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스승의 날 떠나신 어머니 최소저
4. 스승의 날 떠나신 어머니 최소저
  • 시사안성
  • 승인 2018.05.14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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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권의 사진에 담긴 이야기

 

박종권 부친 박호식(1908년생) 모친 최소저(1909년 생) 회갑 사진, 당시 안성읍 옥천동 사촌계 일동에서 만들어 준 잔칫상이다.(안성맞춤박물관의 안성사람의 일생 의례 2011, 12 발간 책자에도 실려있다
박종권 부친 박호식(1908년생) 모친 최소저(1909년 생) 회갑 사진, 당시 안성읍 옥천동 사촌계 일동에서 만들어 준 잔칫상이다.(안성맞춤박물관의 안성사람의 일생 의례 2011, 12 발간 책자에도 실려있다

매년 스승의 날이 오면 마음이 착잡한 느낌이 든다. 보람을 느끼면서도 뭔가 부족하단 생각이 들기도 한다.

교직에 있을 때 명문학교 만든다고 하면서 혹시 학생들을 입시지옥으로 인도한 거나 아닌지 모르겠다.

흔히 학교교육을 많이 가르치고도 실패한 교육이라는 평가도 있기 때문이다.

평생을 교단에서 살아 온 몸에 밴 감성이기도 한데, 학교교육이 성공하려면 먼저 가정교육이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다.

집 마당 우물가에 서계신 어머니사진, 옥천동 19번지로 이사한 함석집(아들 장가 보내려고 좀 큰 집을 장만하였다)앞 마당에 우물이 있었다. 농사짓는 집을 증명하려는 듯 가마니, 소쿠리, 조리, 절구통이 보인다. (안성맞춤박물관 '근현대를 가다' 기획전시회 출판자료집 31쪽에도 실려있다)
집 마당 우물가에 서계신 어머니사진, 옥천동 19번지로 이사한 함석집(아들 장가 보내려고 좀 큰 집을 장만하였다)앞 마당에 우물이 있었다. 농사짓는 집을 증명하려는 듯 가마니, 소쿠리, 조리, 절구통이 보인다. (안성맞춤박물관 '근현대를 가다' 기획전시회 출판자료집 31쪽에도 실려있다)

최아가다는 2007515일 스승의 날, 99세의 일기로 백수(白壽)를 다 하시고 세상을 떠나셨다.

어린이날, 어버이날이 있는 5월은 어머니와 41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 박 아가비도를 회상하게 된다.

1950년대 옥천동 12번지 박호식(필자 부친)씨가 에미 젖을 못 찾는 막출산한 돼지새끼에게 에미 젖을 대주며 정성껏 돌보고 있다. 열악한 돼지우리 덕분에 가난을 극복하고 있는 모습이다
1950년대 옥천동 12번지 박호식(필자 부친)씨가 에미 젖을 못 찾는 막출산한 돼지새끼에게 에미 젖을 대주며 정성껏 돌보고 있다. 열악한 돼지우리 덕분에 가난을 극복하고 있는 모습이다

모친 최소저는 홀어머니 이마리아(李馬禮)를 모시고 천주교 교우촌인 진천 삼박골 외가 친척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당시 배티와 그 아래 삼박골 교우촌의 신자들은 산허리를 가로 지르는 비밀 통로를 통해 움직였고, 박해 때 포졸들이 몰려오면 삼박골로, 다시 배티로 숨어 살았다.” (필자가 기술한 안성시지 14장 조선시대 천주교 인물 최양업’ 473)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어느 날, 삼박골로도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다행히 이진사(進士)는 피신하였지만 그 아내와 처녀 딸은 포졸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양업연구 총서 제1, 교우촌 배티와 최양업신부, 166)는 기록으로 볼 때 삼박골은 전형적인 교우촌이라고 할 수 있다.

충북 진천군 배티로 663-13 천주교 청주교구 배티성지 삼박골 순교자 묘지, 이진사 부인과 딸 동정녀 순교자 묘지를 최근 방문했다.(청주교구 배티성지 ‘양업명상마을’ 조성을 위해 도로개설 공사중이다. ‘양업’은 시복시성을 추진중인 최양업 신부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다). 사진은 이진사 부인 묘지에서 촬영한 것

이와 같은 기록을 인용하는 이유는 해마다 순교자들의 묘를 찾아 벌초를 하였다고 증언한 이관일씨가 바로 모친의 큰 외삼촌이기 때문이다.

상기 책자 166쪽의 기록에는 전승으로 내려오는 삼박골 이 진사의 성명과 세례명, 삼박골 순교자의 무덤은 1978년 당시 온양 양로원에 있던 이관일(요한, 90) 씨의 증언에 따른 것이다.”라고 확인되고 있다.

박해가 수그러들 무렵 충남 보령에서 다 성장한 아들을 데리고 옹기점 따라 일하러 진천에 오신 조부(박재경)는 그곳에서 자란 최소저(당시 17)를 며느리 삼아 청주로 가셨다가 안성 양기리에 오시어 손자를 보셨다.

부모님은 어린 아들에게 이야기로 배우는 요리강령(要理綱領)’그림책과 군란소설 은화’(隱花)를 입이 닳도록 읽어 주셨다.

두 가지 책자는 안성성당 100주년 기념관에 기증한바 있다.

윤의병 바오로 신부의 소설 '은화'의 주된 배경이 된 교우촌 터이다. 배티 성지 약 2km에 '삼박골 비밀통로' 표지에서 들어서면 옛 교우촌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는 삼박골이 있다. 현재 공소는 없어지고 진사 이호준 요한의 부인과 딸 등 두 수교자의 묘소만 남아있다. 배티성지 안내판과 진천삼박골 순교자 묘가 뒤로 보인다
윤의병 바오로 신부의 소설 '은화'의 주된 배경이 된 교우촌 터이다. 배티 성지 약 2km에 '삼박골 비밀통로' 표지에서 들어서면 옛 교우촌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는 삼박골이 있다. 현재 공소는 없어지고 진사 이호준 요한의 부인과 딸 등 두 수교자의 묘소만 남아있다. 배티성지 안내판과 진천삼박골 순교자 묘가 뒤로 보인다

특히 소설은 1939년부터(필자는 1940년생) 1949년까지 발행된 경향잡지에 실린 것을 부친이 직접 발췌 제본하여 보관하고 있던 귀중한 책이다.(소설 은화1889년에 안성군 청룡마을 출생 윤의병 바오로신부가 지은 책이다. 상기 양업연구총서 38쪽 참조)

현재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새로 발간(1977)한 군란소설 은화상권에 실린 진천 삼박골 공소이야기(31~32)에 나오는 얼굴 가리고 방갓 쓴 상제 차림으로 몰래 스며드는 주교 이야기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이진사 딸 동정녀 순교자의 묘
이진사 딸 동정녀 순교자의 묘

찾아가는 이진사란 사람은 평창인이요 본명은 요한이고 이름은 호준이다. 살림도 넉넉하고 문벌도 똑똑하여 삼박골 공소의 회장이요 또한 진사였다.” 순교자 묘소를 관리한 모친의 큰외삼촌은 바로 이 진사의 묘소도 돌보았다고 한다.

어머니의 전언에 따르면 필자는 갓난아기 때 배고파 울다가도 집안에서기도소리가 들리면 바로 그치곤 했다고 한다.

말귀를 알아들을 나이가 되었을 때는 은화’(숨은 꽃) 소설에 나오는 호랑이한테 물려간 이야기를 또 해주세요. 또 해 주세요하고 보채는 바람에 밤새도록 읽어주시던 아버님은 책을 껴안고 주무시기도 했다고 한다.

은화 상권에 나오는 호환(虎患)이야기에는 친정에서 급히 와 달라는 전갈을 받고 저녁나절 정삼이골을 넘어가던 며느리가 호랑이의 습격을 받고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기절했다가 극적으로 구출된 이야기가 나온다.

배티성지에 세워진 배티성지 표지석(현 배티성지 최양업 신부 150주년 기념성당 입구에 세워져 있다)
배티성지에 세워진 배티성지 표지석(현 배티성지 최양업 신부 150주년 기념성당 입구에 세워져 있다)

더구나 천주학 믿는 사실을 몇 해동안 서로 숨기고 살았던 남편과 시부모와도 만나게 되고 서양신부는 물론 주교님까지 뵙게 되는 놀라운 장면이 펼쳐진다.

부모님의 가정교육은 바로 온 몸과 정신을 다하고 의지를 다하여보살피는 스토리텔링 식 신앙교육인 셈이다.

또 회상해 보면 필자의 어머니는 남 주기를 좋아하신다. 넉넉한 살림이 아니신데 쌀도 잘 퍼주시고 새로 사다드린 옷도 이웃에 주시곤 했다.

교우촌 사람들은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었다“(사도,32-33)는 성경 말씀 따라 살았던 삼박골 교우촌이 생각난다.

삼박골 교우촌 무명 순교자 묘 입구
삼박골 교우촌 무명 순교자 묘 입구

그러한 선행의 실천은 반에 반도 못 따라가겠다는 생각이 든다.

늘 베푸시고 가난한 사람이면 품삯 없이 일해 주시다가 지붕에서 떨어져서 크게 다치셨어도 내색 안하시는 아버지, 글자도 깨우치지 못한 어머니는 종도신경(從徒信經), 만과(晩課저녁기도), 심지어는 성월(聖月특별기도)까지 어떻게 외우셨는지 빠짐없이 바치시는 믿음이 돈독하신 스승이시다. 새록새록 생각나는 부모님이지만 스승이라는 마음이다.

 

장독대 서계신 부모 사진, 필자의 본적지인 옥천동 12번지 안성~장호원간 철거된 철도부지에, 필자의 출생지인 양기리 초가집을 부친이 뜯어다가 무허가로 손수 지으신 초라한 초가집이다. 1950년대 겨울 장독대에 바지저고리 차림의 아버지 박호식과 어머니 최소저 사진
장독대 서계신 부모 사진, 필자의 본적지인 옥천동 12번지 안성~장호원간 철거된 철도부지에, 필자의 출생지인 양기리 초가집을 부친이 뜯어다가 무허가로 손수 지으신 초라한 초가집이다. 1950년대 겨울 장독대에 바지저고리 차림의 아버지 박호식과 어머니 최소저 사진

운명하신 스승의 날 그날은 교육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특강을 해야 하는 날이라 황급히 빈소를 차리고 다시 강의실로 돌아가 학생들에게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던 기억 때문만은 아닌 것이라는 회상이 떠오른다. 가정에서 표양으로 자식을 가르치신 산 교육자 부모님, 올해에도 기일 연미사를 드리며 묵상에 잠긴다.

휴대폰 굿 뉴스에서 저녁기도 시간을 알린다. 아내와 함께 연도(煉禱)를 바쳐야겠다. 그리고 학교교육을 위해서도 병자의 기도를 바쳐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다.

 

박종권(교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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