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환일의 해주오씨 정무공파 이야기 - 덕뫼에서 세거 500년
오환일의 해주오씨 정무공파 이야기 - 덕뫼에서 세거 500년
  • 시사안성
  • 승인 2018.05.09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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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오숙(吳䎘), 오빈(吳䎙), 오상(吳翔), 오핵(吳翮) 4형제의 활동(2)
숙헌공 오빈 묘
숙헌공 오빈 묘

2) 강직하여 참소를 받은 숙헌공 오빈(吳䎙)

오빈(1602, 선조 35~ 1685, 숙종 11)은 호가 농재로 1632(인조 10)에 알성문과에 급제한 후 내외 여러 관직을 두로 거쳐 자헌대부 지중추부사에 이르고 기로소(耆老 所:조선시대 정2품 이상 70세 이상 문관을 예우하던 기관)에 들었다.

공은 문무를 겸비하여 병자호란 때 인조의 총애를 받고 난이 끝난 후에는 우리나라가 중국과 함께 오랑캐 나라가 되었음을 분하고 원통하게 여겨 우암 송시열과 함께 세상사를 논할 때는 함께 비분강개하였다. 우암도 공과 뜻이 맞아 출근길에는 매번 공을 찾아와 함께 하였고, 공과 마주하면 날이 저무는 것도 몰랐다.

그러나 공은 강직하여 가끔 억울하게도 참소를 당하여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때문에 승차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공이 1632(인조 10)에 알성문과에 급제하니 그 명성이 높아 곧바로 사관(史官)에 추천되었으나 주위의 질투를 받아 그들의 방해로 성균관에 들어갔다.

주위에서 이를 보고 모두 안타까워했다. 1637(인조 15)에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임금은 강화도로 피난길을 나섰지만 적병이 가까이 접근하여 남대문에서 남한산성으로 길을 바꾸면서 공을 문무를 겸했다

하여 도원수 종사관에 임명하고, 삼남지방에 내려가 나라의 어려움을 알리고 의병을 독려하도록 했다. 이때 임금은 친히 칼과 말을 하사하며 손수 술을 따라 권하였다. 공이 임무를 수행하고 올라와 수원에 이르니 전라도 병마절도사 김준용이 군사를 이끌고 수원에 이르러 공에게 방책을 협의하였다.

공이 광교산에 올라 남한산성과 봉화로 서로 교신하며 날랜 기병으로 기습하고 성안에 대포를 준비하여 한편 방어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기습하는 전략을 세우도록 권하였다. 마침내 공의 방책대로 하니 적은 매번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드디어 공이 적장을 사살하니 적병은 사기가 크게 꺾이어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나 남한산성에서 화친이 이루어지므로 군사를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공은 1645(인조 23)에 통정대부가 되어 진주목사로 임명 되었다. 이때 경상도 관찰사 허적이 김자점과 함께 진주 반룡포에 둑을 쌓으려 했다. 이에 공은 농사철에 부역을 시킬 수 없어 이를 막으니 백성들은 모두 춤을 추듯 기뻐하였다. 그러나 허적이 김자점과 함께 둑을 쌓아 많은 이권을 얻을 계획을 했다가 실패함에 공에게 깊은 원한을 품게 되어 공은 병을 구실로 관직을 사퇴하고 물러났다.

공이 가장 크게 참소를 당한 것은 1649(효종 즉위년) 에 강계부사로 부임했을 때였다. 이 무렵 인삼을 바치는 방납 (防納: 지역특산물로 내던 공물을 타인이 돈으로 대신 바치던 세금)이 지나치게 많아 실제 가격의 몇 배나 되어 강계 백성 들에게 큰 부담이 되고, 그 액수를 미납한 것이 10여 년 동안 쌓여 인삼 1,000여 근이나 되고, 이를 바치지 못한 백성 수백 명은 옥에 갇히고 독촉이 심하여 민폐가 대단하였다.

공은 부임하면서 억울한 백성들을 모두 풀어주고 오래된 빚 문서를 불태우고 서울 상인 50여 명을 수사해서 먼 지역으로 쫓아 냈다. 특히 인평대군(인조의 3)의 노비를 빙자하는 무뢰배들을 곤장으로 다스리다 한 명이 죽게 되었다. 강계 백성들은 모두 시원하다고 기뻐했으나 상인들의 불만은 컸다.

숙헌공 오빈 신도비
숙헌공 오빈 신도비

다음해 봄에 암행어사가 평안도 지역을 염탐하다가 강계의 사건을 실제 조사도 않고 상인들의 불만 만을 듣고 조정에 부사는 부세를 지나치게 거둬 원망을 사고 있다고 보고 하여 조사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평안 도에서 조사하고 금부당상관 이시백 홍무적 등이 조사해 봐도 장부상에 문제점이 없고, 부세도 지나치게 거둔 사실이 없고, 도리어 백성들이 부사가 부임한 후 백성을 구제하고 폐단을 개혁하여 청렴하게 정사를 폈다고 하고 그가 돌아간 뒤에 백성들이 구리로 비를 세워 선정을 칭송하였다고 보고 했으나 임금은 오히려 3차 조사를 명하고 많은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을 아산에 유배시켰다. 뒤에 공에 대한 오해는 풀렸으나 이는 공의 공직 생활에 많은 지장을 주었다.

귀양에서 풀린 후 다시 관직에 진출하여 파주, 부평 두 지역의 부사와 첨지중추부사 공조참의를 거치고 지중추부사로 관례에 따라 기로소에도 들어갔다. 1685(숙종 11)에 돌아가시니 향수 84세였다.

공은 효우에도 돈독하여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형님 천파 공을 부모같이 모시고 두 동생과 기거를 함께 하며 돌보았고 관직을 맡으면 몸소 검소히 하며 공사를 분명히 하였으나, 성품이 강직하여 권력에 가까이 하지 않아 크게 승진하지는 못했다. 때문에 군자들이 아까워했다. 공의 곧고 굳은 성품은 후대의 모범이 되었다. 공은 늘 건강하여 사람들이 지상 선(地上仙)이라 했는데 작은 병으로 돌아가셨다. 조정에서는 예부낭관을 보내 치제하고 1740(영조 16)숙헌이라 시호를 내렸다.농재집1권이 있다.(계속)

 

오환일(해주오씨 정무공파 종중회장, 유한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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