 글자와 태극기를 새겨 넣고 숭고하게 잠들어 계신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의 존귀한 희생이 국가와 국민이 존재할 수 있도록 원동력이 되어주신 충혼들에게 삼가 경의를 표한다.

애국심이 강한 안성사람들은 나라를 구하신 충혼들을 모시기 위해 1955년 낙원공원에 충령탑(忠靈塔)을 세우고 매년 현충일이 되면 선열의 넋을 엄숙히 기리곤 하였다.

그러나 현재 이곳엔 충령탑이 없고 다른 곳에 옮겨져 잘 모셔져있다.

유서 깊은 안성공원은 2016년 총 예산 30억여 원을 들여 화려한 조명과 음악분수대까지 만들어 안성 낙원역사공원으로 재탄생되었다.

안성시민들의 휴식처가 된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고 감탄하기도 하고 또 어떤 시민들은 충령탑과 동일정(東一亭,1915년 건립)이 보이지 않자 역사 없는 역사공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충령탑 앞에서 찍은 사진(출처: 안성맞춤 박물관 기증),  결혼 이듬해인 1967년 여름 오후 바람 쐬러 나왔다가 안성공원에 있던 충령탑 앞에서 찍은 필자의 가족(당시 25세) 모습이다. 사진 뒤에 서있는 나무에 바짝 붙어있는 문인석과 석불 좌대가 보인다.
충령탑 앞에서 찍은 사진(출처: 안성맞춤 박물관 기증), 결혼 이듬해인 1967년 여름 오후 바람 쐬러 나왔다가 안성공원에 있던 충령탑 앞에서 찍은 필자의 가족(당시 25세) 모습이다. 사진 뒤에 서있는 나무에 바짝 붙어있는 문인석과 석불 좌대가 보인다.

1920년대 일제강점기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진 안성공원엔 신사(神社)가 있었고 일본의 잡신에게 참배를 강요하던 뼈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충령탑을 그대로 두어 민족의 혼과 정기를 간직한 더 강력한 충혼들의 영령으로 잡신을 찍어 눌렀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가 된다.

1955년 안성읍내 낙원동에 충령탑이 세워진 데에는 당시 순국충령봉안회 안성군 지부장이었던 김태영(당시 61)선생의 애국심과 그 공로에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당시 내 고장 안성에서만도 애국영령들이 1천여 명이 넘는 데도 이들을 모시지 못함을 항상 죄스럽게 생각한 나머지 자신의 일생이랄 수 있는 회갑연의 비용을 충령탑 건립에 몽땅 희사한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고귀한 뜻이 전달되자 군수를 위원장으로 하는 안성충령탑건립위원회를 발족시켜서 충령탑을 건립하고 그 해 1228일 첫 번째로 782위를 모신 것을 시작으로 197366일까지 총 1203위의 영령들을 봉안했던 것이다(안성군지, 2편 역사, 1990, 306쪽 참조).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이후 유족들과 충령탑 설립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현재 안성시청 뒤 비봉산 기슭에 현충탑으로 이름을 바꿔 옮겨졌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공원이 있는 낙원동 바로 옆 동네 옥천동 에서 태어난 필자에게 낙원공원은 어머니 같은 휴식처이며 꿈을 키웠던 교육의 광장이었다.

여섯 살 때인 1945년 해방이 되던 해 몸이 약해 병 치례를 자주하는 3대 독자를 등에 업고 숲이 우거진 공원에 가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게 해 회복시켜주셨던 어머니가 생각난다.

학교에 들어 갈 나이가 되자 모친은 아들의 건강을 생각해 가까운 공민학교에 넣으려고 하자 부친이 반대하여 집에서 먼 안성국민학교(당시 명칭)에 입학하게 된다.

안성공원 문화재 3층 석탑 모습(출처: 안성맞춤박물관 기증사진), 1959년 10월 안법고 3학년 졸업을 앞두고 두발 자유화로 머리에 기름까지 바르고 동급생들과 멋 부리며 찍은 19세 때 필자의 모습이다(왼쪽에서 첫 번째)

안성공원 문화재 3층 석탑 모습(출처: 안성맞춤박물관 기증사진), 1959년 10월 안법고 3학년 졸업을 앞두고 두발 자유화로 머리에 기름까지 바르고 동급생들과 멋 부리며 찍은 19세 때 필자의 모습이다(왼쪽에서 첫 번째)

아홉 살이 되어 건강해지자 학교에 등교하기 전 이른 새벽, 꽤나 먼 비봉산 옆에 있는 안성성당의 미사에 가도록 일찍 깨우는 바람에, 손가락에 얼음이 배길 정도로 혹한이어도 하루도 빼놓지 않고 가서 사제를 돕는 복사(服事)를 섰다.

철거된 안성~장호원간 옥천동 임시정거장자리에 지은 납작한 초가집에서 출발하여 낙원동 호서(湖西)은행 안성지점, 안성경찰서, 낙원공원, 안성소방서 앞을 지나 동본동 안골목 박 씨네 부자 집 앞길을 거쳐서 한 참 올라가면 언덕바지에 있는 안성성당에 이르기까지의 대 장정(?)은 어린 몸과 정신을 단련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또한 초등학교 시절부터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하루에 두 차례 씩 쳐다보면서 더러 들르던 공원이라서 그런지 필자에게는 낙원공원에 대한 생각이 남다르다.

겨울철 안성공원 석불좌상의 모습(출처: 안성맞춤 박물관 기증사진), 1967년 겨울 눈 오는 날 한복에 코트를 입고 안성공원에 산책 나갔다가 석불좌상 앞에서 찍은 필자의 27세 때 모습이다.
겨울철 안성공원 석불좌상의 모습(출처: 안성맞춤 박물관 기증사진), 1967년 겨울 눈 오는 날 한복에 코트를 입고 안성공원에 산책 나갔다가 석불좌상 앞에서 찍은 필자의 27세 때 모습이다.

안성공원이라고 불렀던 낙원공원은 당시 안성군의 중심지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공원을 둘러싸고 군청, 경찰서, 소방서, 읍사무소 등 관공서와 안청학교, 명륜학교, 종합학교(소방서 2), 안성도서관(객사) 등 교육기관과 은행, 금융조합, 버스 차고지, 도립병원, 제사공장과 또한 낙원옥, 광주옥이라는 고급요정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중심지인 공원광장에서는 군 내 모든 행사를 거행하였다.

1950년대에는 항일 투쟁 궐기대회와 멸공 궐기대회도 열렸고 3. 1절 기념, 6. 25사변 기념일,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등 국경일 기념식이 군민들은 물론 군내 학생들을 총동원하여 성대히 열렸었고 안법학교 밴드부 악대를 내세워 시가행진도 했다. 물론 매년 현충일이 다가오면 순국선열 및 애국영령 위령제와 추모 행사도 성대히 열렸었던 생각이 난다.

또한 어린이 날 행사와 군내 씨름 대회, 태권도대회 등 체육행사도 성대히 열렸었다. 1920년대에는 공원 내에 정구장도 있어서 기호(畿湖)정구대회도 열렸다는 기록이 있다.

1923년 안성공원에서 찍은 안법학교 학생들 모습(출처; 안성성당 100주년 기념관 소장 사진), 안성공교(公敎=가톨릭) 안법학교 제1회 졸업생들이 인솔자인 김태영 선생과 3학년, 4학년 재학생들과 함께 안성공원 동일정을 배경으로 찍은 기념사진이다. 꽤 오래된 조선 소나무들이 곧은 자세와 늠름한 모습으로 서있다. 김 선생은 당시 설립자인 공안국 신부와 함께 민족 구국교육에 앞장섰다. 당시 구포동 성당 내에 있는 안법학교 학생들이 낙원동에 있는 공원까지 오게 된 데에는 선생의 공원 사랑의 뜻이 애틋했던 것으로 추정 된다/안성맞춤 박물관의 안성 근,현대 사진첩 1, 근현대 안성인의 삶, 2003, 12월, 8쪽에도 실려 있다.
1923년 안성공원에서 찍은 안법학교 학생들 모습(출처; 안성성당 100주년 기념관 소장 사진), 안성공교(公敎=가톨릭) 안법학교 제1회 졸업생들이 인솔자인 김태영 선생과 3학년, 4학년 재학생들과 함께 안성공원 동일정을 배경으로 찍은 기념사진이다. 꽤 오래된 조선 소나무들이 곧은 자세와 늠름한 모습으로 서있다. 김 선생은 당시 설립자인 공안국 신부와 함께 민족 구국교육에 앞장섰다. 당시 구포동 성당 내에 있는 안법학교 학생들이 낙원동에 있는 공원까지 오게 된 데에는 선생의 공원 사랑의 뜻이 애틋했던 것으로 추정 된다/안성맞춤 박물관의 안성 근,현대 사진첩 1, 근현대 안성인의 삶, 2003, 12월, 8쪽에도 실려 있다.

또 안성성당 100주년 기념관 자료에 보면 1923410일 당시 공교(公敎, 가톨릭) 안법학교’(설립자 프랑스인 공베르 신부) 교원인 김태영 선생이 제1회 졸업생과 3, 4학년 재학생을 인솔하여 안성공원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던 사진자료를 확인할 수 있다.(그 후 김태영 선생은 외국인인 공베르 공안국(孔安國)신부의 구국 교육정신의 영향을 받아 평소의 소원이었던 문맹퇴치와 민족사상 고취를 위한 안청학원을 1925년에 안성공원 앞에 설립 하게 된다).

과연 안성공원의 정취는 조선 중기 이래 안성8경의 하나로 꼽혔던 숲과 녹음이 우거진 이른바 동림녹음(東林綠陰)의 명소이기도 했던 것이다.

필자가 학생 시절 거닐었던 공원은 연꽃이 고상하게 떠있는 연못, 시원하게 우거진 숲과 그늘, 특히 눈 덮인 나무위에 살포시 앉아있는 백옥, 청옥이 깃든 하얀 눈 덩이를 한 줌 쥐어 입에 넣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 여름, 가을, 겨울, 춘하추동 계절에 어울리는 절경을 만끽하였던 명소였던 것이 틀림없다.

현재 안성 낙원역사공원에는 그 때 당시의 모습을 살리려는 듯 좋은 나무와 돌과 잔디로 조경을 하였고 연못도 조성하였다.

역사 유적으로는 향토유적 제8호 석불좌상, 향토유적 제9호 석조광배, 향토유적 제183층석탑, 경기유형문화재 제79호 오명항선생 토적송공비도 나온다.

어린이 날 행사 사진(개인소장),  1973년 5월 5일 안성공원에서 어린이 날 체육행사로 열린 안성군 어린이 세발자전거 달리기 대회 모습/선두로 골인 하고 있는 어린이는 필자의 자녀이다. 응원 나온 가족들과 구경 나온 군민들 뒤로 굴뚝이 보이는 건물은 당시에 있었던 해성제사 공장으로 생각된다(현재의 명륜여중 교문 앞).
어린이 날 행사 사진(개인소장), 1973년 5월 5일 안성공원에서 어린이 날 체육행사로 열린 안성군 어린이 세발자전거 달리기 대회 모습/선두로 골인 하고 있는 어린이는 필자의 자녀이다. 응원 나온 가족들과 구경 나온 군민들 뒤로 굴뚝이 보이는 건물은 당시에 있었던 해성제사 공장으로 생각된다(현재의 명륜여중 교문 앞).

그리고 푸른 잔디위에 펼쳐지는 문인석이 모아진 비석 군과 이봉구문학비 등 역사를 보존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또한 공원 안 쪽 비석군 사이에 삼강행실도벽화도 보인다. 그러나 평소에는 잘 볼 수 없는 음악분수시설과 공연하는 모습이 드문 작은 공연마당, 농구장은 보이나 시민이 쉽게 이용 할 수 있는 체육시설과 조경 환경 등은 다소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특별히 필자가 더욱 안타까워하는 점은, 오늘날 현충일을 맞이하여 추념해 볼 때 충령탑이 안성중심지인 낙원공원 광장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서 선열들의 애국심을 후세에 전하고 그 뜻을 좀 더 가까이서 기렸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현충 시설로 마땅한 곳에 추가로 조성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꼭 특별한 날인 현충일이 되어서야 산에 올라가 충혼들을 위로하는 행사를 하는 것 보다 평소 자주 오고가는 시민들의 휴식처에서 

현충탑을 보면서 영령들의 영원한 안식(安息)을 기도하는 명상의 산책길이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필자는 요즘도 가끔 낙원공원을 거닐면서 한참동안 말없이 잊을 수 없는 추억에 잠긴다.

영원한 고향 안성 지역에 명소로 아름답게 잘 가꾸어진 역사공원이며 영혼이 항상 깃들어 있는꿈의 광장에서 엄마 손을 꼭 잡고 아장아장 걷는 아가들과 사랑이 듬뿍 담긴 정겨운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이 그려진다.

사랑의 교육 현장에서 피어난 꽃송이를 한 다발 안고 있는 훌륭한 사람이 월계관을 쓴 채 부모님과 함께 웃고 있는 날이 날마다 찾아왔으면 하는 흐뭇한 꿈을 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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