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베르 신부 순교 70주년-박종권의 사담기
공베르 신부 순교 70주년-박종권의 사담기
  • 시사안성
  • 승인 2020.01.27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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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권의 사진에 담긴 이야기 42
사제복 입은 공베르 신부(안성성당 소장 사진, 이하 같음)/ 검은 사제복 수단(soutane)을 입고 있는 공 신부의 모습이다
사제복 입은 공베르 신부(안성성당 소장 사진, 이하 같음)/ 검은 사제복 수단(soutane)을 입고 있는 공 신부의 모습이다

2020년은 우리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난 지 70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천주교회에서는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아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도를 바친다. 안성성당 신자들도 지침에 따라 매일 밤 9시에 기도시간을 정하여 지속적으로 주모경(主母經)’을 바치게 된다.

시간을 꼭 밤 9시로 정한 것은 아마 TV에서 드라마나 뉴스가 방송되는 중요 시청 시간대 일지라도 습관화되어 있는 일상생활을 잠깐 희생하여 주님께 바치고, 한반도 평화를 전구하는 기도에 전념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특별히 천주교 안성지구에서는 한국 안성 땅에서 최초로 신앙의 싹을 틔운 프랑스 선교사 공베르(한국명 공안국)신부의 순교 70주년을 맞이하기 때문에 더욱 뜻 깊은 행사로 치러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70주년 당일인 2020625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에는 교구별 각 교구가 정한 장소에서 오전 1030분에 전국적으로 특별미사를 동시에 봉헌하게 된다.

공베르 신부 형제 모습/형 앙뚜앙 공베르 신부(앉은 이)와 동생 줄리앙 공베르 신부가 함께 찍은 사진이다
공베르 신부 형제 모습/형 앙뚜앙 공베르 신부(앉은 이)와 동생 줄리앙 공베르 신부가 함께 찍은 사진이다

앙뚜앙 공베르(Antoine Gombert) 신부는 1900년 천주교 안성성당의 초대 신부이며 안법학교창설자로서 프랑스 파리에서 약 1000km 남쪽, 스페인 국경에서 그리 멀지않은 호테즈 시 캄블라제라는 조그만 농촌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부모의 신앙심이 매우 깊어 형제 4명이 신부가 되었고 자매 3명은 평생 동정녀로 살았다. 형은 예수회 신부가 되어 인도에서, 둘째인 공베르 신부는 동생 줄리앙 신부와 함께 선교사가 되어 한국에 도착하게 되었다.

하지만 공 신부의 첫 선교 활동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던 듯하다. 이방인이었던 공 신부는 동양의 한국이라는 나라, 더 나아가 안성이라는 낯선 땅에 도착해 주변 환경에 적응하기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안성 구포동에 성당 터를 매입하여 천주교회를 설립하였으나 부임 초기의 언어장벽과 외로움, 서양 사람에 대한 주민들의 매서운 눈초리에서 비롯되는 중압감은 20대 중반의 이방인 신부가 견디기에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은 수단(soutane)을 입은 서양 얼굴의 사제이다.

공 신부는 일기장에서 나의 거처이며 성당이었던 오래된 한옥 집에서 겨우 1개월을 지냈을 때 주민들이 나를 거슬러 술렁이고 있음을 알았다. 사람들은 여러 차례 모임을 갖고 내 목에 현상금을 걸었으며, 나의 거처를 파괴시켜 버리기로 결정하였다.”고 밝히고 있다(안성시지 제1, 천주교 인물 공안국 p.468, 2011, 필자 집필).

특히 갑자기 변경된 식생활의 고통과 고독이 엄습하는 정신적 압박감은 신체기능에 장애를 일으켜 이질과 변비는 이후에도 계속 되었다고 교회사 기록에서 밝히고 있다.

당시 천주교 조선교구장이었던 뮈텔(Mutel) 주교일기 3(1901~1905,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에서 공베르 신부와 관련된 내용 두 가지 사실을 옮겨 보겠다.

 

<“1시에 고조 박사가 또 한 명의 의사의 보조를 받으며 큰 공베르 신부의 2중 누관 수술을 했다. 환자를 잠재우고 수술을 했는데, 수술에 입회했던 프와넬 신부는 그 수술이 꽤 고통스러워 보였다고 한다. 병원에서 수술이 끝난 후, 환자를 긴 의자에 뉘여 주교관으로 데리고 같다.”>(뮈텔 주교일기3 pp.80~81, 1901914일자)

 

<“오후에 공베르 신부가 도착했다. 그는 의사를 만나보고 그의 병을 완쾌시키고자 왔다. 그는 뜻밖에 심장병에 걸렸고 또 증세가 심해서 종부성사를 받을 생각까지 했었다. 이제는 이따금씩 뛰는 이상한 심장 소리뿐이고 또 몸이 쇠약해져 있을 뿐이다.”>(동 주교일기 p.393~394, 1905222일자)

 

그가 안성 주민들과 친숙해지는 데는 많은 세월이 필요했던 것 같다. 공 신부는 마치 예수가 병자와 가난한 자에게 베풀었던 것처럼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에게 다가감으로서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일기장에서 밝히고 있다.

 

나는 값을 따지지 않고 약을 나누어 주었더니 온갖 병을 가진 이들이 조금 씩 조금 씩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있어서 행복했다.”(공베르신부 일대기 p.8 안성성당, 서한자료 p.144)

 

한 가난한 부인이 폐병으로 다 죽어가는 아들을 데리고 왔다. 청년은 극도로 야위어 창백했으며 목소리는 꺼져가고 있었다. 열이 나서 헐떡거리는 목을 시원하게 하고 싶어 나에게 포도 한 송이를 청하러 왔다. 나는 그를 내 옆에 앉게 하고 그가 포도를 맛있게 먹는 동안 우리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동 일대기 p.9 서한자료 p.144)

 

한편, 1905년에 강제로 한일합방이 되자 안성지방에서도 애국지사들이 일제히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자 일본군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민가에 불을 지르고 무고한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였다. 이때 공 신부는 일본군의 폭력으로부터 안성읍민을 보호했다는 기록이 안성천주교회사에 남아있다.

또한, 공 신부는 1909115안법학교를 개교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꿈꾸어 오던 열정적인 교육사업과 지역 복음화의 범위를 서서히 넓혀 나가기 시작했다. 일제의 핍박에 저항하며 청년회를 만들고 일제가 금지시킨 한국어와 역사를 소신껏 가르치기도 하였다.

안성성당 내부 모습(서울 갈멜수녀원 소장 사진 복사)/1922년 8월15일 안성성당 신축 준공식 후의 성당 제대 앞 성찬란(聖餐欄)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공 신부의 뒷모습이다. 성당 내부를 종이 꽃 등으로 장식한 모습과 제대 벽면 장식의 디자인 양식을 볼 수 있다
안성성당 내부 모습(서울 갈멜수녀원 소장 사진 복사)/1922년 8월15일 안성성당 신축 준공식 후의 성당 제대 앞 성찬란(聖餐欄)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공 신부의 뒷모습이다. 성당 내부를 종이 꽃 등으로 장식한 모습과 제대 벽면 장식의 디자인 양식을 볼 수 있다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공 신부는 이에 동참해 주민들의 야간 등불 행렬을 평화롭게 지도하고 만세운동을 독려했다. 그는 불을 지르지 말고 건물도 부수지 마시오. 그리고 일본인을 절대 죽이지 마시오.”하면서 당부하기도 하였다. 일본군이 공격하면 프랑스 국기와 태극기를 함께 내걸어 치외법권을 주장하면서 주민을 보호하였다.

3.1운동 당시 큰 흉년이 들자 공 신부는 빈민구호와 고아양육에 나서기도 하였다. 모국 프랑스에 호소해 모금한 돈으로 곡식을 사서 굶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부모 잃은 고아들을 거두어 기르거나 신자 집에 위탁해 양육하기도 하였다(1920626일자 동아일보 3면의 공안국 씨의 미담기사 참조).

조선 교구장 주교와 공 신부 형제/당시 조선 교구장 뮈텔(Mutel) 주교와 공 신부 형제가 서울 명동성당에 있는 주교관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다(왼쪽에서 첫 번째가 형 앙뚜앙 공베르 신부이고 두 번째는 뮈텔 주교, 네 번째는 동생 줄리앙 공베르 신부)
조선 교구장 주교와 공 신부 형제/당시 조선 교구장 뮈텔(Mutel) 주교와 공 신부 형제가 서울 명동성당에 있는 주교관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다(왼쪽에서 첫 번째가 형 앙뚜앙 공베르 신부이고 두 번째는 뮈텔 주교, 네 번째는 동생 줄리앙 공베르 신부)

공안국 신부는 안성맞춤 포도의 효시인 불란서 포도를 들여온 장본인이기도 하다. 포도주는 천주교 제사인 미사예절에서 필수적인 재료이다. 공 신부는 포도를 맛보려는 아이들을 성당 뜰 안으로 하나 둘 씩 들어오게 하면서 자연스럽게 선교도 하고 환자를 돌보는 약제로도 사용하였다.

1920년은 공 신부가 사제서품 받은 지 20년이 되는 해였다. 오랫동안 고생하던 신자들 마음속에는 새로운 성당을 지으려는 여론이 일기 시작하였다. 각 공소의 신자 대표들이 모여서 의논한 결과 만장일치로 성당을 짓기로 합의하였으며 소를 파는 등 모금운동에 착수하게 되었다.

드디어 1922년 봄, 땅이 풀릴 사이도 없이 터를 닦고, 당시 보개면에 있던 30칸짜리 기와집 동안강당을 110(당시 황소 한 마리 80)에 사가지고 기와와 돌, 목재들을 뜯어다 사용하였고 기둥과 들보는 압록강 재목, 나머지는 충남 서산 재목으로 건축을 시작하였다(육필원고 안성천주교회사 윤정중, 1980, pp.29~30, ).

당시 안성 읍내에 서양식 건물을 짓는다는 것부터가 대단한 사건이었으며 지역 주민들에게도 큰 관심사를 일으켰다. 또한 신자들은 몇 십 년 전 까지 숨어 다니면서 도피생활을 했기 때문에 당시 성당을 건축하는 것만으로도 위로 받고 한을 풀어주는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안법학교’ 제2회 졸업 사진/1924년 4월 10일 공교(公敎, 가톨릭) 안법학교 졸업 때 찍은 교직원과 학생 모습이다(가운데 서양신부가 49세 때의 공 신부이고 앞 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교사 김태영 씨이다)6. 포도나무 아래의 공 신부/안성 포도의 대명사인 불란서(프랑스) 포도 나무 아래서 찍은 공베르 신부의 모습이다
‘안법학교’ 제2회 졸업 사진/1924년 4월 10일 공교(公敎, 가톨릭) 안법학교 졸업 때 찍은 교직원과 학생 모습이다(가운데 서양신부가 49세 때의 공 신부이고 앞 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교사 김태영 씨이다)

한편, 1926년 공 신부는 고국 프랑스로 임시 귀국하게 되었다. 사제들은 동양에서 선교하다가 노령에 들어서 죽기 전에 한 번 고국에 갔다 오는 전례가 되어 있었다. 공 신부 역시 나이 50이 되었고 마침 전년도(1925)에 사제서품 25주년(은경축)을 지냈으므로 공식 휴가를 얻어 귀국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공 신부는 교회의 사목활동, 교육활동 이외에도 사회사업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교구의 재정안정을 위하여 구입한 교회 토지를 주민에게 무상 임대하여 가난한 농촌생활의 안정화를 꾀하였으며 포도 묘목 보급 등 산업과 각종 기술교육을 장려하기도 하였다.

포도나무 아래의 공 신부/안성 포도의 대명사인 불란서(프랑스) 포도 나무 아래서 찍은 공베르 신부의 모습이다
포도나무 아래의 공 신부/안성 포도의 대명사인 불란서(프랑스) 포도 나무 아래서 찍은 공베르 신부의 모습이다

1927520일 민족투쟁의 대표적 언론기관이었던 동아일보 사옥을 건축하는 기념으로 이루어진 전국의 사회사업 공로자 표창식에서 공안국 신부도 교육공로자로 추천되어 표창받기에 이르렀다(동 안성천주교회사 p.35 참조)

1928년에는 신자 수도 늘었고 교회 발전을 위하여 평택천주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평택은 그동안 왕림본당과 안성본당 관할이었다. 공 신부는 안성본당 창립 28년 만에 처음으로 본당을 분리하여 안성지역 주변의 복음화 확장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1929년에는 안법학교설립 20주년을 맞이하여, 그동안 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학교경영과 교육사업에 헌신한 공 신부에게 안성지역사회에서 자발적으로 주는 표창식이 거행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1932년에 갑자기 공 신부 전근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충격을 맞게 되었다. 안성본당 창설 이래 한 번도 목자를 바꾸어 본 적이 없었던 교회의 신자들은 마치 어머니 잃은 슬픔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공 신부 역시 25세 청년으로 와서 60에 가까워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 떠나는 심정도 참으로 감회어린 이별이었을 것이다.

공 신부 취임 20주년 기념식/1929년 공교(가톨릭) 안법학교 개교 20주년 기념식과 함께 열린 설립자 겸 교장 공안국 취임 20주년 감사식(축하식)때 참석한 내빈과 교직원 학생과 학부모, 신자들이 성당 건물 앞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다
공 신부 취임 20주년 기념식/1929년 공교(가톨릭) 안법학교 개교 20주년 기념식과 함께 열린 설립자 겸 교장 공안국 취임 20주년 감사식(축하식)때 참석한 내빈과 교직원 학생과 학부모, 신자들이 성당 건물 앞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다

안성을 떠난 공안국 신부는 당시 용산에 있던 신학교(현 가톨릭대학 전신)에서 재직하게 되었고 현재의 혜화동으로 자리를 옮긴 신학교에서 인접해 있는 갈멜수녀원과 새로 생긴 성가수녀회 지도신부로 말년을 보내게 된다.

물론 안성과의 인연은 1935년 그의 회갑일에 안성교회의 초청으로 간소한 잔치를 베풀었기 때문에 신자들과 만남이 이루어 졌던 일이 있다. 안성을 떠난 후의 기록은 자료 부족으로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신학교에서 사제를 양성하는데 전념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1950년은 공신부의 사제서품 50주년(금경축)이 되는 해였다. 625일 대신학교에서 열린 축하식에는 동생 줄리앙 신부도 서울에 올라와 있었다(셀레스뗑 꼬요스, ‘나의 북한 포로기’, 분도출판사, 1983, p.18)

축하식은 먼저 미사를 봉헌하고 음악과 노래를 곁들인 만찬, 꽃다발 증정, 사랑의 선물 전달, 축사, 답사 등이 이어 졌으며 신학교 교수들도 함께 흥겨운 잔치에 어울렸다.

그러나 이러한 즐거움도 잠시, 축하연이 끝나갈 즈음 누군가가 급히 뛰어와서 북한 공산군이 38선을 넘어 침공했다는 소식을 다급하게 전하여 주면서 갑자기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하였다(상기 북한 포로기 참조)

안법학교 학생과 교직원/1934년 공 신부가 설립한 안법학교 졸업 기념으로 교직원과 학생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가운데 서양신부가 교장 공베르 신부)
안법학교 학생과 교직원/1934년 공 신부가 설립한 안법학교 졸업 기념으로 교직원과 학생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가운데 서양신부가 2대교장 뤼카스/한국명 육가사 신부)

627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된 프랑스 영사관과 교황사절은 갈멜 외국 수녀들의 피난을 종용하였으나 한국 수녀들을 보호하기 위해 머물기로 결심하고 사제관 지하실로 성체를 모셨다. 715일 아침 공 신부 형제는 구 신부와 함께 갈멜 성당에서 마지막 미사를 거행하였다(서울 갈멜수도원, ‘귀양의 노래’, 경향잡지사, 1954, p.22)

이 때부터 죽음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공산당원들에 의해 체포된 공 신부 형제와 다른 신부들은 평양으로 옮겨졌고 전세의 불안을 느낀 공산당원은 미군포로들과 함께 그들을 250km나 떨어진 고산진 수용소로 이동 시켰다.

포로들은 극심한 추위 속에서 이루어진 길고 긴 행진으로 인하여 1112일 심한 한파 속에서 공 신부는 그만 기절했으며 다시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임종은 밤까지 계속되었다. 임종이 임박하자 구 신부는 공 신부의 동생 줄리앙 신부에게 알리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동생 역시 너무나 아파서 일어날 수 없었지만 옆에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

동생 공 신부는 얼굴이 눈물에 젖은 채 자기의 길고 긴 수염으로 형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작별 인사를 했다(공베르신부 일대기, 천주교 안성성당, 2016, p.25).

사랑하는 형님, 형님은 가도 괜찮아요... 주님의 밭에서 일을 잘 했소... 곧 하늘의 문이 활짝 열리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손수 형님을 품에 안아 주실거요. 나도 내일 따라가지요.”

공베르 신부는 19501112, 일생동안 목숨을 다해 사랑했던 하느님께로 평화스럽게 떠나갔다. 뒤이어 1113일 동생 공 신부 역시 선종(善終)을 하였다고 한다.

두 형제 신부는 중강진 시내를 굽어보며 우뚝 솟은 산 위에 매장 되었는데 살아서도 서로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것처럼 죽음의 행진에서도 더욱 더 서로의 곁에 머물게 된 것이다

사제관의 공 신부/안성성당 공베르 신부의 사제관 겸 숙소 안에서 찍은 사진이다
사제관의 공 신부/안성성당 공베르 신부의 사제관 겸 숙소 안에서 찍은 사진이다

공 신부는 190025세의 젊은 나이로 한국에 온지 50년이 지난 1950년에 75세의 수염이 가득한 노인이 될 때까지 선교사로서 하느님의 일을 완수하고 한국 땅에서 순교한 것이다.

현재,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로마 교황청에 공안국 신부를 순교 성인대열에 올리기 위해 시복(諡福)을 청원 중에 있다.

2020년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이하여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도로 매일 밤 9시에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이 전국 가톨릭 신자들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바쳐지게 된다.

 

박종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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