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안공주(明安公主)와 국혼(國婚)
명안공주(明安公主)와 국혼(國婚)
  • 시사안성
  • 승인 2018.05.3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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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환일의 해주오씨 정무공파 이야기 – 덕뫼에서 세거 500년 – 5
현종 어필(명안공주 이름)
현종 어필(명안공주 이름)

충정공 오두인의 셋째 아들 오태주(吳泰周, 1668년 현종 9 ~ 1716년 숙종 42)는 현종(재위 1659~ 1674)의 셋째 딸 명안공주(1665년 현종 6 ~ 1687년 숙종 13)1680(숙종 6)에 결혼하여 부마(駙馬)가 되었다.

부마는 명문가의 자제들 중 엄격한 기준에 따라 선발하여 의빈부 (儀賓部)에 속하였다. 오태주는 13세에 부마가 되어 해창위 (海昌慰)에 봉해지고 종 1품 광덕대부의 품계가 내려졌다.

부마를 간택할 때는 가문과 본인의 자질을 엄격하게 평가 하였다.

오태주의 부친 오두인(吳斗寅 1624년 인조 2 ~ 1689년 숙종 15)은 문과에 장원하여 당시 형조참판 이었고, 조부 오숙(吳䎘, 1592년 선조 25 ~ 1634년 인조 12)은 통정 대부 경상도 관찰사로 증 좌찬성이며, 증조 오사겸(吳士謙, 1573 년 선조 6 ~ 1628년 인조 6)은 통훈대부 종친부 전부로 효문 (孝聞)이 자자했고 증 좌찬성이다.

또한 고조 오정방(吳定邦, 1552년 명종 7 ~ 1625년 인조 3)은 무과 장원으로 임진왜란 선무원종공신으로 가선대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이며, 증 병조판서로서 시호 정무(貞武)를 받았다.

그 다음은 자신의 자질이었다. 오태주는 어려서부터 총명한 자질에 수려한 용모를 갖추었으며, 예절과 법도에 맞는 행동 거지로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명성왕후(현종비, 명안공주의 어머니 1642년 인조 20 ~ 1683년 숙종 9)가 특히 오태주의 예절과 행동거지를 어여삐 여겨 부마로 간택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오태주가 간택을 위한 면접 때 모든 후보들은 부친의 이름이 쓰여진 자리에 앉도록 했다. 그런데 오직 그만 아버지의 함자(銜字) 옆에 앉았다.

명성왕후가 이상히 여겨 그 까닭을 물으니 부친의 함자를 감히 깔고 앉을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명성왕후는 크게 놀라고 그의 예절과 행동거지를 어여삐 여겼다고 한다.

명안공주 친필
명안공주 친필

명안공주는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 사이에 1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막내딸일 뿐만 아니라 위의 두 공주(명선, 명혜) 는 어릴 때 일찍 세상을 뜨고 명안공주도 어려서부터 병약 하여 현종과 왕후가 몹시 가엽게 여기시고 사랑하였다.

현종은 명안공주의 이름을 溫姬(온희)’라 짓고 第三女名 其數太多哉 (3녀명 기수태다재)’라고 썼다. 이는 공주의 운수가 한량없이 좋으라는 기원의 뜻이다.

 

숙종 어필 편지
숙종 어필 편지

임금이 자녀의 이름을 직접 지어 적은 어필은 현재까지 알려진 것이 없어 유일한 것이라 하겠다.

임금과 왕후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명안공주의 배필로 오태 주가 최종 간택되어 1679122일 해창위(海昌尉)에 봉해졌다.

해창위는 다음해 (1680년 숙종 6) 14일에 현종의 부마가 된데 사은하고 218일 혼례를 올렸다. 숙종은 승지를 보내 어사주(御賜酒)까지 내려 축하하고 516일에는 종1 품 광덕대부(光德大夫)의 품계를 내렸다.

부마는 배우자가 공주나 옹주이기 때문에 종 2품 이상의 품계를 받고 궁중에서 많은 재산을 하사받아 경제적으로도 풍족한 생활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한편 과거를 거쳐 관직에 진출해 입신양명할 기회는 포기할 수 밖에 없다. 또한 배우자(공주나 옹주)가 후사(後嗣: 대를 이을 아들) 없이 일찍 죽어도 결코 재혼할 수 없기 때문에 부마 자신에게는 반드시 명예롭다고 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부마가 되는 것은 가문의 영예로 자랑이었고, 다른 가문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때로는 질시를 받기도 해 더욱 조심하고 겸손하게 처신해야 한다는 부담이 되는 자리다.

현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숙종(재위 1674~1720) 은 해창위를 유일하게 생존한 동기(同氣)인 명안공주의 배우자이기 때문에 특별히 신임하고 흉금을 터놓고 대하여 마치 군신 관계가 아닌 학식과 인격을 인정하는 지우(知遇)요 글동무 (詩友)로 대하였다.

해창위는 임금의 특별한 신임과 은총을 받는 중에서도 항상 평정심을 유지하며 평온하고 고상하면서도 겸손하게 생활하며 조심하고 신중하였다.

이는 본시 자신의 성품이기도 하려니와 주위의 질시와 시기로 구설수에 오를까 항시 경계하며 조심했기 때문이다.

명안공주 유품, 백옥장도
명안공주 유품, 백옥장도

명안공주는 본시 병약하여 숙종 임금이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결혼 한지 8년만인 1687(숙종 13)23세인 젊은 나이에 하세(下世)하셨다.

명안공주가 사망하자 숙종은 처음 10일 동안 수라상에 반찬을 줄이라고 명하였으나 약방에서 여러 차례 만류하여 4일로 줄였다.

또한 오례의(五禮儀)의 절차에 따라 문상의 절차를 마련하도록 명했으나 이도 승정원과 대신들이 더위를 당해 빈소(殯所)도 차리기 전에 조문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며 만류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이를 뿌리치고 명안 공주의 집에 행차하여 슬픔이 다하도록 곡하였다.

오태주(1668년 현종 9 ~ 1716년 숙종 42)는 대궐에서 하사받은 경행방 향동의 집에 살면서 당호를 취몽헌(醉夢軒)이라 하였다.

이는 취생몽사(醉生夢死)에서 취한 것인데 이를 김수증(金壽增)에게 받은 글씨로 새긴 편액을 만들어 걸었다.

조선시대 부마의 삶에는 많은 제약이 따랐다. 작록(爵祿 : 벼슬과 녹봉)은 주어지나 관직이 없어 조정의 일체 대소사에는 간여할 수 없게 했다.

따라서 경세의 재주가 있어도 세상에 쓰이지 못하니 큰 집에 화려한 복식과 기물을 갖추고 부족함 없이 살지언정 그 마음은 편할 수만은 없었으리라.

당호 취몽헌은 해창위가 자신의 삶의 심정을 표한 것이고, 이를 자신의 호로 사용하였다. 그는 답답한 심정을 시를 짓고 글씨를 쓰며 선조들의 석물을 마련하는 등 위선사업(爲先事業)

으로 풀어냈다.

해창위는 부마로 현 고려대학교 뒷산인 종암동 일대의 땅을 왕실로부터 하사받았다. 현 숭례초등학교 앞뒤를 큰 해창’, ‘작은 해창이라 부르기까지 하였다 한다.

집안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김성수가 현재 안암동으로 보성전문학교 (현 고려대학교)를 옮기려고 하니 이 일대의 땅이 해창위 후손의 소유인 것을 알고 수소문하여 그 종손 참판 오정근에게 와서 큰 절을 올리고 땅 문제를 협의했다.

이에 참판은 젊은 사람이 좋은 일을 하려는데 그 땅이 필요하다면 쓰도록 하라고 흔쾌히 희사했다고 한다.

해창위는 동대문에서 7리 정도인 현재 종암동지역에 별장을 짓고 자주 들려 친구들과 함께 시회도 열고 글씨도 쓰면서 답답함을 풀고 하루하루를 즐겼다고 한다.

숙종은 오직 하나인 동기 매제 해창위를 총애하여 자주 그에게 시를 내리고 답을 구하기도 했으니 해창위는 숙종의 글동무인 시우(詩友)이기도 했다.

1708년에 숙종이 시를 보냈는데 답이 없자 그 사연을 물어보니 그가 종암별장에 가있어 답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숙종은 시를 지어 보내며 잠시 나마 짬을 내어 산수의 흥취를 즐기는 그를 축하하였다. 때의 어시는 다음과 같다.

 

듣자니 그대는 좋은 집을 지어서

며칠 전에 짬을 내어 바삐 도성을 나섰다지

고깃배 떠 있는 강물은 보이지 않지만

눈앞에 줄지은 산봉우리는 범상치 않다네

바람 맞으며 누웠노라면 시원하겠고

달 보고 시 읊조리면 더위도 사라지겠지

온 들판에 가을 깊어 서리 내리면

누런 구름 걷힌 곳에 흥이 더욱 깊겠네

 

聞君卜築有華堂 數旿乘閑出郭忙

江上魚舟雖不見 望中列岫亦非常

臨風高臥凉應納 對月微吟署渾亡

滿野秋深霜落後 黃雲卷處興偏長

 

해창위는 글씨를 잘 썼다. 특히 예서에 능했다. 또한 해창위는 선대를 위한 위선사업(爲先事業)에도 힘써 선조들의 비문을 짓고 제전답을 장만하는데 정성을 다하였다.

명안공주가 사망한 후 해창위는 학문과 서예로 시름을 달래며 지내다가 1716(숙종 42))에 돌아가셨다.

안산시 사사동 해창위 오태주와 명안공주 묘(경기도 기념물 186호)
안산시 사사동 해창위 오태주와 명안공주 묘(경기도 기념물 186호)

숙종은 슬퍼하며 예장을 지시하고 부의를 후하게 하도록 한 후 뇌문(誄文,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비는 글)을 지어 제사를 지내주었다. 해창위가 죽을 때 시호(諡號)를 청하지 말라는 유계(遺戒, 유훈, 죽은 사람이 생전에 남긴 유훈)를 남겼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영조는 특별히 시장(諡狀:시호를 청하는 상소)을 생략하고 문효(文孝) 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그는 관등이 수록대부 해창위겸 오위도총부도총관이고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묘소는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에 부인 명안공주의 묘와 합장하였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숙종, 영조)

한국인명대사전1986

해주오씨세보2013

안성사람 안성이야기2006

선비마을 안성 덕봉리2008

조선의 문화공간2006

오희상 가학연구2010

해창위 오태주의 서예(32회 탁본전람회 도록)한신대학교 2015

명안공주관련 유물도록강릉시립박물관 1996

쌍백당 이공신도비명 탁본집2004

농재집단기 4331, 1982.

천파문집1989

 

오환일(해주오씨 정무공파 종중회장, 유한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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