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농업전문대학(현재 한경대학교 전신)에 다시 복학한 것이 92년도 겨울이었다.
군 제대 후 일 년을 돈 벌고 복학하려고 마음먹었는데 안성에 들러 인사차 만난 과 친구들이 자취방을 잡아 놓았으니 걱정 말라고 하며 함께 학교를 다니자고 종용했다.
친구들이 그립기도 했고 빨리 졸업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시 고쳐 잡고 복학을 했다.
군 입대로 휴학 후 오랜만에 찾아간 안성은 많이 변해 있었다.
서울에서 처음 안성 갈 때는 용산터미널을 이용하였지만 군 제대 후에는 남부터미널로 자리를 옮겼고 안성IC를 지나 안성시내 진입할 때 무성했던 가로수들이 모두 없어지고 도로가 넓어졌다.
봄에는 딸기농장을, 가을에는 포도농장을 찾아 저렴하고 풍성하게 먹었던 그 시절 대학풍습도 많이 사라지고 있었다.
과 선배따라 처음 맛보았던 곱창집(엄마곱창이었던가??)이 시장골목에서 사라졌다는 것도 좀 지나 알게 되었다.
학교가 2년제이다 보니 내가 복학한 후 내게 주어진 시간은 딱 1년이었다. 1년 후에는 사회에 나가 뭔 일이든지 해야만 했다.
복학한 과 친구들은 대부분이 진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렇게 해봐야 농협 취직을 준비하든지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게 다였다.
농사짓겠다는 친구는 하나 아니면 둘 정도였고 방향을 못 잡고 이리저리 헤매는 청춘들이 대부분이었다.
난 이 시간동안 가볍게 다른 뭔가 배우고 싶었다. 기타를 배울까 컴퓨터를 배울까 하면서 말이다.
92년 초가을쯤 정신 못 차린 친구들과 석남사 계곡, 삼죽 죽산의 계곡을 찾아 밤에 가재 천렵을 다니던 어느 날 전봇대 문어발 홍보지를 보고 망설이다가 찾아간 곳이 장애인협회였다.
자취방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위치한 장애인협회에서는 수화교실을 열었다. 내가 비봉소리회 5기였으니 아마 91년도 봄부터 시작된 수화교실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수화’가 인기였었다.(지금은 ‘수어’라고 부른다.) 한 기수에 30~40명씩 모집되어 배웠으니 말이다. 수원에서는 재수(?)해서 들어갔다는 친구도 있었다.
TV나 공연장에서 수화노래를 보고 온 친구들이 많았지만 막상 배우면 정말 재미없다. 언어를 회화로 배우면 재미있지만 어느 정도 단어를 알아야 가능한 일이라 외우는 것이 중요하다.
일주일에 두세 번만 수업이 있으니 열정이 없으면 따라가기 힘들다. 손으로 하는 유희동작은 ‘가위바위보’정도였던 나로서는 손모양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아 곤욕스러워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동기 중에는 자기방 벽에 단어모양을 붙여놓고 외우고 길거리에서는 남들이 볼까봐 호주머니 속에서 손동작을 그리는 열정파들이 많았다.
언어 습득의 지름길은 오로지 연습밖에 없었다.
비봉소리회는 초창기였기 때문에 회원들이 자주 모였다. 단골집은 중앙시장 2층 ‘어우동’ 술집과 명동거리에 위치한 ‘알프스산장’ 까페였다.(지금은 모두 사라져 갈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다.)
매일 술 마시고 놀았던 ‘어우동’ 술집은 아지트였다. 저녁 무렵 그냥 앉아서 30분만 지나면 비봉소리회 식구들이 하나 둘씩 나타났다.
모이라고 하지 않아도 별일 없으면 여기서 볼 수 있었다. 항상 자상하고 따뜻했던 엄니덕분에 우린 식구처럼 만났다. 지금 생각해봐도 엄니는 정말 고마운 분이었다. (그 분은 지금 뭣하고 있는지..건강하고 행복한 노후생활을 하시면 좋겠다.)
지금은 수화 배우는 사람이 적어져서 언제부터인가 기수도 없어졌다. 있었으면 한 40기정도 되려나?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정보화 기술이 좋아져서 소통의 도구가 다양해졌다.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아직 만족스럽지는 않다. 시각과 정서의 온도차이 때문이다. 헤드폰을 쓰고 다니면 청각장애인인지 모를 정도로 장애인 같지 않은 장애인이 청각장애인이다.
장애인 같지 않아서 이유 없는 욕도 훨씬 더 많이 얻어먹고 사회생활이 더 어렵다. 원래 비슷하면 더 힘든 법이다.
학교에서 언어를 배울 때 영어랑 수화는 필수과목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험은 보지 말더라도 수화는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언어소통은 공동체를 만들어준다. 말이 통해야 우리가 되는 것이다.
세월은 많이 흘렀다. 20대부터 30대중반까지 수화를 배우며 수화와 관련된 직장을 다니며 살았었다.
내가 지금 살아가는 방향도 수화를 배우며 장애인과 함께 사는 세상을 꿈꾸다가 이렇게 흘러와 버렸다. 안성에 뿌리를 내리게 한 것도 비봉소리회 덕분이다.
비록 가진 게 없이 힘들게 살고 있지만 후회는 안한다. 안성에는 정말 아름다운 자연풍경과 정말 아름다운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또한 비봉소리회 덕분이다. 그들이 꿈꾸는 안성, 그들이 사랑하는 안성을 위해 같이 걸어갈 생각이다.
정인교(안성천살리기시민모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