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준 권력과 부를 거부한 정영택 군수와 자신의 이름을 지명으로 남긴 김동항 군수 - 매일신보 1911년 3월 4월 기사
일제가 준 권력과 부를 거부한 정영택 군수와 자신의 이름을 지명으로 남긴 김동항 군수 - 매일신보 1911년 3월 4월 기사
  • 봉원학 기자
  • 승인 2018.06.03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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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1910년~1945년) 안성관련 신문읽기 – 6
매일신보 1911년 3월 5일 2면 6단
매일신보 1911년 3월 5일 2면 6단

19113526- 공채 양도와 의견 채탐

양성군수 정영택(鄭永澤)씨가 공채증권(公債證券)을 양도할 의로 경기도청에 청원하얏다함은 기보하얏거니와 해 도청에셔는 해 군수에게 통첩하기를 공채증권 양도에 대하야 가부간 의견서를 제출하라 하얏다더라.

 

이 기사를 보면 정영택의 의도가 보다 분명해진다. 즉 정영택의 양성군수 사임은 일제에 대한 저항임이 분명해 진다. 이 기사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양성군수 정영택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일제는 국권을 강탈한 후 국권강탈에 협조한 사람들과, 관료, 그리고 이른바 지역의 지배계층이라 할 양반과 유생들에게 이른바 은사금’(恩賜金)을 나누어 주었다. 즉 일제가 은혜롭게 하사한 돈이 은사금이다.

그런데 이 은사금을 공채증권형태로 주기도 하는데, 아마 정영택 양성군수에게도 그런 은사금이 공채증권 형태로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사에 의하면 정영택 군수는 그 은사금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한 저항이다. 일제에 대한 목숨을 건 저항을 한 것이다. 그 결과 정영택 양성군수의 이름은 이후 보이지 않는다. 기자의 부족함으로 정영택 군수의 이후 행보에 대해 제대로 추적할 수 없으나 독립운동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매일신보 1911년 4월9일 2면 5단
매일신보 1911년 4월9일 2면 5단

19114925- 안성의 은사금 지급

안성군 경찰서에셔는 거 6일에 양반 유생 기로자(耆老者)에게 하야 은사금을 지급하얏는대 양성군은 안성 경찰서의 관내인 고로 양성군수 김동항(金東恒)씨가 3일간 안성군에 출장하얏다더라

 

안성과 관련해 다음으로 등장하는 191149일자 기사는 앞의 35일자 기사와 관련되면서 안성의 근현대사에서는 잊기 힘든 이름이 등장한다.

이 기사를 통해 우리는 일제가 은사금을 단지 귀족이나 관료, 지배계층에게만 준 것이 아니라 기로자 즉 지역의 나이 든 어른들에게도 주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제의 치밀한 지배전략과 그 실행을 엿 볼 수 있는 기사다. 어느 시대고 지배계층은 지배를 위한 효율적인 방법을 알고 실행에 옮기고 있다.

그런데 그 다음 단락에 등장하는 김동항(金東恒)이라는 이름은 안성사람들에게 왠지 낮설지 않다. 100여년전 지금은 사라진 양성군의 군수를 역임한 인물의 이름이 낮설지 않은 것은 왜일까?

눈치챘겠지만 양성면에 가면 면소재지 마을의 지명이 동항리”(東恒里)이다. 그렇다. 동항리의 지명은 김동항 군수의 이름에서 연유한 이름이다. 이에 대해서도 기자가 지난 2010년 자치안성신문의 우리동네 우리마을에서 이미 언급한 적이 있다.

동항리는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이 기사가 나오는 시점까지도 당시 양성군의 치소(治所), 즉 관아가 있던 마을이다. 즉 양성군의 가장 중심이 되는 마을로, 읍내면 동리(東里), 서리(西里), 향촌(鄕村) 혹은 읍내면 군내동(郡內洞)과 교동(校洞) 등으로도 기록되어 있는 마을이다.

조선시대 관아가 있던 마을이름은 대부분 유사했다. 그런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지명이 바뀌게 되는데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과거의 이름을 사용하거나 두 개의 마을이름을 합해 의미없는 지명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런데 양성군 읍내면의 군내동과 교동은 유독 동항리라는 낮설고 유래가 의심되는 이름으로 바뀐 것이다.

자료가 없어 단언할 수 없지만 당시 전후 사정을 고려할 때 일제는 정영택 전임 양성군수의 저항에 대한 대응으로 일제의 입맛에 맞는, 이른바 친일파 군수를 낙점했을 가능성이 크고, 그 인물이 김동항 군수로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김동항 군수가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공명심에 마을 이름을 동항리로 바꾼 것으로 의심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김동항 군수 재임기간이 1년 남짓하고, 재임기간 일제에 의해 지명조사가 이루어진 점을 감안하면 더욱 설득력을 가진다.

안성의 역사는, 아니 우리는 정영택이라는 기억할 인물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채 김동항이라는 이름을 강제로 기억하고 있다. 정영택이라는 이름을 복원해 기억해야 하지만 김동항이라는 이름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매일신보 1911년 4월 11일 2면 6단
매일신보 1911년 4월 11일 2면 6단

191141126- 안성의 학교조합(學校組合)

안성군에 거하는 내지인회에셔는 학교조합을 설립하기 위하야 해 군수에게 신청하얏슴으로 해 군수는 기 신청서를 경기도청으로 송교하얏다더라

 

이 기사에 등장하는 학교조합은 일본인 자녀를 위한 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조직이다. 1925년 발행된 김태영 선생의 안성기략에 의하면 이 때 신청된 학교조합은 같은해 7월에 설치인가를 받았다. 학교조합에서 조합비를 걷어 학교를 경영했는데 그 학교가 안성공립심상고등소학교. 위치는 현재의 안성초등학교 옆, 즉 교육청 자리 인근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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