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정공, 오두인(忠貞公, 吳斗寅)의 충절(忠節)과 덕봉서원
충정공, 오두인(忠貞公, 吳斗寅)의 충절(忠節)과 덕봉서원
  • 시사안성
  • 승인 2018.05.23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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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환일의 해주오씨 정무공파 이야기 – 덕뫼에서 세거 500년 - 4
충정공 양곡 오두인 영정
충정공 양곡 오두인 영정

오두인(1624, 인조 2~ 1689, 숙종 15)은 호는 양곡 (陽谷), 숙종 때 순절충신(殉節忠臣)으로 덕봉서원을 비롯하여 파주 풍계사, 광주 의열사, 의성 구현사, 북청 노덕서원에 배향(配享: 공신이나 학덕있는 인물의 신주를 서원 등에 모심)된 인물이다.

공은 통훈대부 사복시 주부로 이조판서에 추증 된 오상(吳翔)의 둘째 아들로 백부인 통정 대부 경상도 관찰사로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된 오숙(吳䎘)에게 입양되었다.

증조는 임진 왜란 때 공신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오정방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공이 열 살 때 부친 오숙이 중국 천자의 조칙사신 부총으로 오는 정용(程龍)을 국경에서 맞이할 때 따라갔다.
정용이 공을 귀여워하며 운()을 주고 시를 짓게 했다. 공은 즉석에서 시를 지어 사신을 감탄시켰다.

그 시는 황화집(皇華集, 중국 명나라 사신이 접반사와 화답한 시를 모은 책)에까지 수록되었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름다운 하남 출신이 동쪽으로 나옴은

성군에 보답함일세,

정공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이 장군보다 오히려 훌륭하네

 

有美河産東征 報聖君

由東來程不識 勝李將軍

 

공은 1648(인조 26)에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듬해에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중앙과 지방의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쳐 형조판서에 이르고 영의정을 추증받았다.

공이 관직에 임할 때는 엄정하고 백성을 생각하는 위민의식 (爲民意識)이 투철했다.

공이 1669(현종 10)에 광주목사로 부임하여서는 철저하게 구휼책을 세워 대처하였다.

때문에 흉년이지만 광주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굶주리는 자가 없었다.

이를 보고받은 임금은 크게 감탄하며 말 한 필을 하사하고 여러 가지 은전을 베풀었다.

또한 백성들은 크게 감동하여 1671(현종 12)에 임기를 마치고 전임되려 하자 조정에 탄원하여 1년간 유임되었고, 1년 후 연장된 임기가 모두 끝나 서울로 올라갈 때는 백성들이 부모형제와 작별하는 듯 아쉬워하며 수레를 붙들고 길을 막아 수레가 움직일 수 없었다.

양곡공 오두인 신도비
양곡공 오두인 신도비

공은 왕실과도 깊은 관계를 맺었다.

1680(숙종 6)에 공의 셋째 아들 오태주(吳泰周)가 현종의 막내 딸 명안공주(숙종의 여동생)와 혼인하였다.

공은 이때부터 더욱 처신에 조심 하며 근신하였다.

공의 충절은 인현왕후(숙종의 계비) 폐출사건 때 특히 돋보였다.

숙종은 장소의(張昭儀)를 총애한 나머지 그의 무고에 현혹되어 중전 인현왕후를 폐출시키려 했다.

공은 장희빈의 소생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숙종에게 이를 반대하다가 송시열 등서인이 모두 관직에서 쫓겨날 때 [기사환국(己巳換局)] 조정 에서 물러났으나 국사에 무관심할 수는 없었다. 이때 중전이 폐출될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내가 왕조의 은전을 깊이 받았으니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 입을 다물고 있겠는가하고 한탄하며 뜻을 같이하는 동지 박태보(전 응교), 이세화(호조참판) 80여 명과 함께 공이 소두(疏頭: 상소를 공동으로 올릴 때 대표)가 되어 인현왕후 폐비 불가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문이 기사진신소(己巳搢紳疏)이다.

임금은 상소를 보고 진노하여 공을 비롯하여 박태보, 이세화를 취조했다. 공은 당시 66세로 노구임에도 불구하고 밤새도록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조용히 논리정연하게 폐비불가를 주청하였다.

당시 숙종은 개인적으로는 공이 사장(査丈)이 됨을 감안하여 다음날 아침 사형만은 감하여 의주로 유배시킬 것을 명했다.

덕봉서원 전경
덕봉서원 전경

공이 유배길에 오르자 서울 거리에는 양반집 아낙네들까지 몰려나와 충신의 얼굴을 보겠다고 길을 메우고 눈물을 흘렸다.

공은 유배 도중 파주에 이르러 고문의 후유증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운명하였다.(1689년 숙종 15)

그 뒤 숙종은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공에게 영의정을 추증하고 예관을 보내 제사를 지내고 충정(忠貞)이란 시호와 정려를 내렸다.(1694, 숙종 20)

이로써 공의 충절은 더높이 드러났고 각 처에서는 공을 배향하는 서원을 건립하였으며 더불어 불천지위(不遷之位 : 4대봉사 후에도 계속 제사를 모심) 로 모시게 되었다.

양성의 덕봉서원은 1695(숙종 21)에 창건되어 1700(숙종 26)에 사액을 받은 오두인을 배향한 여러 사원 중 대표적인 것으로 1871(고종 8)에 흥선대원군이 전국의 서원을 철폐하면서 사표가 될 만한 47개 서원만 남겼는데 그 중 하나이다.

숙종의 사액현판
숙종의 사액현판

현재 경기도 지방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경내에는 오두인 공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가 있으며 여기에는 공의 장남 오관주(吳觀周)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도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贈諡忠貞公吳斗寅之門

甲戌(肅宗二十年, 1694) 閏五月

孝子成均生員吳公觀周之門

丙戌(肅宗三十二年, 1706) 十月 日

 

문집으로 양곡집이 있다.

오두인 충신 정려
오두인 충신 정려

<참고문헌>

안성기략1925.

선비마을 안성 덕봉리2008.

안성사람 안성이야기2005.

해주오씨세보2013 천파문집1989 농재집단기 4331, 1982 덕봉서원지1986, 국역본 2000.

편역 안성기략2008.

 

오환일(해주오씨 정무공파 종중회장, 유한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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