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1968년 12월에 선포된 ‘국민교육헌장’의 마지막 문구이다.
1960년대~70년대에 학생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국민교육헌장을 기억할 것이다. 전부는 못 외워도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문구 정도는 대부분 기억할 것이다.
이 헌장은 당대 대한민국 교육의 지표로서 각 학교 교과서의 첫머리에 인쇄되는 등 매 년 선포기념 행사와 각종 표창으로 국민 각자가 반공 민주주의 신념과 긍지를 가지고 굳게 매진하도록 추진되었다.
당시의 시국은 매우 급박했다. 1969년 3선개헌에 성공한 박정희 정권은 영구집권을 위해 1972년 10월에 전국 비상계엄을 선포한 뒤 12월에 ‘유신헌법’을 공포했다. 이후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이 확산되자 1973년 긴급조치를 발동하여 반체제운동을 억압하였다.
1974년 4월 ‘민청학련사건’이 일어나자 군사정부는 배후로 ‘인혁당’이라는 공산주의세력을 지목하여 관련자들을 군사법정에 세워 무기징역과 사형 등의 부당한 선고를 내리게 되었다.
민심은 흉흉하게 돌아가면서 고등학생들까지 동요할지 모른다는 형국이었다. 시국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정부에서는 학생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문교부장관을 통하여 전국의 교사들을 긴급히 모아 시국교육을 실시하게 된다.
당시 30대 교사인 필자는 1974년 5월 서울 삼청동에 있는 중앙교육연구원에 입소하여 교원연수를 받게 된다.
민관식 문교부 장관은 연수회에 직접 참석하여 정부 전복을 시도하는 대학생들 시위의 배후엔 공산당세력이 있다면서 학교에 돌아가게 되면 반공교육을 철저히 시키라고 지시하였다.
청와대 바로 턱 밑 좋은 시설에서 2박 3일 동안 융숭한 대접을 받고 귀가하는 교사들에게는 장관 이름이 찍힌 신식 서류가방 하나씩이 손에 들려주게 된다.
유신독재 시절 최악의 세뇌교육 명령은 추가로 ‘사상교육(반공교육)지도자료(1975, 문교부)’와 ‘국민정신교육지도자료(1981)’로 만들어져 초,중고등학교 도덕, 국민윤리, 국사, 사회과 교사용 지침으로 하달되기도 하였다.
시대적으로 볼 때, 5.16 쿠데타로 탄생된 박정희 정권의 제1목표는 ‘반공’이었는데 이는 자유민주주의를 확립하고 경제성장을 추진하며, 민족의식을 바로 잡음으로써 반공의 기치를 높인다는 명분이었다.
특히 교사용 ‘사상(반공)교육자료’의 근간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이론이 전개되어 있었다. ‘유물론(唯物論)과 유물사관,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 혁명론, 계급투쟁설 등의 모순점을 하나하나 반박, 비판하는 근거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필자는 1961년 겨울, 대학생들의 비밀 써클인 ‘민*비*연구회’에 이끌려 금지된 공산주의 사상을 공부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밝힐 수 있지만 당시엔 불법적인 사상이었기 때문에 적발될 경우 엄청난 처벌을 각오해야 했던 시국이다.
학교 앞 안암동에 있는 이 모 동급생 자취방에 모여서 M의 ‘**당 선언’을 비롯한 비밀문헌을 읽고 토론한 후 바로 소각시켜버리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필자는 겁도 나고 사정이 생겨 그 뒤로는 나가지 못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20대 중반에 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시작하게 된 필자는 민주주의를 직접 가르치는 사회과 교사로서 여러 가지 복잡한 가운데에서 많은 갈등을 겪으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60년대 말 교과서를 소개해 보면, ‘일반사회’ 내용은 민주주의, 공산주의 비판, 개인과 국가, 국민경제 생활, 국토개발, 사회문제, 민족문제의 향상 등 7개 단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70년대 제3차 교육과정 변경으로 고등학교 ‘정치 경제’ 교과서는 우리나라의 현실과 민족의 중흥, 우리나라의 민주 정치, 우리나라의 헌법, 국민생활과 법, 국민경제의 순환과 성장 등 5개 단원으로 구성되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과서에 주축을 이루고 있는 민주주의 이념은 주로 우리나라 헌법 조항을 중심으로 그 내용이 구성되어 있다.
필자가 정치경제 교사로 재직하고 있는 동안 우리나라 헌정사는 참으로 불행하기 짝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권들은 헌법을 불법적으로 개정하면서까지 장기 집권과 독재를 하기위해 헌법을 마음대로 뜯어 고치는 시대를 살아 왔기 때문이다.
정부가 배부한 사상지침은 그냥 교사들이 수업에 참고하면 되겠지만 교과서는 자주 바뀌는 헌법에 맞추어 편찬되기 때문에 수업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민주주의를 올바로 가르쳐야 하는 사명과 의무를 가진 교사로서 양심에 가책을 느끼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필자는 중고등학생 시절에 이승만의 종신 집권을 시도하는 ‘발췌개헌’과 ‘사사오입개헌’에 따른 혼란스러운 교육을 받은바 있다. 대학교 1학년 때에는 독재정치와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4.19혁명을 통하여 ‘내각제 개헌’으로 민주주의를 되찾는 과정을 직접 몸으로 부닥친 바도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회복한지 1년도 안되어 5. 16 쿠데타 세력에 의해 민주정권은 무참하게 무너지고 군사정권에 의해 대통령 종신 집권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비민주적 ‘3선개헌’과 ‘유신헌법’을 몰아붙이게 된다.
사회과 교사는 교과서 내용으로 볼 때에 시국 이야기를 빼놓지 않을 수가 없다. 필자는 한 때 수업시간에 정부를 비방했다는 이유로 A경찰서 Y형사에게 불려가게 된다. “도둑놈들이 다니는 새벽에 날치기로 헌법을 뜯어 고쳤다”라고 말한 적 있느냐는 추궁이었다.
“정부는 국가안정을 위해 개헌이 꼭 필요하며 정당하다는 S신문 주장과 날치기 방식의 개헌은 부당하다는 D일보 기사 두 가지를 인용한 것뿐이다”라는 답변을 마치고 벗어난 적이 있다.
한두 달이 지났는지, 어느 날 중앙정보기관 안성 주재관 오 모 씨의 사무실(동본동)로 또 불려가게 된다. 이번엔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조사 차 안성을 방문한 일본 요미우리 신문기자에게 답변한 발언을 확인하겠다는 이유였다.(실제로 안성 관내에서도 C중학교 성 모 교사는 강의 시간에 공산주의를 잘 못 언급하는 바람에 입건되어 곤혹을 치룬 일이 있었다)
그렇지만 수업이 즐거웠고 재미있었던 그 때의 그 수업시간도 많이 생각난다. 필자는 50분 수업시간 마다 ‘5분 시사’해설을 도입하여 학생들의 흥미를 유발시켰던 것으로 기억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전 날 신문 석간이나 그 날 조간신문 톱기사를 반드시 스크랩해야만 했다. 다만 제한된 수업시간으로 토론학습으로 까지 전개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은 교육 현장에서 다양한 NIE(신문활용교육) 방식으로 발전되어 살아 있는 지식을 습득하고 정보 활용 능력을 강화시킴으로써 민주시민 의식과 사고력 향상에 많은 도움이 되는 수업으로 평가되어 권장되고 있기도 하다.
교사시절 담임 반을 맡았을 때 아침저녁으로 만났었던 학생들이 지금 많이 생각난다. 1968년 7월 여름방학 때, 담임선생님의 첫 딸을 보겠다며 옥천동 집으로 몰려 온 제자들의 얼굴 하나하나가 지금도 투시되어 들어오는 것 같다.
비진학반 이었지만 유난히 씩씩했고 사연도 많았던 60대 연령의 반창회는 지금도 활기차게 모인다. 자체기금으로 사무실을 마련했다면서 초대한 70을 훨씬 넘긴 **회 동창회에 가게 되면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나는 느낌이 들어 매우 반갑고 기쁘기도 하다.
25세부터 50세까지 25년간 사립학교 한 곳에서만, 가르쳐 내보낸 제자들 수를 헤아려 보니 무려 7천 3백여 명이 넘는다. 그 후 공립학교로 전출하여 있을 때의 졸업생 숫자는 헤아려 보지 않았다.
모두 귀중한 제자들이지만 담임을 맡았었고, 고마웠던 추억이 잔잔하게 남아 있거나, 수업을 통하여 올바른 가르침을 받았을 때를 가장 많이 기억하면서 은사(恩師)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된다.
시대적으로 어쩔 수 없이 한 때,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반공교육에 대하여는 지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사담기를 통하여 고백하면서 통회의 기도를 정성껏 바친다.
박종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