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안성 유기의 생산자와 판매자
5. 안성 유기의 생산자와 판매자
  • 시사안성
  • 승인 2018.05.15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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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맞춤 유기 이야기

안성유기가 유명하게 된 이유는 당연한 말이지만 품질이 좋아서 이다. 1934<동아일보>에 안성 유기는 옛날부터 견고하고 미려하며 정교한 특색이 있는 까닭에 전국적으로 환영을 받아 왔다고 하였다.

즉 황해도 등 다른 지역의 유기보다 가공을 한층 더하여 모양이 미려하고 정교하며 견고한 것이 특징이라고 하였다.

안성이 유기로 유명하게 된 데는 우선 판로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 안성시장, 그리고 서울과 지리적으로 가까워 서울 반가의 그릇을 주문받아 제작하여 유명해진 유통 부분에 있다.

안성 유기에서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상인을 천시하지 않고 장인들을 존중해 주는 안성의 문화가 큰 영향을 끼쳤다.

안성은 예로부터 갓 수선, 건유혜, 백동연죽, 한지 및 방각본 제작 등과 일제 강점기 분말잉크 생산업이 크게 성행하던 지역으로서 수공업의 발전에 따라 많은 장인들이 활동했다. 그리고 양반 계급에 속한 사람들이 직접 공업과 상업에 종사하기도 하였는데. 안성 유기 제조 장인들 중에는 농업에 종사하는 평민 또는 실권한 양반들도 있었다.

 

 

 

이처럼 양반 계급에 속한 사람들이 상업이나 공업에 종사하는 경우는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현상이다.

유기는 안성에서 만들어 안성장에서만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 상인들이 전국을 다니면서 판매했는데 유기 상인 중에는 여자들이 많았다.

조선 시대의 안성 유기상은 직접 등짐을 지고 전국의 시장뿐만 아니라 가정마다 방문 판매를 하였다.

1925년 정관해 선생이 쓴 관란재일기(觀瀾齋日記)에는 유기 파는 여자가 집에까지 와서 판매한다고 기록했는데, 당시 정관해 선생의 집은 용인이기 때문에 아마도 안성 유기상일 가능성이 높다.

경기 민요인 <건드렁타령>에는 경기 안성 처녀는 유기 장사로 나간다지, 주발대접 방짜대야 놋요강을 사시래요라고 하여 처녀들이 다른 지역으로 유기 장사를 나갔음과, 그중에는 방짜 유기도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도 기산풍속도첩 중 유기장사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을 유기 도부 장사라고 이름 붙이고 남녀 한 쌍을 그려 놓았다.

유기 도부 장사(기산풍속도)
유기 도부 장사(기산풍속도)

 

도부는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파는 장사꾼들을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이 그림에서도 역시 유기장사꾼은 남녀가 같이 다니면서 전국을 행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1928년 일제 강점기에 간행된 잡지 별건곤 1617, 팔도여자 살림살이 평판기에서는 안성 유기상에 대해 말하길 안성 여자들은 대개 유기를 남자 보부상과 같이 짊어지고 각지로 돌아다니며 파는데 그 행상인 중에는 종종 미인도 있어 이 세상에 향그러운 이야기 거리를 끼치는 일도 많다라고 기록했다.

이렇듯 안성 유기 판매상에 여자들이 많은 것도 안성유기의 명성에 일조를 한 것으로 보인다.

 

경기안성 큰아기 유기장사로 나간다 한닙팔고 두닙팔어 파는 것이 자미라

경기안성 아기 숟가락장사로 나간다 은동걸이 반수저에 깩기숫갈이 격이라

안성유기 반복자 연엽주발은 시집가는 새아씨의 선물감이라

안성가신 반저름(반유혜)은 시집가는 새아씨발에 마침이다

안성유지는 시집가는 새아씨의 빗집(梳入)감에 마침이라

 

"안성기략"에 전해지는 이 속요에 안성 사람들의 상인 기질이 잘 보인다. ‘아기라 함은 흔히 며느리를 일컫는 말인데 큰며느리나 작은며느리 또는 딸들이 장사하러 나가는 것을 천하게 여기지 않고 파는 것을 재미로 여기고 있어 조선 시대 사농공상과는 다른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이 속요는 일제강점기때만 하더라도 비단 안성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들을 수 있는 노래였다고 한다.

안성낙원역사공원내 "군수 정만교 영세불망비"
안성낙원역사공원내 "군수 정만교 영세불망비"

안성 낙원역사공원의 비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장인들이 모여 군수 선정비도 세워 줄 정도로 그 세력이 사회·경제적으로 막강했고, 군수도 장인 보호에 힘을 쓰는 곳이 안성이다. 이러한 상공업 중시 문화와 행정의 뒷받침 등이 합쳐져서 안성이 전국 최고의 유기 생산지가 될 수 있었다고 보인다.(계속)

 

홍원의(안성시청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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